상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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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上海.

중국 동부의 장강의 하구 유역에 있는 직할시이다. 베이징과 함께 '중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 나란히 등장하는 중국의 대표 경제 중심지이며 또한 문화, 상업, 금융, 산업, 통신의 중심지. 조계(租界)의 형성을 계기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로 탈바꿈한 상하이는 중국 근대의 선구이자 표상으로서, 21세기 전후로 중국 최고 규모의 도시로 군림했다. 이후 상하이방 세력의 약화와 심천등 여러 계획도시들의 발전에 많이 추월당했지만 아직 중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서 그 위용은 건재하다.[1] [2]

상하이 개관

상하이는 중국의 여러 도시 중 대표적으로 조계(租界)와 함께 발전한 예시이다. 조계와 함께 발전하기 이전, 1840년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하이가 처음 중국 역사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송(宋)나라 시기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리적으로 변방에 역할을 하던 상하이는 당나라 말기 중국의 상품경제의 발전과 송나라 시기 집시가 형성되어 상업항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거머쥐게 된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하였고, 그 결과로 1842년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섯개의 항구를 개방하여야만 했는데[3], 이에 따라 상하이는 외국 자본과 중국 본토가 만나는 접점이 되며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후 상하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반(半) 식민지로 전락했다. 아편전쟁의 승자였던 영국은 상하이의 개항이 확정된 후 대표적인 조약상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1845년 토지장정을 발포하여 거류용지의 토지를 영구히 차지했다. 영국의 뒤를 이어 미국,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이 상하이 도심에 거주지를 형성했으며, 이러한 토지들은 시간이 지난 후 조계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거류용지의 용도로 서구의 손에 넘어간 토지들은 오늘날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조계와는 달리 단순한 외국인 거류지에 불과했다. 평범했던 외국인 거류지가 식민지의 성격을 가진 조계지로 발전하게 된 바탕에는 당시 중국 본토 내부의 혼란스러운 움직임들이 깔려있다. 1853년 소도회의 현성 점령을 시작으로, 당시 혼란스러웠던 청 말의 시대는 조계의 형성에 있어서 큰 기여를 했다. 이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1860년 태평천국세력이 상하이 지역을 공격했던 사건으로 보인다. 태평천국 세력의 상하이 공격은 많은 수의 난민들을 만들었으며 동시에 조계로 유입시켰다. 여기에 위협을 받았던 서구 열강들은 자위를 위한 의용군을 조직했으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국 군대를 주둔시켜 자국 세력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후 차례로 행정, 입법, 사법, 경찰권을 자체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조계, 즉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이른바 '국내의 외국'이 되었다.[4] 이 시기를 기점으로 상하이 조계에는 서구의 자본과 문화가 유입되었으며 은행, 백화점 등 현대적 건축물들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상해를 상징하는 와이탄의 건축물들이 이 시기부터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동양적 색체와 서양적 색체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색적인 분위기의 상하이는 이 조계지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조계, 공동조계 그리고 화계

상하이는 조계의 설립을 계기로 새로운 도시로 탄생하게 된다. 조계는 1843년 영국이 최초로 베이징로, 허난로, 연안로, 황푸강으로 경계가 정해진 0.56제곱키로미터 반경에 설정했다. 이후 차례대로 프랑스, 미국이 현성 이북, 쑤저우허 이북 홍코우 지구 등에 조계를 설립하게 된다. 1860년에는 태평천국군과의 전투 과정에서 군사적 차원에서 월계축로(越界築路)라는 군용도로가 건설되었는데, 이는 조계지의 확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조계가 들어서 관할권이 다른 만큼 상하이는 도시의 관리 방식도 중국 전통 방법과 서양, 이렇게 양분되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혼란 속 약홛된 사회 통제로 인해 상해는 치안이 매우 느슨한 도시가 되었으며 퇴역관료, 밀매상, 건달, 매국노, 부호, 혁명가 등 만인의 집결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양상 속에서도 서양의 영향을 받아 기술적으로는 발전의 양상을 보였다. 상하이는 이 시기 중국 최초로 가스 공급이 이루어졌으며, 발전소, 상수도, 전화와 전보가 보급되었다. 또한 서양식 주소 편제가 도입되었으며 인도와 차도의 구분, 서양식 혼례, 써머타임제, 미스상하이 선발 등 서양의 제도와 풍습이 급속하게 도입되었다.[5]

당시 상하이는 크게 세 곳으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던 프랑스 령 조계지역, 영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동 조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 정부가 조계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한 구역인 화계(華界)가 바로 그것들이다. 화계는 청나라 정부가 청일전쟁 이후 외부에서 다시 중국 내부로 시야를 돌렸을 시기 조계의 지속적인 확대와 발전을 견재하기 위해 건설하였다. 청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1896년 난스를, 1898년에는 우쏭코우를 자발적으로 개항한 후 부두를 건설했으며 조계 확장에 대항하기 위해 1900년에는 쟈베이공정총국을 설치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견제 속에서도 조계지역은 서양열강의 자본의 힘을 받아 발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조계지역이 발전함에 따라 상하이의 기존 도심이 아닌 북부 신시가지가 번성하여 고층건물, 부두, 창고 등이 지속적으로 들어왔다. 한편 조계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봤을때 화계 지역까지 발전시켰는데, 조계의 영향력 아래에서 화계 지역, 상하이 전체 지역에 서양식 주택과 근대적 공장, 신식 학교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양무운동의 여파가 더해져 1865년에는 강남제조총국이, 1872년에는 윤선초상국이, 1890년에는 상하이기기직포국이 설립되었으며 광방언관, 남양공학[6], 경정여숙등 근대적 교육기관도 다수 설립되었다. 최초의 중국어 신문인 신보(申報)[7] 가 1872년 상하이에서 창간되었으며 각종 유명출판사가 상하이에 설립됨에 따라 상하이는 중국 출판문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840~1898년간 번역된 서양서적 561종 중 434종이 상하이에서 출판되었고, 1899~1911년간 간행된 정기간행물 중 40%이상이 상하이에서 나올 정도로 상하이는 출판중심지였으며 비슷한 시기 상하이는 좌익 영화가 흥행하는 영화제작의 중심지로의 역할도 수행했다.

상하이의 무역과 경제

상하이는 19세기 중반에 서양 세력에 항구를 개방한 이후 빠른 속도로 기존 중국 무역의 중심지였던 광저우를 따라잡았다. 1846~1852년 경에는 주요 산품 수출액이 광저우를 추월하였으며 당당히 중국 1등으로 자리매김했다. 상하이가 광저우를 넘어 제 1 무역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수출 품목들의 주요 생산지가 상하이 근처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당시 중국은 생사, 견직물, 차 등을 주력으로 무역활동을 진행하였다. 한편 상하이는 이 상품들의 주산지를 배후지로 지니고 있었던 탓에 광저우보다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수입의 관점에서 상하이의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하이는 19세기 당시 중국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무역항이었다. 따라서 화중, 화북의 창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작용할 수 있었다. 위의 두 장점들은 상하이를 당시 최고의 무역항으로 만들었다. 그 증거로 상하이는 1870년대 중국 전체의 대외무역 중 60%이상을 차지했으며 1930년에는 세계 14대 항구로 부상, 중국 수출입의 25%를 담당하기도 했다.

상하이는 19세기 발달한 무역도시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상하이의 정치체제

상하이의 권력구조와 정치적 위상의 변화

상하이의 인민대표대회

중국의 사회변동과 상하이의 변화

국유기업 개혁과 노동관계의 변동

상하이의 진입장벽. 호구제도

상하이 일상

식민와 탈식민지

상하이 요리

상하이는 장강의 하류에 있고 바다와 접해있기 때문에, 옛부터 다양한 식자재가 풍부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아편전쟁으로 인해 조계지가 되며 외국의 음식문화를 받아들여, 음식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그래서 현재 중국의 4대 요리에 상하이 요리가 속해있으며, 산둥요리와 더불어 한국의 중화요리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국 제 2의 도시가 된 지금은 더욱 발전하여 상하이를 미식의 명소로 만들고 중국 식도락 여행의 성지 중 한 곳으로 자리잡았다.

특징

상하이 요리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은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상하이는 장강 하류와 동중국해가 만나는 지역에 위치하여 있으며. 사계절이 뚜렷해 식재료가 풍부하다. 그래서 다양한 식재료가 사용된다. 때문에 상하이 요리는 양념을 약하게 하고, 재료의 맛을 살리는 조리법을 중심으로 한다.

참고문헌

  • 현대도시 상하이의 발전과 상하이인의 삶, 이일영 외 7명,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 페이스 오프 상하이, 신동흔, 랜덤하우스, 2010.
  • 근대 상하이 도시 공간과 기억의 굴절, 김승욱,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

각주
  1.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보도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상하이의 1인당 가처분소득은 58988위안으로, 이는 전국 평균인 25974위안에 비해 2배 이상의 수치를 보인다.
  2. 또한 SCMP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 400대 갑부 중 48명이 상하이에 거주중인데,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 65명, 떠오르는 경제도시 심천에 43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높은 수치이다.
  3. 이를 오구통상이라 칭하며, 다섯 항구는 광저우, 하문, 복주, 영파, 상해이다.
  4. 현대도시 상하이의 발전과 상하이인의 삶, 이일영 외, 한신대학교, p.05
  5. 현대도시 상하이의 발전과 상하이인의 삶, 이일영 외, 한신대학교, p.06~07.
  6. 상하이교통대학의 전신
  7. 신(申)은 춘추전국시대때부터 상하이를 칭하던 단어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명칭은 상하이를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