揚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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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이전의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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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강소성(江蘇省)에 위치한 양주(揚州)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양주는 공자가 편찬한 <서경書經>의 4부 중 임금과 그의 자손들이 다스리던 하夏나라에 대한 기록인 <하서夏書>에서 등장하는데, 하서 <우공禹貢)>에는 우임금이 중국을 다스릴 당시 중국 전역을 예주(豫州)와 이를 중심으로 하여 둘러싼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青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옹주(雍州)의 9개의 주로 분할한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의 양주는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은 회수(淮水)로부터 남쪽은 난링(南嶺) 산맥까지의 지역을 의미했다. 현재의 강소성 전체보다 넓었고, 강남(江南-장강 남부)의 광대한 지역도 포함하고 있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는 전국 제일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우공禹貢)>에 기록된 양주

淮海(회해) : 그들은 회수와 바다 사이가

惟揚州(유양주) : 양주이다

彭蠡旣豬(팽려기저) : 팽려호 물을 잘 막아 놓으니

陽鳥攸居(양조유거) : 철새들이 그곳에 살게 되었다

三江旣入(삼강기입) : 세 갈래의 강물을 바다로 인도하니

震澤底定(진택저정) : 진택 못물이 일정하여져

篠簜旣敷(소탕기부) : 크고 작은 대나무들이 퍼졌다.

厥草惟夭(궐초유요) : 풀은 싱싱하고 길게 자랐고

厥木惟喬(궐목유교) : 나무는 높다랗게 자랏고

厥土惟塗泥(궐토유도니) : 그곳 흙은 진흙이 많았다

厥田惟下下(궐전유하하) : 밭은 구등 정도였고

厥賦下上(궐부하상) : 부세는 칠등에다

上錯(상착) : 욕 등이 섞여있었다.

厥貢惟金三品(궐공유금삼품) : 공물은 세 가지 쇠붙이와

瑤琨篠簜(요곤소탕) : 구슬과 옥돌과 크고 작은 대나무와

齒革羽毛(치혁우모) : 상아·짐승가죽·새깃·소꼬리털과

惟木(유목) : 나무였다

島夷卉服(도이훼복) :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풀로 만든 옷을 바쳤다

厥篚織貝(궐비직패) : 그들의 공물 바구니에는 조개 무늬가 있는 비단이 담기어 있었고

厥包橘柚(궐포귤유) : 그들의 보따리에는 귤과 유자를 싸

錫貢(석공) : 공물로 바쳤다

沿于江海(연우강해) : 그들은 강해로 따라

達于淮泗(달우회사) : 다시 회수와 사수로 올라왔다

수 양제의 대운하와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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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를 이야기할 때 수나라 양제(煬帝)와 대운하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는데, 수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하면서 양주는 물류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수양제는 황제에 오르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조시대의 분열로 인해 남북 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다고 판단하게 되고, 곧바로 선대先代에 국고의 손실로 중단되었었던 대운하를 다시 건설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북으로는 북경(北京)에서 남으로는 항주(抗州)를 잇는 대운하가 건설되었고 이를 통해 양제가 물적, 인적 교류를 실시하면서 수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망국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40여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대운하 건설에는 자그마치 1억 5천만 명이나 동원되었고, 심지어는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수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만 명을 강가에 생매장하기도 했다. 얼마나 백성들을 부려먹었는지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어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운하의 5백 리 이내에서 사는 백성들은 수양제에게 음식을 갖다 바쳐야 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으나 수양제는 배가 떠날 때가 되면 이 음식들을 그냥 구덩이에 묻고 가버리기도 했다. 배는 백성들이 강의 양편 언덕에서 끌고 다녔는데, 그 인부들이 무려 8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수양제의 극심한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은 “토목공사나 전쟁에 동원되어 죽느니 불구로 산다 해도 노역이나 징집은 면하고 싶다.”라고 하여 스스로 팔이나 다리를 자르기도 했는데, 여기서 ‘복수복족(福手福足)’이란 말이 생겨났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은 노역이나 징집에서 면제되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인 2013년 4월에 이곳 양주에서 수양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견되기도 했다. 양주고운하에서는 그 대운하의 일부를 직접 볼 수 있다.

당대 이후의 양주

대에 양주는 국제항으로써 50만 이상의 인구를 거느린 10대 도시였으며, 명대 이후에는 소금의 운송 및 도매의 중심지로써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명 말기에 이르러 염세의 은납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돈을 징수하는 주체가 양주였기 때문에 이는 수많은 염상들을 양주로 모이게 했기 때문이다. 또힌 양주는 청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는데, 청나라 초기 정부에 완강하게 저항하던 명나라 유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던 땅에서 강희제(康熙帝)와 옹정제(雍正帝) 시기 청나라가 번영함에 따라 중국 물류 운송의 중심지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다. 당시 소금은 청나라 정부 최대의 수입원이자 가장 중요한 전매품이었는데, 정부는 이를 독점하고자 했다. 강희제는 군량미를 운송하지 않고 정부에 일정량의 은을 지불하면 소금 무역을 할 수 있게 하였고, 염상들에게 절대적인 권한과 특혜를 주었다. 이로써 양주는 거대한 대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안휘성의 휘주 지역 사람들이 양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염상을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소주와 항주의 도시들도 휘주상인(신안상인)들의 활동으로 인해 더욱 발달하는 기세를 보였다. 양주의 물질적 풍요는 도시문화의 성장을 촉진시켰고, 전국 각지의 수많은 학자와 시인, 극작가 그리고 화가들로 도시가 넘쳐났다. 이러한 양주의 번화함은 각 지역의 극단들이 모이면서 성행한 오페라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이로 인해 양주가 중국 최대의 서화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양주팔괴(揚州八怪)가 등장하기도 한다.

양주팔괴(揚州八怪)

양주팔괴는 금농(金農)을 필두로 나빙(羅聘), 정섭(鄭燮), 이선(李鱓), 왕사신(汪士慎), 이방응(李方膺), 고봉한(高鳳翰), 황신(黄慎), 민정(閔貞) 외에 고상(高翔), 거기에 화암(華嚴)을 더하여 함께 이르는 말이다. 대부분은 양주 이외의 출신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와 경제적인 원조를 구해 양주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서로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유파를 형성해갔다. 민간성, 현실성, 일상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들의 대담하고 독창적인 화풍은 당시 사람들에게 '기괴'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로 인해 각각 이름 앞에 '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었다. 양주팔괴의 공통적인 특색은 전통적인 화법에 구애받거나 당대의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작품세계를 구현한 것인데, 하나의 유파로 묶여 있긴 했지만 각자 하나의 제재에 천착해 이를 형상화하는 데 저마다의 열정을 쏟았다. 특히 왕사신은 매화 그림에 관한 한 일가를 이루었고, 이선은 소나무, 황신은 인물, 고상은 산수화, 정편교는 대나무, 이방응은 난, 나빙은 귀신을 형상화하는 데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양주에 가면 양주팔괴기념관에서 그 흔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