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의 한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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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arbfl0204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1일 (화) 22: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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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건국

몽골 왕조의 중국 통치 시점이 되는 창업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가장 이른 견해는 1260년 계승분쟁이 끝나고 쿠빌라이 칸이 몽골과 화북의 지배권을 획등한 때이다. 10여 년 후인 1271년 쿠빌라이는 "기원"을 의미하는 중국식 명칭 "대원"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송의 마지막 황제가 죽은 것은 1279년이었다. 원왕조 통치의 시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몽골이 강남을 완벽하게 정복한 1276년이이다.

쿠빌라이 시대

강남을 정복한 직후 몽골은 다시 한 번 중국을 통치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야율초재는 이미 중국과 몽골의 통치상의 중대한 차이, 즉 조세와 관료 충원의 차이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일반적으로 도시를 함락시킨 후 전리품을 획득했기 때문에, 세율에 맞추어 매년 징수하는 중국의 방식이 그들에게는 낯설었다.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료를 충원하는 중국의 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몽골은 자식이 부친의 지위를 물려받는, 혈연에 기반하여 관리를 충원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또 몽골 인은 문맹이기 때문에 시험을 볼 수도 없었다. 정복전을 벌일 당시 몽골은 문자가 없었고, 따라서 언어는 문자로 기록될 수 없었다. 칭기즈 칸, 그의 아들 우구데이, 손자 뭉케 모두 읽고 쓸 줄을 몰랐다. 칭기즈 칸은 위구르 문자로부터 새로운 자모를 만들어 몽골족이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인구구분

쿠빌라이와 그의 신하들은 이원적 통치를 했던 거란의 전례에 따라서 몽골 통치하의 비중국인과 중국인 사회를 분리하여 다스리고자 하였다. 몽골은 중국 내의 인구를 몽골 인, 색목인, 북인(北人), 남인(南人)의 네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몽골은 네 개의 종족집단으로 인구를 구분함으로써 지방사회를 고정화시키고, 각 호구에 다양한 업무를 할당하였다. 대부분 농민으로 분류되었지만, 일부는 황제에게 바칠 물품을 생산하기 위한 전문적인 직업이 부과되었다. 중국인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몽골 인과 중국인 사이의 결혼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이 통혼하였다. 원대를 통해서 겨우 200만명밖에 되지 않았던 몽골 족은 관리로 일할 남성이 충분하지 않아서 색목인을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들은 고위직에 비한족과 한족을 두명씩 나란히 임명하였다.

쿠빌라이 사망 이후

1294년 쿠빌라이의 사망 이후 장기간의 정치적 불안정에도 전쟁이나 반란은 없었다. 선출제도의 유산으로 인해서 몽골 황실에는 후계자를 결정하는 안정된 수단이 없었다. 1294년에서 1333년까지 9명의 황제가 통치하였지만 오직 한 명의 황제, 즉 아유르바르와다(인종, 1313-1320 재위)만이 후계자를 지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의 통치기간은 후계자 다툼에서 잠시 동안의 휴식기였다. 1323년 그의 아들이 사망하자 다시 혼전이 시작되었다. 나머지 여덟 황제의 권력은 무력으로 전복되었고, 그 중 2명은 살해되었다. 9명의 황제 모두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들의 부족 전통에 따르면, 황제는 정기적으로 황실의 측근들에게 재물을 분배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평화로 인해서 부족민들에게 나누어줄 전리품이 없었다. 그 대신에 황제들은 장기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폐를 마구 찍어냈다. 송대에 발전된 시장경제는 몽골 통치하에서도 계속 성장했지만, 원왕조 말까지 가치가 하락한 지폐를 계속 찍어냄으로써 지폐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감은 약화되었고, 사람들은 거래할 때 다시 동전과 은을 사용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

아유르바르와다 황제는 소년 시절에 한족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중국의 전통 학문에 대한 애정을 그에게서 배웠다. 관리선발에 대해서 처음 내린 법령 중 하나가 과거시험을 다시 치르는 것이었다. 황제와 신하들은 시험과목을 논의하였다. 만약 그들이 금나라의 전례를 따른다면, 문학적 재능과 경전에 대한 후보자들의 지식을 시험해야 하였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학자집단은 경전에 대한 지식, 즉 주희가 주석을 단 사서『四書』만을 시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문학적인 문장을 없애자고 역설하였으며, 이들 신유학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멸망

1332년 궁정의 권력자들이 열세 살이 된 토곤 테무르(1332-1328 재위)를 지명하여 제위에 올린 이후, 왕조의 몰락 원인들이 보다 분명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몽골의 재상은 정복 초기에 시행한 몽골의 정책들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한 노력들 중 하나가 황실의 지출을 쿠빌라이 정권 수준으로 줄이려는 시도였다. 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지폐의 남발이 만연되던 이 시대에 가치 있는 목표였다. 그러나 경제적 주도권의 회복이나 다름 없던 이 정책은 차별적인 민족정책와 서로 맞물려 실시되었다. 재상은 쿠빌라이 통치 이후로 많은 상호 통혼과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음에도 중국인과 몽골인의 완전한 분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전염병의 창궐

조정의 다른 당파들이 문화적 융합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토론하는 동안 일련의 재난이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1331년 후베이 성에 전염병이 돌아 주민의 9할이 병사하였다. 2년 후 양쯔 강 유역과 화이허 유역에서 약 40만 명이 죽었다. 몽골 치하에서 중국인 사망자 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학자들은 몽골 침략 초기에 화북과 강남의 인구를 합쳐 대략 1억 1000만 명에서 1억 2000만 명정도로 추산한다. 1290년 몽골 인구조사 담당자들은 5,900만 명 미만으로 계산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인구통계에 많은 인구가 누락되었다고 보므로 회의적이지만 1393년에 조사된 인구도 1070만 호(戶), 대략 6000만 명 정도였다. 8,500만 정도로 추정한 최근의 연구결과가 보다 정확할 적이다.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몽골의 침략이 안구 감소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왔다. 이에 대한 또다른 의견으로 윌리엄 맥닐은 사막의 비단길에서 초원길로 교역로가 변경된 것이 흑사병 전염균의 확산을 촉진시켰다고 본다. 몽골인들이 전세계로 이동함으로써 감염된 쥐벼룩이 말 안장에 부착된 몽골의 곡물자루에 담겨서 옮겨졌다. 히말라야 산맥 부근 저지대에서 발원한 흑사병은 1331년 중국에 도착했고, 그보다 더 많은 전염병이 1350년대까지 중국에서 창궐하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였다고 보고되었다. 유골을 검시한 고고학자들은 흑사병이 1338년이나 1339년쯤 중앙 아시아까지 전파되었고, 흑사병을 옮기는 쥐들을 매개로 하여 병원균이 교역로를 따라 1346년 크리미아 반도에 이르렀다고 결론지었다. 몽골은 중국에 생소했던 질병을 소개하였는데, 신대륙에 유럽인들이 도착하여 일어났던 것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민중봉기

흑사병으로 인한 대량의 인명 손실은 중앙정부에 엄청난 재정 부족을 가져왔다. 1340년의 정변으로 새 재상이 등장하였다. 1344년에는 황허가 범람하였지만, 재상을 7년이 지난 뒤에야 17만 명을 동원하여 겨우 운하를 다시 팠다. 이 공사에 동원되었던 굶주린 유민 집단들이 반란을 위한 완벽한 번식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미 가치가 없는 지폐를 지불받은 것이 그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1351년에 발생한 첫 봉기인 백련교의 난에서는 몽골의 시대가 끝나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의 시대가 지상에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반란군은 외눈박이 남자가 자신을 이끌 것이라고 믿었고, 반란의 주모자는 수리사업을 벌이던 현장에 외눈박이 석상을 몰래 파묻었다. 정부군이 반란의 주모자를 체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화이허 유역 전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몽골통치의 마감

원나라는 1354년까지 겨우 이 특이한 반란세력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반란군은 중국 전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엄청난 무질서가 몽골 통치 말기의 특징이었다. 반란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원장은 1350년대에 반란군에 가담한 농민 출신으로, 정부군과의 잇단 전투에서 승리하여 지위가 높아졌고 마침내 1368년 을 세우게 된다. 이로서 몽골의 중국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