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 울루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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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의 시기(원세조, 1260~1294)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권력 갈등

뭉케가 사천 조어산에서 갑자기 죽으면서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뭉케는 세 아우가 있었는데 바로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였다. 이 중에서 훌레구는 페르시아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의 경합이 벌어졌다. 막내인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의 총독이며 수도 카라코룸의 지배자였다. 그는 몽골리아의 지배자로서 쿠릴타이를 그 땅에서 소집하여, 자신의 칸 선출을 확실하게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그를 앞질렀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본부가 있던 상도에서 자신의 일파의 추대를 받아 칸으로 선언되었다. 칭기즈 칸 가문의 법에 따르면 서두른 이 선출은 무효였다. 전통적으로 쿠릴타이는 몽골리아에서 적절하게 미리 소집된 칭기즈 칸 일족인 네 울루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야 했다. 결국 아릭 부케도 카라코룸에서 칸의 칭호를 취함에 따라 둘의 대결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에 북진을 시작했다. 쿠빌라이는 1260년 말 옹긴 강까지 북진해 겨울을 나고, 아릭 부케는 예니세이 강 상류로 후퇴하였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전쟁이 끝난 것으로 여기는 실수를 저질러, 카라코룸에는 평범한 수비대만 남기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1261년 말 아릭 부케가 돌아와 수비대를 몰아내면서 고비 변두리에서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아릭 부케는 차가타이 울루스를 지배하고 있던 알구가 쿠빌라이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런 배신은 쿠빌라이가 훌레구와 알구에게 정치적 자유를 약속해주고,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제국의 지배권을 분할해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쿠빌라이 칸 시기의 정벌 - 남송 정복

가족 간의 경쟁을 종결지은 쿠빌라이는 송 제국에 대한 자신의 시도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는 유능한 지휘관인 바얀과 아주를 거느리고 위구르인 아릭 카야의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1268년 아주는 양양과 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슬람 기술자와 공성기계를 통해 1273년에 그들은 번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곧 이어 양양의 수비자인 여문환이 양양을 바쳤다. 그 뒤 바얀과 아주는 양자강 하류로 내려가 동부 호북, 안휘 그리고 강소의 거점들을 굴복시켰다. 다음에 절강을 침공하여 상주를 취하고, 송의 수도인 항주를 1276년 1월에 점령하였다. 아릭 카야는 호남의 중요한 도시인 장사와 광서의 계림을 함락하였다. 중국의 마지막 저항군들은 장세걸의 지도아래 그들의 함대를 끌고 해외로 피난하였다. 1279년 4월 3일 이 함대는 광주 남서쪽 애산도 근처에서 몽골 함대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흩어졌다. 이로써 마침내 몽골은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과 카이두의 대결 – 계속되는 내분

쿠빌라이의 집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가 속한 톨루이 가문의 탄압과 숙청에 반발한 우구데이⋅차가다이 가문이 반발하면서 초원 지대의 내전은 격화되었다. 우구데이 가문의 지도자였던 카이두는 탈라스에서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초원지대의 지배권을 칸의 동의 없이 분할했으며,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것은 쿠빌라이를 배제한 채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계속된 복속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내전은 격화되었다. 이 내전은 쿠빌라이의 생전에는 진압되지 않았고, 쿠빌라이의 다음 칸이었던 테무르의 시대에 카이두가 사망하면서 진압되었다.

쿠빌라이 시대와 칸 울루스의 성립

쿠빌라이가 칸의 위치에 올라가면서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알구와 훌레구에게 정치적 자유를 약속했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가 미치는 지역은 몽골 초원과 북중국, 티베트와 하서 지방 정도였다. 당시 몽골인들은 쿠빌라이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던 이 지역을 ‘칸 울루스’라고 불렀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상도로 옮겼으며, 폐허가 된 여진의 수도인 중도 부근에 새 도성을 축조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베이징 지역에 위치한 대도였다. 칸은 상도와 대도를 왕복하며 여름과 겨울을 보냈다. 이렇게 계절에 따라 수도를 옮기는 것은 유목민 계열 국가들의 특징으로, 후에 등장하는 청 역시 여름과 겨울을 다른 수도에서 보냈다.
칸 울루스는 중서성과 그 파견 기관인 10여 개의 행중서성이 관할하는 지역들로 나뉘었다. 만주와 몽골 초원에는 요양행성과 영북행성이, 고려에는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 중서성과 행성 아래에는 로⋅부⋅주⋅현을 두었고 일부 지역에는 행정과 군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선위사를 두었다. 또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과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가 있었고, 지방에는 행추밀원과 행어사대가 설치되었다.
쿠빌라이는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몽골인들로 넓은 지역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 한족의 제도가 아닌 다양한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몽골인을 다루가치로 삼고 한인과 색목인들을 하위 직책에 배치해 영토를 통치하려 했다. 한인과 남인은 고위직과 중요 직책에서 배제되었으며, 차별 대우를 받았다.

티무르 울제이투 칸의 시기(원성종, 1294~1307)

티무르 칸의 즉위

쿠빌라이 칸이 타계하였을 때, 티무르 칸과 그의 형 카말라 사이에 보좌를 둘러싸고 언쟁과 이견이 있었다. 쿠케진 카툰은 쿠빌라이 칸의 말을 빌려 현명한 판결을 내주었다. “쿠빌라이 칸께서는 ‘누구라도 칭기스 칸의 성훈을 더 잘 알고 있는 자를 보좌에 앉혀라’라고 말씀하였다. 너희는 각자 그분의 성훈을 말해 보아라, 그래서 여기에 있는 모든 대인들이 누가 더 잘 알고 있는지 알도록 하여라!” 카말라보다는 티무르 칸이 말을 하는 데 훨씬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카말라는 서툰 말솜씨로 조금 더듬거렸고, 티무르 카안은 좋은 성훈들을 깨끗한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했다. 이를 본 모두가 티무르 칸이 보좌에 오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인정하였다. 따라서 티무르 칸은 그들의 관례와 관습에 맞게 왕위에 올랐다.

왕국의 정비 - 왕자들과 다루가치들을 파견

티무르 칸이 왕위에 오르고, 왕자들과 다루가치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고, 각 행성의 장관과 재상들을 임명했다. 카말라는 카라코룸 지역으로 파견되어 카라코룸부터 키르키즈, 부르칸 칼둔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관할하였다. 아난다 왕자는 탕쿠트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쿠케추쿠르구즈 쿠레겐카이두두아가 있는 변경으로 파견되었다.

탕쿠트 지방과 이슬람교

아난다 왕자가 관할하는 탕쿠트 지방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이다. 아난다 왕자는 어렸을 때, 투르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미흐타르 하산 아크타치라는 사람에게 보내져 양육되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코란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랐다. 아난다 왕자가 탕쿠트 왕국의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 그 지역의 이슬람 강화시켰다. 이 때, 가잔 칸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탕쿠트 지방의 이슬람교가 단시간에 퍼져나갔다. 그의 휘하에 15만 명 정도의 몽골군은 거의 무슬림이 되었다. 그 중 사르탁이라는 아미르가 무슬림이 되기를 거부하고 티무르 칸에게 가서 “아난다가 항상 모스크에서 코란을 읽거나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고, 몽골 아이들을 할례 시키고, 군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다”고 불평하였다. 이 말을 들은 티무르 칸은 사람을 보내 아난다에게 예배를 멈추고, 무슬림을 멀리하며, 부처를 모시도록 하였다. 아난다는 “부처는 사람이 만든 것인데 어떻게 그를 경배하겠는가? 나는 나와 칸을 창조하신 그분을 경배할 뿐이다.”라며 그의 신앙을 확고하게 고집하였다. 이에 티무르 칸은 분노하여 아난다를 감금하였다. 그러나 쿠케진 카툰이 조언하기를, “당신은 왕국을 물려받은지 2~3년도 채 되지 않아 아직 불안정한 반면, 아난다는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다. 그 군대와 탕쿠트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무슬림으로 그들의 신앙과 종교를 지키고 싶어한다. 탕쿠트 지방은 반도들의 지방과 가깝기 때문에 그 지역의 사람들이 변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티무르 칸은 그의 충고에 동의하며 아난다를 탕쿠트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카이두 및 두아의 군대와 충돌

티무르 칸의 즉위 4년, 바락의 아들 두아가 군대를 이끌고 티무르 칸의 왕국 변경을 공격하였다. 군대의 관례에 맞게 모든 요충지에는 역참을 세우고 전령을 두었는데, 쿠케추에게 두아의 군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밤늦게 전달되었다. 그 때, 쿠케추는 연회를 벌이며 술에 취해 있어서 바로 출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쿠르구즈 쿠레겐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는데, 그들의 군대는 준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아서 두아의 군대에 크게 패배하였다. 그 결과 쿠르쿠즈는 두아에게 생포당하고, 쿠케추는 어느 외진 곳에 숨어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군대가 도망쳐 티무르 칸에게 왔는데, 이때 유부쿠르, 울루스 부카, 아미르 두르다카도 있었다. 이들은 쿠빌라이 칸 시기에 도망쳐서 카이두에게 갔던 사람들인데, 카이두가 다시 두아에게 보내 두아의 휘하에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두아를 배신하기로 협의하며 1만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티무르 칸에게 왔다. 처음에 티무르 칸은 그들을 믿지 못하고 어떤 전쟁에도 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울면서 “쿠빌라이 칸이 무서워서 도망쳤었지만, 두아에게 있는 동안 전쟁에 나가지도 않고, 칸의 군대를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티무르가 대칸이 되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왕자들과 협의하여 온 것입니다. 제가 카이두에게 도망갈 때, 데려갔던 군대보다 더 많은 수의 군대를 끌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만약 저를 믿어주신다면, 군대를 끌고 가서 두아를 추격하고 쿠르구즈 구출해오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아미르들 역시 그들을 중재하였으므로, 티무르 칸은 그들을 용서하고 출정하도록 지시하였다. 두아는 승리에 도취되어 마음 놓고 천천히 강가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그 때, 유부쿠르와 울루스 부카와 두르다카가 와서 두아의 군대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쿠르구즈는 구하지 못하고 대신 두아의 사위를 포로로 붙잡았다. 티무르 칸은 두아에게 두아의 사위와 쿠르구즈에게 필요한 음식과 그의 아미르 몇 명을 보냈는데, 두아는 그 전에 쿠르구즈를 죽였다. 그리고 쿠르구즈를 카이두에게 보내는 중에 그가 죽어버렸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 뒤 오르다 일족의 바얀이 사신을 보내어, 힘을 합쳐 카이두와 두아를 정벌하자고 하였다. 그 당시는 티무르 칸의 어머니 쿠케진 카툰의 만류로 출정하지 않았지만, 2~3년 뒤에 출정하여 카이두와 두아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카이두와 두아 모두 부상을 입었는데, 카이두는 이 때 얻은 부상으로 인하여 사망했다.

카이샨의 시기부터 툭 테무르까지의 시기(1307~1333)

카이샨 칸의 시기

1307년 테무르 칸이 42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다시금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테무르 칸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테무르의 부인 불루간 카툰(바야우트씨)과 좌승상 아쿠타이 등은 경조(현재의 시안) 부근 육반산에 주둔하고 있던 안서왕 아난다를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승상 하르가순을 위시하여 대도에 있던 몽골 귀족들은 반대파를 누르고 당시 횡맹에 내려가 있던 테무르의 조카 아유르바르와다를 부러들여 보위에 앉힌다. 그러자 알타이에 주둔하던 그의 형 카이샨이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카라코룸을 거쳐 남하, 아유르바르와다는 형에게 제위를 양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신 카이샨(무종)은 그를 아유르바르와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 갑작스럽게 집권에 성공한 카이샨은 제왕과 귀족들에게 상사와 봉작을 남발했다. 특히 쿠빌라이와 테무르 치세에는 극히 예외적이었던 일자왕호(一字王号)를 무려 15명 이상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물가도 폭등하여 이제까지 통용되던 지원초(至元鈔)의 가치를 절하하고 지대초(至大鈔)라는 새로운 지폐를 발행했다.

아유르바르와다에서 툭 테무르까지

1331년 카이샨이 의문의 급사를 당한 뒤아유르바르와다(인종)가 즉위했다. 그는 형의 방만한 정책에 제동을 걸고 몽골 귀족들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나갔으며 이를 위해 유학의 정치 이념을 활용하려 한다. 동시에 세수 확대를 통한 재정 문제의 해결과 이치(吏治)의 정돈을 꾀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시데발라(영종)가 즉위했다. 그는 부친의 치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모 다키 태후(옹기라트씨)가 사망한 뒤, 승상 바이주의 보좌를 받아 제왕들의 권위를 대폭 축소하는 이른바 '영종신정(英宗新政)'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그는 1323년 여름 상도에서 대도로 귀환하는 도중 남파점에서 피살되었다(남파의 변). 쿠데타 세력은 진김의 장자였던 캄말라의 아들 이순 테무르(태정제)를 제위에 앉혔다. 그러나 이순 테무르가 유림에서 사냥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그의 어린 아들 아라기바(천순제)를 지지하는 다울라트 샤의 상도파와, 카이샨의 아들 툭 테무르를 지지하는 킵착 군단의 엘 테무르의 대도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결국 대도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천력(天歷)의 변

'양도 전쟁'의 결과 툭 테무르(문종)가 보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찍이 차가다이 울루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의 형 코실라가 군대와 함께 남하하자 그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었다. 코실라(명종)는 1329년 2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칸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내몽골의 옹구차투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동생을 만났으나 거기서 나흘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독살이 분명했으며 배후에는 엘 테무르가 있었다. '천력(天歷)의 변'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쿠빌라이와 테무르의 시대가 끝난 뒤 카안 울루스 내부에서 계속되어온 정치적 모순, 즉 칸과 칭기스 일족의 힘이 얼마나 약해졌으며 동시에 권신들의 발호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특히 킵착, 아스, 캉글리 등의 친위군대의 정치 개입에 의해 칸의 권력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토곤 테무르 칸의 시기(원혜종, 1333~1370)

토곤 테무르의 즉위

원나라에서는 영종이 살해당한 이후 13년 동안 황제가 7번 바뀌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했다.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14세로 정권을 장악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즉위하기 전부터 토곤 테무르가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던 엘 테무르로 인해 엘 테무르가 병사한 뒤에야 황제로 즉위를 할 수 있었고, 즉위한 뒤에도 엘 테무르의 아들인 타라카이와 탕기쉬가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곤 테무르는 메르키트 바얀을 기용했다. 1335년 엘 테무르 일족이 탕기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얀에게 진압당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실권은 바얀에게 넘어가게 된다. 바얀은 과거제도로 인해 한족의 권력이 커진다고 생각하여 과거제도를 폐지하였고, 이는 한족들에게 몽골족에 의한 지배에 대한 반발심을 키우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바얀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토곤 테무르는 1340년 바얀의 조카인 토구다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쿠데타의 결과로 바얀은 실각하여 유배를 가는 도중 사망하게 되고, 실권은 토구다와 바얀의 동생인 마자르타이 부자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이 시기 원나라 조정에서는 내정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원의 문화적 발전

숙부인 바얀을 쫓아내고 집권한 타쿠타는 중원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문화주의자였다. 그는 송ㆍ요ㆍ금(宋遼金) 세 나라의 역사 편찬을 주관하여 <요금송삼사>를 완성하고, 바얀이 폐지한 과거를 재개하는 등의 개혁도 실시하는 등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고 정국 또한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타쿠타의 세력이 강화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토콘 테무르는 1347년 마자르타이와 타쿠타 부자를 유배 보내게 된다.

반란의 시작

왕실 내부에서는 이러한 분열이 일어나고 외부에서는 전염병과 함께 자연재해, 황하의 범람 등 천재지변이 동시에 일어났다. 천재지변으로 몽골인들은 점차로 남하하고, 원나라의 차별정책으로 예전 남송인들의 불만도 점점 커져가고, 상업 중심의 발달로 피폐해져가는 농민들의 삶 등을 이유로 각 지방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져갔지만 토곤 테무르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내부 권력 다툼을 하기에 바빠 이러한 백성들의 어려움에 조치를 취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348년 소금상인 출신인 방국진이 바다길로 운반되는 물품을 약탈하는 반란을 일으켜 바다길과 대운하를 통해 물자를 받던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서 식량이나 물자를 조달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각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홍건적의 출현과 타쿠타의 죽음

마자르타이가 1349년에 유배지에서 죽자, 토곤 테무르는 타쿠타를 복귀시켰다. 복귀한 타쿠타는 대운하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홍수로 인한 피해를 어느 정도 막았지만, 개수공사를 지도하던 백련교 지도자 가문의 홍건적이 봉기했다. 그리고 타쿠타는 대운하 정비 사업이 끝난 후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반란세력에 가담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이러한 홍건적들의 반란을 홍건적의 난이라 부른다. 그러나 1352년 타쿠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반란을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한산동이 죽게된다. 하지만 그 뒤를 유복통이 이어 받아, 한산동의 아들을 황제로 삼고 송의 후계자라 주장했다. 홍건적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타쿠타는 대규모 토벌군을 이끌고 홍건적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1354년 타쿠타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견제한 토곤 테무르는 타쿠타를 해임하고 유배지에서 살해했다. 이로 인해 칸의 권력은 커졌지만 원나라의 자랑이자, 대정복사업이 가능했던 이유인 강대한 군사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정 내에서 기황후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와 그 반대 세력이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고 이는 반원세력인 주원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 건국과 북원

이렇게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원장은 기타 반란세력들을 물리치고 화남을 통일한 뒤,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세웠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이후 북벌을 추진하여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까지 위협하게 되었고, 토곤 테무르는 이에 대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피신했다. 이 시기부터 원 왕조를 북원이라 부른다.

대원 칸 울루스의 멸망(1370~1388)

쿠빌라이의 마지막 계보

1370년 토콘 테무르 칸은 응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고, 고려 여인 기황후가 낳은 토곤 테무르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빌릭투칸)가 칸으로 즉위하여 군이 응창을 급습할 때 수십 기만을 이끌고 가까스로 몸을 피해 카라코룸으로 왔다. 그는 때마침 감숙 방면의 심아곡에서 명군에게 패한 뒤 영하를 거쳐 북방으로탈주한 쿠케 테무르(일명 왕보보)와 손을 잡고 명조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의 홍무제는 1372년 봄 장군 서달, 이문충, 풍승 등에게 명하여 15만 대군을 세 길로 나누어 출병시키나 톨라 강변에서 쿠케 테무르가 지휘하는 몽골군의 공격을 받아 수만 명이 죽음을 당하는 참패를 겪고 만다.
1378년 아유시리다라가 사망한 뒤 그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투구스 테무르가 칸위를 계승했다. 이에 의 홍무제는 톨라 회전에서 대패한 뒤 몽골에 대한 적극적인 정벌전을 중지하고 척진촌취(尺進寸取)의 소국적인 정책으로 선회하여 변경의 몽골인들을 회유하여 복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387년 풍승 등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랴오허를 건너 금산·농안·이통하 방면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무칼리의 후예 나하추를 압박했다. 명군의 감작스러운 군사적 압박으로 인해 나하추는 몽골군 20만 명을 이끌고 명군에 투항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을 투구스 테무르는 훌룬 부이르로 가서 동부 지역의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지만, 1388년 오히려 명군의 습격을 받아 패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수십 기의 병력과 함께 서쪽으로 도주하다가 톨라 강변에서 아릭 부케의 후예 예수데르에게 피살되고 만다.
투구스 테무르의 죽음으로 쿠빌라이에서부터 시작된 대원 칸 울루스의 맥은 사실상 끊어지고 말았다. 몽골인들은 1368년 대도·상도의 함락으로 중국을 상실하고 초원으로 돌아온 뒤부터 1487년 다얀 칸이 즉위하여 재통일을 시작할 때까지, 1세기 이상 장기간에 걸쳐 내분을 겪는다. 이 시대에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칭기스 일족의 권위 약화와 동·서 몽골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원 멸망의 원인

1340년대에 발생한 황허의 대범람은 대운하가 통과하는 하남과 강소 지방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또한 대대적인 제방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가혹한 처우에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 외에도 궁정에서의 정치적 암투, 화폐제도의 문란 등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하였다. 백련교도, 소금 밀매업자, 빈농들이 참여하는 반란이 황허에서 창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홍건군의 수령 주원장은 다른 반란세력을 제압한 뒤 1368년 명을 건국했다. 그는 북상하여 대도와 상도를 장악하고 몽골 세력을 장성 이북으로 몰아냈다.
일반적으로 1368년을 '원조' 멸망의 해라고 여기지만, 이는 타당한 견해가 아니다. 칸 울루스의 영역은 남북 중국뿐만 아니라 티베트와 몽골 초원도 포함하고 있었고, 1368년에는 제국 영역의 핵심부를 상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카안은 엄연히 상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에서는 이를 두고 '북원(北元)'이라고 불렀다. 제국의 최종적인 소멸은 아유시리다라의 후계자인 투구스 테무르가 살해된 1388년의 일이다. 이처럼 몽골 제국은 14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전반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각가의 울루스 내부에서 벌어진 일들이 시간적으로 우연히 일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신 연구에서는 청해-영하 인근지역에서 처음으로 흑사병의 병원체가 발생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이 14세기 전반 동방의 카안 울루스는 물론 서방의 삼대 울루스를 거쳐 유럽으로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몽골 제국구성하던 여러 울루스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나아가 울루스들을 연결하던 내륙 교통로의 기능이 마비된 것이 제국의 전반적인 약화와 붕괴를 초래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라시아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의 영향은 물론, 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