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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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무제의 생애

양 무제의 건국

양무제 소연은 난릉소씨 일족이다. 소연의 부친 소순지는 제의 고제인 소도성의 족재인데, 도성이 무장으로 각지를 전전하고 있을 때 그의 요속으로 도처에서 공을 세웠다. 따라서 소연은 제의 원공신을 부친으로 하고 왕실의 먼 일족이지만 종실의 일원으로 그는 일류 귀족이나 사대부와 교분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소연은 천자총명 박학하여 문무에 뛰어난 재간이 있어 젊었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제 명제 건무 4년(497년), 북위 효문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옹주(지금의 호북성 양양)를 침공하였을 때 명제도 대군을 보내어 방전하였다. 이때 소연은 한 무장으로 종군하였으나 제군은 대패하였다. 그러나 이때 소연의 일군만이 군세를 보존, 승선하여 큰 손실 없이 퇴각했다. 이 공으로 소연은 옹주 일대의 민정장관(자사)일 뿐 아니라 군부를 열어 주변 여러 주군의 군사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옹주는 지역적으로 유리한 위치여서 호시탐탐 찬탈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제의 정치

무제는 무략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박학다재하고 문학에도 탁월하며 불교에 심취한 천자였다. 그는 재위 동안에는 비교적 평화가 지속되어 남조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무제는 송, 제 이래의 혼란을 정리 재편하고 또 동혼후의 폭정이 가져온 혼란과 폐해를 시정하는 정치 사회를 개혁하는 여러 조치를 단행하였다.

무제는 동혼후 측근 한인 41명을 주살하고 혼란한 제도, 잘못된 부과, 음형, 남역 등을 페지하고 이 밖에 율령과 고악을 수집하여 저술하고, 오례를 찬정하였다. 오례 찬정은 풍속을 개혁해서 귀천의 분을 가려내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분의 획정과 그 준수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신분제 사회인 남조 문벌사회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관제개혁이다.

양 무제는 즉위 초년에 관제개혁을 명하고 다시 천감 7년에 두 번째 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양대의 관제개혁의 특징은 관직 청, 탁의 구별을 타파하려고 한 긋 하다. 관 자체로 청, 탁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청류가 취임하명 그 관은 청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청류는 갑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교양 있고 재간 있는 사람을 뜻한다. 또 기가 연령을 제한하는 규정을 철폐하고 일률적으로 30세 기가 원칙을 세웠다. 무제의 근본 생각은 귀족제도를 존중하지만 귀족제의 존중은 귀족적 교양의 존중이지 현실의 문지의 존중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지가 낮더라도 귀족적 교양을 갖춘 자를 임관 등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무제의 새로운 정책은 학관 시험제도를 장려하게 되어 후세의 과거제의 유력한 연원의 하나가 되었다. 위진 이래의 구품관제는 송, 제 때에 들어와서 관직과 품계가 괴리되고 호적의 위조가 심해져서 사, 서의 구별에 혼란이 일어났다. 또 한인층의 대두와 그들의 관계 진출과 더불어 귀족층은 많고 관직 수는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격렬한 관직 경쟁이 펼쳐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제의 새 관품 제도는 문벌 체제의 위기와 혼란에 대처하는 개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문벌 귀족 체제 아래서 소외된 한문층도 그 재능과 학문에 따라서 갑족층과 동등한 최고 정치 지배층에 편입시키는 한편 그 이하의 후문 및 이직층의 취관은 비직에 한정한다는 것으로 규정하여 재능주의적 관리등용과 사서, 귀천의 변별을 통일과 조화를 기도한 것이다.


그는 탐관오리가 조반의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가능한 관대하게 처리했다. 그에 대한 일화가 전해내려온다.

어느 날 누군가가 양 무제의 동생 소굉(蕭宏)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해 바쳤다. 소굉의 창고에 무기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그 말에 놀란 무제는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소굉의 집을 수색하러 갔다. 그런데 소굉의 창고에는 무기 대신 포목과 비단, 명주, 솜 등이 가득했으며 수억만 전(錢)이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무제는 동생의 역모가 사실 무근이라고 마음을 놓으면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 재산이 보통으로 많은 것이 아닐세.”


무제 제위 48년 동안은 현상적으로 전반은 남조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백성들을 심히 포악하게 다루어 폭정과 착취를 견딜 수 없는 백성들이 집단으로 도망을 쳤다. 이에 그는 법률을 제정해 "한 명이 도망치면 가족을 모두 인질로 삼도록 했다." 하지원은 양 무제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고 마을은 모두 황폐해졌다. 이로 인해 약탈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도적들이 무리를 지어 횡행했다. 법조문에 저촉되는 이들이 즐비하고, 법망에 걸리는 이들이 집집마다 있어 재앙이 갑자기 찾아드니 감옥도 따라서 사람들로 가득찼다."

양무제 정치 후반에는 정치 부패와 불교숭신으로 정치가 너무 관대하고 종실 제왕이나 귀족들의 불법을 방임하는 등 형전이 해이되고 기강이 서지 않았다. 그는 동태사에서 3차례나 사신 의식을 행했는데, 그때마다 백관들이 사원에 1억 전에 달하는 엄청난 금전을 바쳐 그를 위해 속신해야만 했다. 또 당시 사탑 건립을 위해서 막대한 재화를 소지하고, 승니, 도사와 이들이 은닉해서 수용하고 있는 도중이 총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기록은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서민이 불사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 경사에는 불사가 5배여 개, 승니는 10만 남짓에 이르고 이들에게는 부역이 면제되어 국가 재정에 막대한 결손을 가져왔다.


양 왕조의 멸망

양 무제의 대북관계를 살펴보면, 즉위 초부터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중대통 6년(534)에 북위가 동, 서위로 분열하고 이에 따른 혼란이 펼쳐지고 있었는데도, 무제의 대북 정책은 소극적으로 다만 북방 항인을 이용해서 불로소득의 이익만 얻으려고 하였다. 이런 무제의 책략이 후경의 난을 일으키게 되고 왕조 멸망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후경이 대보 2년 소역에게 패배하고, 얼마 후 소역이 강릉에서 자립해 제위에 올랐다. 서위와 북제는 후경의 난을 틈타 남하해 서위는 익주, 북제는 회남을 빼앗았다. 양나라 옹주, 자사, 소찰이 소역의 등극에 불만을 품고 서위에 투항한 후 승성 3년 서위가 파견한 우근, 양충 등과 함께 강릉을 공격해 양 원제를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역사는 이를 후량이라 칭한다. 하지만 그는 서위의 통제를 받는 괴뢰 황제에 불과했다. 서위 군대는 강릉에 장기 주둔하면서 소찰을 감독했고, 강릉은 재물을 약탈했으며, 강릉의 관민 수만 명을 노예로 삼았다.


참고문헌

1.이공범,『위진남북조사』,지식산업사,2003
2.젠보짠,『중국사 강요1』, 중앙북스, 2006
3.풍국초,『중국상하오천년사』, 신원문화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