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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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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40세 혹은 41세가 되었을 무렵 이백은 남쪽으로 내려가 절강의 섬계에서 도사 오균과 함께 지냈다. 도사 오균은 사마승정과 사형제였던 사람으로, 도교계의 거물이었다. 742년, 오균은 현종 황제의 초빙을 받고 장안으로 나가 한림원에 들어갔다. 오균은 원래 유학을 공부해 관리가 되려고 몇 차례나 과거를 보았지만 실패해서 도교 쪽으로 바꿔 성공했던 사람이었다. 먼저 한림원에 들어갔던 오균은 정세가 뒤숭숭해지고 조정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은 산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조정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오균이 이백을 현종 황제에게 추천했다. 조정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몸을 보전하려고 자신이  피했던 자리에 이백을 추천한 것이다. 어쨌든 도교계 거물의 추천이었으므로 현종 황제는 이백을 초빙하였다. 이백은 이윽고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출세 루트 중 두번째 루트인 도사 루트가 성공했던 것이다.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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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혹은 41세가 되었을 무렵 이백은 남쪽으로 내려가 절강의 섬계에서 도사 오균과 함께 지냈다. 도사 오균은 사마승정과 사형제였던 사람으로, 도교계의 거물이었다. 742년, 오균은 현종 황제의 초빙을 받고 장안으로 나가 한림원에 들어갔다. 오균은 원래 유학을 공부해 관리가 되려고 몇 차례나 과거를 보았지만 실패해서 도교 쪽으로 바꿔 성공했던 사람이었다. 먼저 한림원에 들어갔던 오균은 정세가 뒤숭숭해지고 조정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은 산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조정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오균이 이백을 현종 황제에게 추천했다. 조정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몸을 보전하려고 자신이  피했던 자리에 이백을 추천한 것이다. 어쨌든 도교계 거물의 추천이었으므로 현종 황제는 이백을 초빙하였다. 이백은 이윽고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출세 루트 중 두번째 루트인 도사 루트가 성공했던 것이다. <br><br> 하지만, 이백은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을 맡고도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①일단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은 한림원에 배속된다. 한림원은 궁중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배치해 놓은 부서인데, 이 부서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이 부서에 배속되었다고 해도 관직에 올랐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딱히 정해진 직무도 없었다. 한림원의 공식적 임무는 조칙의 문안을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꼭 한림원에서만 작성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림원이란, 천자가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부르지 않는, 이렇다 할 직무가 없는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그래서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었다. 한림원에 배속이 됨으로써 변하는 것은, 그저 궁중도서관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과, 말을 한 필 대여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후일 전승되기를 천자가 부를 때마다 이백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술을 좋아하는 사내라면, 직무가 딱히 없기 때문에 어디서 무얼하든 관계 없었으므로 감히 술을 마시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②이백은 종종 ‘천자를 수종(隨從)’ 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천자의 여행이나 궁중의 연회, 꽃놀이, 뱃놀이 등에 불려나가 시를 한 수 지어 바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호화롭고 현란한 시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이백은 궁중의 연회나 놀이를 호화롭고 현란하며, 화려하게 묘사하는 시에는 능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한림공봉은 천자를 도와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직책인데다가, 이백이 본디 능한 시가 아닌 다른 종류의 시를 지어 바쳐야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백은 직무에 충실하며 열심히 시를 지었는데, 「춘일행(春日行)」,「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같은 시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특히 「궁중행락사」같은 경우는 이백이 가장 자신 없었던 오언율시 형식에다가, 이백의 문학적 신념과 반대되는, 육조시대의 아리땁고 고운 시어를 대량으로 구사했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백 자신 역시 궁중 생활에 대해 회의감을 표했고, 한편으로 (회의감이 원인이 됐을 수도 있는) 항상 술에 취해있던 것이 화근이 되어 환관 고역사(高力士) 등 권문세력들의 미움을 받아 궁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아마 반쯤은 쫓겨난 것이고, 반쯤은 자신이 그만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유랑기(744~755)===
 
===유랑기(744~755)===

2018년 6월 26일 (화) 19:00 판

이백
李白

출생 701년
쓰촨 성
사망 762년
당나라 안후이 성
국적 나라
별칭 자(字)는 태백(太白, 타이바이)
호(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별명(別名)은 시선
직업 시 (문학)
종교 도교
주요 작품 산중문답(山中問答)
청평조사(淸平調詞)

이백(701년~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 출생이다.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생애

초반기(701년~726년)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25~26세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 촉 지역에 머물렀다. 이백의 촉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서는 아버지와 성씨, 칼과 관련된 일화, 그리고 도교 공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백의 성씨 논란

이백 아버지의 이름은 이객(李客)으로, 일반적으로 원래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하는데, '타관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관리로 부임했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은 십 여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객'인 것이다. 아마도 이객은 이런 이유에서 '객'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 때, '객' 뿐만 아니라, 이백의 아버지 이객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래 이씨가 아니었는데 촉 지역에 들어오며 이씨로 바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객이 본래 호인(胡人), 즉 이민족인 투르크나 혹은 다른 중앙 아시아계 민족이었는데 귀화했다는 추측과, 관헌의 수배를 받거나 원수에게 쫓겨 도주해서 성을 바꾸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만약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한다면,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성씨를 이씨라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성씨에 관한 관념은 지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과 하정우가 성씨 하나만으로 연이 맺어졌던 것처럼, 당시 중국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 일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아마 타지 출신의 상인이 중국에 들어와 살게 된 경우였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편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황실이 이씨였던 만큼 이씨가 가장 흔한 성씨였고, 때문에 다른 성씨가 아닌 황실의 성씨인 농서 이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이 비교적 편해질 것이다. 이 탓에 이백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백은 평생동안 자신이 농서 이씨, 즉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백의 경우에는 대체 농서 이씨의 어느 세대에 해당하는지가 불분명했고, 또 이백이 농서 이씨가 아니라 조군 이씨를 보고도 친척이라고 했다거나, 다른 계통의 이씨에게도 '종형' 혹은 '종제'라고 했다고도 한다. 즉, 실제로는 이씨가 아닌데 이씨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칼? 무협?

위호의 「이한림집서」에는 이백이 "젊은 시절 협에 임하며, 여러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협에 임한다는 것은 사내로서 자존심을 세우거나 폭력으로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이백이 칼도 휘두르고 사람도 죽여본 호걸이라는 이미지는 이 기록으로 인해 매우 유명하다. 위호는 실제로 이백과 교류했던 사람이므로, 이런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이백에게 술자리 혹은 다른 자리에서 직접 전해들었을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백은 사람도 죽여본 살인자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만하다. 예를 들어, 이백이 장안에 머물던 시절 불량배에게 둘러 쌓여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육조라는 사람이 나타나 불량배들을 쫓아내고 이백을 구해줬던 일화가 있다. 이에 이백이 육조에게 감사의 시를 지어바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검으로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베어보았다면 검술과 완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항상 하인과 함께 칼을 지니고 다녔던 이백이 불량배들을 스스로 퇴치하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면, 과연 검술과 완력이 뛰어난 사내였을까? 물론 정확히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죽여본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는 못할 만큼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여러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다는 말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 이 일화에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이백이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간에 자신이 칼로 사람을 베고 다닌 적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백은 협에 대한 찬양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사내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백은 항상 하인에게 칼을 가지고 다니게 시켰고, 술자리에서는 이따금씩 검을 들고 칼춤을 추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도교 공부

이백이 젊은 시절부터 도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신선이나 도사와 관련된 이러한 일화가 이백에게 신비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불어넣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절 도교를 공부해 도사가 된다는 것이 정말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죽림칠현의 모습처럼 신비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렇냐 하면, 우선 당시 도사가 되는 것은 우리가 대학 간판을 얻는 것처럼 대표적인 출세 루트 중 하나였다. 당나라 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①글(시)을 잘 써서 낙하산을 타거나, ②과거 시험에 합격하거나, ③도사가 되거나 도사들과 어울리는 것 세 가지였다. 이 중에서 2번 선택지의 경우 이백은 할 수 없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누구나 응시하고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었지만, 당나라 때만 해도 일명 '빽'이 굉장히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시험관을 미리 조우하고 자신의 글 실력을 뽐내놓는 '온권'을 통해 시험 전에 눈도장을 받아야지만 합격할 수 있었다. 즉 시험관의 입김이 강했던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문벌 가문 등 권세있는 집안 출신이어야 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송나라 때부터 비로소 시험지의 이름을 보지 않고 채점하게 하고, 그럼에도 필체를 보고 알 수 있으므로 한 명을 시켜 모든 시험지를 베껴 쓰게 하고, 시험기간에는 시험관이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여 오늘날 '수능'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이백이 자신이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하고 다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에 불과했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인맥, 가문이 중요시 되었으므로 이백은 ②과거 시험 루트가 차단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글 공부와, 도사가 되거나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때 도사가 되는 것은 숲속에 은거하며 권력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당나라 황실은 도교를 존숭했고, 도교 지도자는 조정에 자주 초청을 받아 포상이나 관직을 받았다. 천자가 도관(도교 사원)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사들은 대개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부적을 팔거나 기도를 해주면서 그들의 생활과 불만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기에, 천자가 도교를 존숭하며 도사와 친하게 지내며 교단을 장악해두는 것은 천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장사였다. 종교 교단이 불만 많은 백성들을 조직하게 되면 황건적이나 손은의 난 같은 무서운 사례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사가 되려면 도사 스승에게 접근하여 가르침을 전수받아야 했다. 이백이 자랐던 촉 지역은 도교가 성행하여 도사가 많았다. 촉 지역은 산이 많고, 경제력이 풍부하여 종교인들도 먹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백은 어렸을 때부터 도교 공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 때 육갑(六甲)을 배웠다", "15세에 기서(奇書)를 읽었다"고 후일 스스로 썼다. 유교에 사서삼경이 있듯, 도교에도 가르치는 책이 있었던 셈이다. 육갑이란 도교의 점치는 방법 등을 기록한 책이고, 기서란 기이한 책, 즉 정통 학문 서적 이외의 노장, 신선에 관한 책들을 말한다. 10대 후반부터는 아예 동암자라는 도사를 모시며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종합하면 이백은 글 솜씨를 다지며 낙하산을 노리거나, 동시에 도교를 공부하며 도사에게 가르침을 전수받는 두 가지 출세 루트를 착실히 밟았던 것이다.

구직기(726년~742년)

호북의 강릉

이백은 725~726년, 즉 25~26세 될 때 촉 지역을 떠나 구직을 시작했다. 이후 742년 장안에 들어갈 때까지 16~17년 동안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우선은 장강을 따라 배로 내려가 호북의 강릉에서 도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 사마승정을 만났던 듯하다. 이때 사마승정이 이백에게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다, 즉 신선과 도사의 풍격이 있다는 신탁을 주었는데,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우선 도교 최고 지도자에게 칭찬을 들은 셈이었으므로 이백은 굉장히 기뻐했다. 이때 이백은 자신을 '대붕'(장자에 나오는 아주 거대한 새), 사마승정을 '희유조'(대붕보다도 더욱 거대한 새)에 비유하며 두 마리 거대한 새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문장을 지었다. 이백 본인은 사마승정이 훗날 함께 넓은 하늘을 날아보자고 자신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 약속이 이백의 허풍이었는지, 아니면 빈말에 김칫국을 마셨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잘 지켜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백은 앞으로 16년간이나 낭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금릉, 양주 일대

호북의 강릉 다음으로는 금릉, 양주 일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지역은 남조 3백 년의 수도 지역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국 최대의 향락의 도시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백은 돈을 탕진했다고 한다. 본인은 30여만 금을 몰락한 귀공자를 모조리 구하느라 탕진했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인이 직접 유흥하느라 탕진해놓고 귀공자 핑계를 대는 경우나, 정말로 몰락한 귀공자를 큰 돈을 써서 구제하는 경우나 이백이 씀씀이가 헤픈 인물이었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호북의 안륙

이백은 돈을 다 쓰고 병까지 들었다고 적었는데, 그 이후 30세 무렵에는 호북의 안륙 지역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이 때 돈도 없고 직업도 없는 사내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역 명문가였던 허(許)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이백이 장강을 따라 금릉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안륙에 들러, 즉 거액의 돈이 아직 수중에 있을 때 만나서 결혼하고 다시 금릉에서 돈을 탕진한 후 초라한 행색으로 안륙에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백이 안륙 지역에 머물 때 지은 시에서 자신이 안륙에 "돌아왔다(歸來)"고 표현했기 때문에, 진실은 그래도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추측은 꽤나 신빙성이 있다. 이백은 이 안륙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기본적으로는 이곳에 머물면서 때때로 근처 먼 지역까지 나가 출세길을 계속 모색했던 것 같다. 나이는 서른을 넘어 어느덧 마흔에 가까워졌는데, 이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①안륙, 양양 등 지방 고관과 친하게 지내며 접근하기, ②수주(지금의 수현)에 있던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들과 어울리기가 그것이다. 이때 지방의 고관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뽐내며 발탁해달라고 청하면서도 비굴하거나 권력욕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미묘한 편지들을 써서 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백의 경우 이 미묘한 줄타기가 끝에 가면 살짝씩 엇나가서 "당신이 청을 듣지 않는다면 두번 다시 당신을 보지 않겠다. 큰 새는 비좁은 땅을 돌아보지 않고 넓은 하늘로 나아가는 법이다"라는 등 협박조로 말할 때도 있었다. 호방함을 미묘하게 어필하려던 것이 글을 쓰다보니 솔직한 감정의 분출로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뛰어난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일들은 으레 있는 것으로, 가수나 배우들이 작품에 정말로 몰입하게 되면 공연이나 연기를 하는 도중 사전 계획과는 다른 애드리브나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이 엇나가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뛰어난 예술가라고 칭송받는 이들은 대개 이런 면모를 지닌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감정에 과하게 몰입하여서 자신도 모르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인 것인데, 이백의 경우에도 구직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굉장히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 되겠지만 이런 예술가적인 면모 덕분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만약 정말 프로페셔널해서 구직을 청하는 시까지 미묘하게 잘 짓고 일생을 출세가도를 달렸다면 이백이 시인으로서 매력있는 인물로 다가왔을 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당시 선비나 도사에게 있어서 권력을 멀리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과도 같았기 때문에 구직자들은 이 미묘한 줄타기를 연마해야 했던 것 같다.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백에게 '우화등선'(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것도 사실은 선결조건이 있었다. 신선이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탈속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백에게 우화등선이란 신선이 되기 전에 먼저 권세를 떨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름이 없는 무명의 인물이 탈속을 노래하며 은거하겠다고 고집을 피워봤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은거하겠다더니 왜 세상으로 나왔냐는 의문을 사게 되어 운신의 폭을 좁히기 십상이다. 때문에 우선 이름을 날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때 이름 날리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되므로, 적당히 속세에 관심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본래 산을 좋아하니 쉽게 나서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하지만 당신의 청이니 특별히 산에서 나와주겠다"는 식의 거드름도 피울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하다. 이백은 권력욕이 없고 세속을 초월한 신선이라는 이미지가 유명하지만, 사실 이백은 구직 편지를 많이 지어 보냈다. 아마 신선은 권력을 얻어 유명세를 떨친 후에 되려고 했을 것이다. "주군을 도와 공업을 이루고 나면 본래 있던 숲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업이 이뤄지면 옷을 털어 작별하고 신선이 사는 섬 근처에서 한가로이 살겠다", "공업이 이뤄지면 주군과 이별을 고하고 낚싯줄이나 드리우겠다"는 편지들을 보면, 우선 천자를 도와 공업을 이룩하고 미련 없이 은퇴하는 유명인의 삶을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방 고관들에게 미묘한 줄타기를 하며 구직 편지를 보내는 루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위의 경우처럼 고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관직을 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출세길, 즉 ②호자양 등 도사들과 어울리기라는 방법도 남아있었다. 이백은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 원단구와 맹호연과 사귀게 되었다.

낙양과 산동

30대 중반이 지날 무렵에는 아예 멀리까지 나가기도 했다. 낙양은 서쪽의 수도 장안, 동쪽의 수도 낙양이라고 할 만큼 관청이 크고 발달한 곳이라 고관들도 많았다. 우선은 고관들에게 잘 보임과 동시에, 이 지역의 영산이었던 숭산에서 도사들과 어울리기 좋은 곳이었다. 이백은 그 후 제와 노 지방, 즉 산동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이 지역에 꽤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원진이나 두보 같은 사람도 이백을 산동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고 『구당서』의 이백 열전에도 산동 사람이라고 나와있다. 이백이 산동 지방에 머무를 무렵에는 이미 40세에 가까웠는데, 고향을 떠난지 어언 십여 년이 흘렀지만 이룬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초조했던 듯하다. "나는 훌륭한 보석을 갖고 있지만, 오랫동안 더러운 진흙 속에 파묻힌 채 버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경멸하며, 하찮은 물건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깨끗이 닦아서 드리고 싶지만 그럴 방도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금향현의 범 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편지 한 통을 화살에 매달고 쏘면 고을 하나를 떨어뜨릴 만한 사내지만, 허나 끝내 은상을 받지 못하고 시정잡배나 다름이 없어 부끄럽다", "강가의 늙은이가 나를 비웃는다"는 내용의 시도 지었다. 물론 이렇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우며, 초조했던 나날들도 있었지만 타지를 떠돌아다니는 이백에게 따뜻한 술을 내어주며 환대해주는 집주인을 만나 기뻤던 날들도 있었다. <객중작> 이라는 시에서는 "난릉의 좋은 술엔 울금초 향이 나고 옥잔에 따르니 호박 빛을 띤다. 주인이 나를 많이 취하게만 해주면 도대체 어디를 타향이라 할 것인가" 라고 노래했다.

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40세 혹은 41세가 되었을 무렵 이백은 남쪽으로 내려가 절강의 섬계에서 도사 오균과 함께 지냈다. 도사 오균은 사마승정과 사형제였던 사람으로, 도교계의 거물이었다. 742년, 오균은 현종 황제의 초빙을 받고 장안으로 나가 한림원에 들어갔다. 오균은 원래 유학을 공부해 관리가 되려고 몇 차례나 과거를 보았지만 실패해서 도교 쪽으로 바꿔 성공했던 사람이었다. 먼저 한림원에 들어갔던 오균은 정세가 뒤숭숭해지고 조정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은 산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조정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오균이 이백을 현종 황제에게 추천했다. 조정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몸을 보전하려고 자신이 피했던 자리에 이백을 추천한 것이다. 어쨌든 도교계 거물의 추천이었으므로 현종 황제는 이백을 초빙하였다. 이백은 이윽고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출세 루트 중 두번째 루트인 도사 루트가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백은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을 맡고도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①일단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은 한림원에 배속된다. 한림원은 궁중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배치해 놓은 부서인데, 이 부서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이 부서에 배속되었다고 해도 관직에 올랐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딱히 정해진 직무도 없었다. 한림원의 공식적 임무는 조칙의 문안을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꼭 한림원에서만 작성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림원이란, 천자가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부르지 않는, 이렇다 할 직무가 없는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그래서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었다. 한림원에 배속이 됨으로써 변하는 것은, 그저 궁중도서관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과, 말을 한 필 대여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후일 전승되기를 천자가 부를 때마다 이백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술을 좋아하는 사내라면, 직무가 딱히 없기 때문에 어디서 무얼하든 관계 없었으므로 감히 술을 마시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②이백은 종종 ‘천자를 수종(隨從)’ 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천자의 여행이나 궁중의 연회, 꽃놀이, 뱃놀이 등에 불려나가 시를 한 수 지어 바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호화롭고 현란한 시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이백은 궁중의 연회나 놀이를 호화롭고 현란하며, 화려하게 묘사하는 시에는 능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한림공봉은 천자를 도와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직책인데다가, 이백이 본디 능한 시가 아닌 다른 종류의 시를 지어 바쳐야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백은 직무에 충실하며 열심히 시를 지었는데, 「춘일행(春日行)」,「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같은 시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특히 「궁중행락사」같은 경우는 이백이 가장 자신 없었던 오언율시 형식에다가, 이백의 문학적 신념과 반대되는, 육조시대의 아리땁고 고운 시어를 대량으로 구사했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백 자신 역시 궁중 생활에 대해 회의감을 표했고, 한편으로 (회의감이 원인이 됐을 수도 있는) 항상 술에 취해있던 것이 화근이 되어 환관 고역사(高力士) 등 권문세력들의 미움을 받아 궁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아마 반쯤은 쫓겨난 것이고, 반쯤은 자신이 그만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유랑기(744~755)

두보와의 여행(744~745)

사직 후에 자신의 친구이자 시(詩)적 라이벌인 두보와 함께 낙양에서 산둥까지 여행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755~762)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16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군대에 함께 있던 이백도 지금의 구이저우 성인 야랑(夜郞)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759년 다행히도 삼협(三峽) 부근까지 갔을 때에 숙종의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760년 가을부터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2년 뒤 762년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 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작품

대표적으로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청평조사(淸平調詞)가 있다. 그는 절구와 고시를 특기로 한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자유분방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 <<이백(영원한 대자연인)>>, 안치, 신하윤 외 옮김, 이끌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