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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을 지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중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근심거리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이었다. 그들은 줄곧 침략해 와 사람들을 죽이고, 한 해 동안 정성껏 재배한 작물을 약탈해갔다.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모두 [[말]]을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말은 기동력이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활용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착안해 중국인들이 축조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한편 단순히 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기 때문에 초기 [[만리장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리장성과는 조금 다르다. [[진나라]] 당시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은 성벽이라기보다는 담에 가까웠다. 높이는 고작 2~3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마병의 접근을 막는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만약 사람이 넘고자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이다.
 
[[장성]]을 지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중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근심거리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이었다. 그들은 줄곧 침략해 와 사람들을 죽이고, 한 해 동안 정성껏 재배한 작물을 약탈해갔다.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모두 [[말]]을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말은 기동력이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활용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착안해 중국인들이 축조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한편 단순히 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기 때문에 초기 [[만리장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리장성과는 조금 다르다. [[진나라]] 당시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은 성벽이라기보다는 담에 가까웠다. 높이는 고작 2~3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마병의 접근을 막는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만약 사람이 넘고자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이다.
  
또한 장성을 축조하는 것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후술하듯 장성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건축사업이었다. 때문에 장성을 건립하는 것은 황제가 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장성의 건립은 당시 축조하고 있는 지방이 각 국의 영토에 속함을 표현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실제로 장성을 축조하는 시기와 장소는 각 국가가 안정화된 이후 국가의 최대영토에 해당하는 곳 혹은 주요한 지방인데, 이는 장성 외부의 적에게 장성 내부의 영토에 침입하지 말라는 공표의 의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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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성을 축조하는 것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후술하듯 장성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건축사업이었다. 때문에 장성을 건립하는 것은 황제가 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장성의 건립은 당시 축조하고 있는 지방이 각 국의 영토에 속함을 표현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실제로 장성을 축조하는 시기와 장소는 각 국가가 안정화된 이후 국가의 최대영토에 해당하는 곳 혹은 주요한 지방<ref>인데, 이는 장성 외부의 적에게 장성 내부의 영토에 침입하지 말라는 공표의 의미이기도 했다.
장성은 국가 내부의 정적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서에 따르면,‘정치적 죄를 지은 관리를 장성을 건립하는 곳에 보내 축조하도록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즉, 장성을 건립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이 일종의 처벌행위였으며, 견제의 용도로 장성의 축조를 진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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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은 국가 내부의 정적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서에 따르면,‘정치적 죄를 지은 관리를 장성을 건립하는 곳에 보내 축조하도록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즉, 장성을 건립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이 일종의 처벌행위<ref>였으며, 견제의 용도로 장성의 축조를 진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장성의 역사==
 
== 장성의 역사==

2019년 6월 24일 (월) 22:11 판

개요

중국의 역사가 진행되어 오면서 역대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흉노, 몽골, 만주족 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중국이 세운 성벽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始皇帝)(BC 259~BC 210)때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 770~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쌓은 것이다. 지금은 흔히 '장성(長城)'으로 줄여서 불러지기도 한다. 
만리장성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만 리보다 조금 더 길다. 이는 길이가 서쪽의 간쑤성, 자위관에서 동쪽의 허베이성 산하이관까지 2,700km에 이르며, 지형의 높낮이 등을 반영하면 실질적인 성벽의 길이는 6,352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혁

왜 장성을 지었을까?

장성을 지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중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근심거리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이었다. 그들은 줄곧 침략해 와 사람들을 죽이고, 한 해 동안 정성껏 재배한 작물을 약탈해갔다.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모두 을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말은 기동력이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활용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착안해 중국인들이 축조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한편 단순히 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기 때문에 초기 만리장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리장성과는 조금 다르다. 진나라 당시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은 성벽이라기보다는 담에 가까웠다. 높이는 고작 2~3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마병의 접근을 막는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만약 사람이 넘고자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이다.

또한 장성을 축조하는 것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후술하듯 장성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건축사업이었다. 때문에 장성을 건립하는 것은 황제가 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장성의 건립은 당시 축조하고 있는 지방이 각 국의 영토에 속함을 표현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실제로 장성을 축조하는 시기와 장소는 각 국가가 안정화된 이후 국가의 최대영토에 해당하는 곳 혹은 주요한 지방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한고조 유방(劉邦)은 기원전 200년, 전차 중심의 32만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침입했던 흉노족의 기마군단과 맞서 싸웠다. 전차 중심의 한군과 기마 흉노군 중 어느 쪽이 강한가를 판가름하는 전쟁이기도 했는데, 결과는 흉노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편 이 패배 이후, 중국의 왕조와 정착민족은 북방민족의 무(武)에 대해 콤플렉스를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은 '무'를 업신여기고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잠재된 열등감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콤플렉스가 역으로 작용한 중화사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위진남북조

명·청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 바로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16세기 명나라 시기에 기존에 있던 만리장성을 보수, 신축하였다. 장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명대 이전에 자주 일어났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공격하는 쪽도, 수비하는 쪽도 기술이 과거보다 진보한 상태이기에, 축조된 장성의 높이도 7~8M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장성은 말이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훌륭한 것인데 기존의 장성보다 평균 100KM나 남하한 위치에 형성되었다.[1] 이 시기 장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곳이 많다. 이는 적이 침입했을때 접근이 쉽지 않은 험준한 곳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한편 이 시기 강수량이 많은 지역으로 장성이 남하한 이유는 둔전(屯田) 경작의 용이함을 위해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둔전이란 주둔군이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밭을 경작하는 등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2] 만약 전체 군사를 열 명으로 본다면 이 중 여덟명은 둔전을 경작하고, 나머지 둘이 근무를 서는 것이 당시 명나라 군사 체제였다. 한편 1년동안 농사를 지으려면 연 평균 강수량이 200ml로는 힘들다. 따라서 이들은 둔전을 유지할 수 있는, 연 평균 강수량이 500ml인 지역으로 내려온 것이다.[3]

명대 말에 접어들면 현재의 장성과 유사하게 구운 벽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벽돌은 오르도스 내의 장성 중간 부분에서 동쪽으로 한정된 지역에 나타나는데, 이런 벽돌을 '전(磚)'이라 부른다. 당시 장성의 평균 높이는 7~8m 정도였고, 폭은 기저부가 8m정도, 상부는 4~6m 정도였다. 절벽이나 능선에도 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몽골 말이 장성을 뛰어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중국 왕조 역사 중 한나라와 함께 몇 안 되는 한족 중심의 왕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가 명대에 쌓은 장성의 은혜를 입었다. 청나라는 몇 번이나 북방 이민족을 쫓아버린 일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봤을 때 북방의 이민족이 강성해진 것은 항상 습격과 약탈에 의해 식량과 자원을 공급받은 시기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전 왕조들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막으려고 했던 장성인데, 청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는 청나라 정착민족이 또 다시 이민족을 막기 위한 '방어'의 개념으로 장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유목민들과 한족이 뒤섞이는 중국 역사를 참고해본다면 장성은 장성 안쪽과 밖을 나누는 기준으로서 작용하지만, 그 경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분명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 방법

사기에 장성의 축조와 관련해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대체로 ‘’과 ‘’이 ‘쌓다’라는 의미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성이 인공적인 힘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내포하는데, ‘築’이 ‘나무와 삽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성은 사람이 힘을 가하여 쌓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장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험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축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내려온 전통 중 하나인데, 사기에 따르면 ‘' 장성은 漳水와 涪水를 이용하여 지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는 장성을 두 강의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는 의견과, 두 강의 제방을 증축하였다, 즉 제방이 곧 장성이 되었다는 의견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의 서장성이 비슷한 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서술하였으나 실제로는 濱洛와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자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다고 해석한다. 즉,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漳水와 涪水가 1차 방어선이고 장성이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높은 산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축조한 것도 장성의 축조법 중 하나였는데, 사기에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장성을 축조하였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팔달령 장성’또한 높은 산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또한 ‘랴오둥 장성’은 축조할 당시 절벽을 깎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렇게 험한 자연물은 적으로 하여금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성을 축조할 때 최대한 이용하였다.

명나라 이전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가 사용되었다. 중국 쪽에서 볼 때 동쪽이나 산간 지역에서는 주변에서 조달하기 쉬운 돌을 쌓아 만든 곳도 있고, 돌과 흙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한 곳도 있다. 흙은 주로 황토를 사용했다. 황토는 물과 함께 절구에 빻아 건조시키면 아주 단단해지는 성격이 있기에 성벽을 쌓는데 유리했다. 그래서 치수를 재어 나무 판으로 만든 틀 안에 황토와 물을 넣고 반죽하여 건조시킨 후 시간이 지나 틀을 빼면 제방과 같은 장성이 생긴다. 이러한 건축 기법을 '판축(板築)이라고 한다. 서쪽의 실크로드가 있는 곳으로 가면 황토 점토 안에 억새나 타마리스크 가지 등의 보강재를 섞은 곳도 존재한다. 또한 표면에 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곳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벽돌은 판축 장성과 같은 방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와 물을 반죽해 넣어 햇볕에 건조시킨 벽돌이다.

현황

만리장성은 중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유산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현재까지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칭송되고 있다.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만리장성은 중국의 관광상품으로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는 험준한 산과 협곡은 물론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자연경관'때문인데, 관광철이 되면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그 인기는 굉장하다. 그래서 현 베이징의 만리장성은 '인간 장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와 함께 '문화재 훼손 문제, 환경 오염 문제'등의 여러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문제가 심각해지자 2006년 부터 만리장성 보존을 위한 법률을 강력히 시행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재는 만리장성 훼손과 주변에서 이뤄지는 광물 채굴 작업이 장성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불법적인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는지 등을 알기 위해 드론과 위성을 이용해 이를 방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는 만리장성은 중국의 문화사를 바탕으로 바라보았을 때, '중화사상'의 근본으로 중국에게 있어서 구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관련 논란

만리장성과 북한 논란

혹사논란과 맹강녀의 전설

만리장성은 지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큰 구조물이다. 피라미드가 지어질 당시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듯, 만리장성 역시 대규모 노동력을 바탕으로 축조되었다. 장성 건설에도 어느 시대에나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는데, 그 원인은 주로 기아와 과로였다. 갈증 역시 주요 원인으로 꼽는데, 힘든 노동으로 땀을 흘려도 쉽게 물을 구할 수 없는 곳이 많고, 보급되는 물 역시 턱없이 부족해서 많은 수의 사람이 죽어갔다고 추정된다. 장성 건설에 따른 노동자의 피해는 어마무시하다. 기록에 따르면 고된 노동에 내몰린 사람들의 3분의 1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하강 유역의 공사 현장이라도 물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은 마찬가지로 추정되는데, 황하강은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4] 고된 노동과 생존을 보장하기 어려웠던 작업 환경 탓에, 만리장성과 관련된 민간의 이야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맹강녀(孟姜女)이야기이다. 맹강녀 이야기는 제(齊)나라 시기의 이야기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섬서성에 사는 젊은 부부인 범기량(范杞梁)과 맹강녀의 이야기이다.

이 둘이 신혼생활에 푹 빠져있을 때 남편 범기량이 장성 공사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범기량이 끌려간 곳이 바로 산해관(山海關)이다. 산해관만리장성의 가장 동쪽에 있는 관문이자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다. 일년이 지나도 노역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를 않자, 맹강녀는 남편을 위해 준비한 겨울옷을 가지고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이 때 머슴과 몸종을 하나씩 데리고 갔는데, 머슴이 몸종을 죽이고 맹강녀를 겁탈하려 했다. 하지만 맹강녀는 정조를 지키겠다는 일념만으로 머슴을 죽이고 혼자 산해관을 향해 갔다.여러 고초를 겪고 도착한 산해관에서 맹강녀가 들은 소식은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시신은 자신이 짓고 있던 장성 안에 묻혀 있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맹강녀가 장성에 기대어 목이 터져라 울자 갑자기 장성의 일각이 무너지더니 그 안에서 남편의 시신이 나왔다.

이러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중국 전역에서 유행하였다. 이는 당시 만리장성 축조에 대한 당시 백성들의 원망과 공포를 잘 나타낸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만리장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나라 속담 중 '하루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속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만리장성을 쌓으러 갔는데, 부인이 글을 모르는 어떤 남자를 유혹하여 하룻밤을 동침하고는 그에게 남편에게 옷가지와 편지를 전해주고 오면 남편을 버리고 함께 살겠다고 했다. 남자가 이 말을 믿어 심부름을 했는데, 편지에는 남편 대신 성 쌓을 사람이 이 편지를 들고가는 사람이니, 그를 대신 붙잡아 성을 쌓게 하고 남편은 빨리 도망쳐 나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남편은 그 남자에게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잠시 성을 쌓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대로 도망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내와 함께 살았다. 

이러한 설화 역시 당시 장성 축성과정이 얼마나 고댄 것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또 한편으로는 장성과 관련된 속담이 우리나라까지 들어와 사용되는 것을 보아 과거 한국 사회에도 장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사마천 역시 이러한 혹사에 대해서 평한 바 있다. 사마천은 진나라 때 무리하게 쌓은 장성과 직도(直道)를 직접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야말로 백성의 괴로움을 무시한 공사로다. 진이 제후를 멸했을 때는 천하의 인심은 아직 불안했고, 다친 자들의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명장 몽염은 공사를 멈추게 하는데 몸을 바치지 않았다. 노역에 내몰린 백성을 구하지 않았고 늙은이와 고아를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백성의 화합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 시황제에게 아첨하느라 오히려 공사를 권했던 것이다. 

이렇듯 장성은 시황제의 폭정의 상징으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이다.[5] 사마천 식의 해석으로만 장성 건설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또한 장성은 비록 단기적으로 봤을 때 심각한 노동력 착취로 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왔다. 황하 강 아래에서 거주하는 중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실상 장성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6]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때 장성을 억압의 상징으로만 보는것은 옳지 않다.

2012년 발표

참고문헌

각주

  1. 기존의 만리장성이 형성된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200ml 인 지역이었는데, 남하한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500ml인 지역이었다.
  2. 명나라는 평지에서 '둔팔수이(屯八守二)를 주둔군의 방침으로 삼았다.
  3. 또한 연 평균 강수량이 200ml인 지역의 경우 해발이 너무 높고 연 평균 기온도 낮을 뿐더러 토질에 암반이나 돌멩이가 많아 둔전을 유지하기에 힘들었다.
  4. 황하 강 유역 지하수에는 불소 성분이 많아 음료수로로 적당하지 않다.
  5. 사마천은 한 무제와 진시황을 어느정도 겹쳐서 보았는데, 동시대의 한 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글을 쓸 수 없었다. 사마천 본인이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에 처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진시황과 만리장성을 축조한 몽염에 대한 비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 명나라 때의 순무왕예나 여자준이 오르도스 현지에서 장성의 수축을 통절히 상소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 진굉(秦紘)은 장성 건설이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일이라고 답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