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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源

도장 인.png

갑골문, 금문의 印은 손으로 한 사람의 머리를 누르는 모습이다. 그 본래의 의미는 ‘아래로 누르다’이다. 또한 ‘억압하다’의 抑의 본래자이다. 후에 印은 ‘누르다’의 의미에서 ‘전적으로 누름을 요구함으로써 도장 자국을 남길 수 있다’는 의미로 파생되었다. 선진시기 印은 새(玺)라고 불렸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치한 후로 황제의 도장만이 새(玺)라고 칭할 수 있다고 규정되었다. 다른 사람의 도장은 모두 예외 없이 印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대체로 누름으로써 자국을 남기는 모든 것들은 印이라 칭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손도장(지장), 발도장, 인쇄 등이 있다.[1]

文化

印의 윗부분은 손을 뜻하고 아래는 사람을 뜻한다. 즉, ‘손으로 사람을 내리누르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한자의 최초의 뜻은 抑, 按, 摁과 같았다. 특히 抑의 경우에는 印에서 발전해 나온 문자이다.[2] 印이 점차 인장(印章)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手를 별도로 추가하면서 抑을 ‘누르다’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印에 대한 혼란을 없앴다.[3]

중국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장이 있었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이 육국에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려고 유세를 다닐 때, 육국 재상의 인을 차고 한 때 위세를 누렸다. 印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관직의 계급이 다를 경우에는 서로 다른 인을 지녔다. 인에는 끈이 있는데, 綬라고 하는 비단으로 만든 끈을 이용하여 몸에 걸었다. 이것은 후대에 印을 작은 케이스에 넣는 것과 다른 것이다. 또한 당시의 印은 종이가 아닌 진흙에 찍었다. 종이는 한대에 발명이 되었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수・당대 이후부터였다. 그 이전에 印을 진흙에 찍었던 것은, 당시 공문을 간독(簡牘:옛날 중국에서 종이가 없었던 때에 글씨를 쓰던 대쪽과 얇은 나무쪽)에 썼기 때문이다. 공문을 전할 때에는 그 비밀을 유지해야했기 때문에 간독을 단단히 묶고, 끈 위의 이음새 부분에 진흙을 칠한 뒤 그 위에 인을 찍었다. 이처럼 진흙이 서신이 봉하는 작용을 했기 때문에 봉니(封泥)라고 하였다.

  1. 谢光辉, 『常用汉字图解』, 北京大学出版社, 1999, p.138
  2. 조선탁, 송강호 역, 『중국어 한자의 어원』, 지식과 교양, 2011, p.126
  3. 김성재,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 동녘, 2000, p.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