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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久必合,合久必分”,是谁家的大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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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중국 연구의 방법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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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제 변혁에 대한 여러 논쟁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양극단에 치우친 논쟁은 없었다.  
 
중국 경제 변혁에 대한 여러 논쟁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양극단에 치우친 논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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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양극으로 분리된 각 진영 중 어느곳도 중국 경제의 굴기가 내포하고 있는 연구의 매력을 떨쳐내지 못하였다. 필자 또한 오히려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론과 수치가 명확한 판단을 제시해 줄 수 없을 때면 나는 항상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의 말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3가지 방법으로 경제를 연구할 수 있다. 이론을 통해서, 통계를 통해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서 "중국 역사의 기본 그리고 기초"로 다시 가보려 한다. 중국 역대 경제 변혁에서 그 득과 실을 깊이 연구하고, 객관적인 법칙과 규칙등을 찾아내면 아마 나름 괜찮은 모험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본 책 집필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양극으로 분리된 각 진영 중 어느곳도 중국 경제의 굴기가 내포하고 있는 연구의 매력을 떨쳐내지 못하였다. 필자 또한 오히려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론과 수치가 명확한 판단을 제시해 줄 수 없을 때면 나는 항상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의 말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3가지 방법으로 경제를 연구할 수 있다. 이론을 통해서, 통계를 통해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서 "중국 역사의 기본 그리고 기초"로 다시 가보려 한다. 중국 역대 경제 변혁에서 그 득과 실을 깊이 연구하고, 객관적인 법칙과 규칙등을 찾아내면 아마 나름 괜찮은 모험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본 책 집필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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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久必合,合久必分”,是谁家的大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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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分久必合 合久必分)"는 중국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인가?</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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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중국 남자들은 <삼국연의>로부터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이웃집의 한 낡은 책꽂이에서 번체자로 <삼국지연의>라고 쓰인 누렇게 바랜 책 한 권을 얻었다. 책을 펴들고 읽기 시작하자, 나관중 선생의 첫 번째 줄이었던 "话说天下大势, 分久必合, 合久必分 말하자면, 천하의 흐름은 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라는 말은 11살이었던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br>
  
==“分久必合,合久必分”,是谁家的大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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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이 지나 책 더미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머리를 박으며 고심하고 있던 나는 한가지 의문이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관중 선생이 물었던 몇몇 질문들은 찾기 시작했다. :왜 이 세상의 흐름은  "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일까? 왜 분리되지 않으면 다시 합쳐질 수 없는 것일까? 왜 합쳐지만 반드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는 도대체 "중국의 역사적 필연적 흐름"인가 "이 세상의 역사적 흐름"인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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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들은 어느 정도 도전이 필요한 학술적인 질문들이었고,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이자 중국사 전문가인 프레드릭 와커맨Frederic Wakeman은 심지어 마지막 질문을 두고 서방 역사와 동방 역사 간의 "차이점"으로 결론을 내렸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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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유럽은 모두 부락에서 시작해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동방의 춘추전국시대는 서방의 고대 그리스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공자가 여러 열국을 돌아다니던 시기는 피타고라스가 이탈리아의 남부에서 기하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고 맹자가 태어났던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12살이었던 시기였다. 기원전 359년에 동쪽에서는 처음으로 중앙집권식의 법이 등장하였고(상앙의 변법) 서방은 기원전 336년에 알렉산더 제국이 나타났다. 한무제(기원전 156 ~ 87)는 중앙집권 제도라는 실험을 실시하였고, 서방에서는 카이사르가(기원전 102 ~ 44) 고도의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공화제를 대체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동서양 세계에는 때 일통을 이룬 한나라와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들이 우뚝 솟아난다. 184년 한나라는 내전에 빠지고 이후 400년 가까이 삼국 양진 남북조시대(三国两晋南北朝)에 들어서게 되고, 로마제국은 외민족의 침략을 받아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동서양의 역사는 갑자기 크게 갈라져 흐르지 시작한다. 중국은 589년 새롭게 통일을 이루고 긴 시간 분열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은 암담한 중세 시대에 들어서고 아주 긴 시간 동안 봉건제의 시기를 거친 뒤, 다시는 통일되지 않는다. 비록 1999년에 유로화가 나타나고 화폐에서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유로화의 존폐는 여러 사람들의 논쟁거리가 되어버렸다. 프레드릭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첫 번째 제국이었던 한나라와 로마가 붕괴된 이후, 중국사와 유럽 사는 왜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을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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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특정한 답이 없는 역사적 난제이다. 누군가는 지리적 조건에 따른 민족 심리, 종교, 언어, 우연적인 상황 등의 차이를 들어 다각적인 설명을 최대한 할 수는 있다. 프레드릭이 던진 답은 깔끔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의사들이 쓰는 메스처럼 아주 정확했다.) 그는 말했다. "통일은 중국의 한 문화다. 一种文化"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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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통일의 문화"를 통해 역사적 영광을 획득하였다. <역사연구>라는 책에서 영국의 역사학자인 아널드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는 중국의 역사를 두고 "유일하게 지금까지 유지된 사회"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통계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는 21개의 문명사회가 출현했는데, 그중 중국 사회만이 문명의 특징을 가장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하나의 견본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통일"이라는 문화에서 오는 것이다.  <br>
  
<big>"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分久必合 合久必分)"는 중국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인가?</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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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가장 원하지 않으며 가장 싫어하고 가장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은 바로 "분열"이다. 통일은 하나의 숙명과 같으며 중국 문화에서의 최종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통일은 그 자체로 정치나 경제의 발전을 절대 보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토인비 또한 통일이 도대체 "그 자제로 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느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지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가 인정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통일 국가의 성공과 굴기의 최종 종착지는 바로 '난세'라는 것과 이 난세를 겪은 한 세대의 사람들은 통일 국가를 자연적으로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br>
  
많은 중국 남자들은 <삼국연의>로부터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이웃집의 한 낡은 책꽂이에서 번체자로 <삼국지연의>라고 쓰인 누렇게 바랜 책 한 권을 얻었다. 책을 펴들고 읽기 시작하자, 나관중 선생의 첫 번째 줄이었던 "话说天下大势, 分久必合, 合久必分 말하자면, 천하의 흐름은 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라는 말은 11살이었던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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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이든 대가가 있다. 통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만약 통일이라는 한자의 조합을 나누어서 이해를 해본다면, 통(統)은 '한 곳으로 모인다'라는 의미, 일(一)은 '획일적이다'라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 단어의 배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3가지 의미가 어렴풋이 숨어있는데 바로 "집권","독재","전제"이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당신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br>
30여 년이 지나 책 더미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머리를 박으며 고심하고 있던 나는 한가지 의문이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관중 선생이 물었던 몇몇 질문들은 찾기 시작했다. :왜 이 세상의 흐름은 "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일까? 왜 분리되지 않으면 다시 합쳐질 수 없는 것일까? 왜 합쳐지만 반드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는 도대체 "중국의 역사적 필연적 흐름"인가 "이 세상의 역사적 흐름"인가?
 
이러한 것들은 어느 정도 도전이 필요한 학술적인 질문들이었고,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이자 중국사 전문가인 프레드릭 와커맨Frederic Wakeman은 심지어 마지막 질문을 두고 서방 역사와 동방 역사 간의 "차이점"으로 결론을 내렸다.
 
중국과 유럽은 모두 부락에서 시작해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동방의 춘추전국시대는 서방의 고대 그리스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공자가 여러 열국을 돌아다니던 시기는 피타고라스가 이탈리아의 남부에서 기하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고 맹자가 태어났던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12살이었던 시기였다. 기원전 359년에 동쪽에서는 처음으로 중앙집권식의 법이 등장하였고(상앙의 변법) 서방은 기원전 336년에 알렉산더 제국이 나타났다. 한무제(기원전 156 ~ 87)는 중앙집권 제도라는 실험을 실시하였고, 서방에서는 카이사르가(기원전 102 ~ 44) 고도의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공화제를 대체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동서양 세계에는 때 일통을 이룬 한나라와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들이 우뚝 솟아난다. 184년 한나라는 내전에 빠지고 이후 400년 가까이 삼국 양진 남북조시대(三国两晋南北朝)에 들어서게 되고, 로마제국은 외민족의 침략을 받아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동서양의 역사는 갑자기 크게 갈라져 흐르지 시작한다. 중국은 589년 새롭게 통일을 이루고 긴 시간 분열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은 암담한 중세 시대에 들어서고 아주 긴 시간 동안 봉건제의 시기를 거친 뒤, 다시는 통일되지 않는다. 비록 1999년에 유로화가 나타나고 화폐에서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유로화의 존폐는 여러 사람들의 논쟁거리가 되어버렸다. 프레드릭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첫 번째 제국이었던 한나라와 로마가 붕괴된 이후, 중국사와 유럽 사는 왜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을까?"
 
이것은 특정한 답이 없는 역사적 난제이다. 누군가는 지리적 조건에 따른 민족 심리, 종교, 언어, 우연적인 상황 등의 차이를 들어 다각적인 설명을 최대한 할 수는 있다. 프레드릭이 던진 답은 깔끔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의사들이 쓰는 메스처럼 아주 정확했다.) 그는 말했다. "통일은 중국의 한 문화다. 一种文化"
 
중국은 "통일의 문화"를 통해 역사적 영광을 획득하였다. <역사연구>라는 책에서 영국의 역사학자인 아널드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는 중국의 역사를 두고 "유일하게 지금까지 유지된 사회"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통계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는 21개의 문명사회가 출현했는데, 그중 중국 사회만이 문명의 특징을 가장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하나의 견본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통일"이라는 문화에서 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가장 원하지 않으며 가장 싫어하고 가장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은 바로 "분열"이다. 통일은 하나의 숙명과 같으며 중국 문화에서의 최종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통일은 그 자체로 정치나 경제의 발전을 절대 보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토인비 또한 통일이 도대체 "그 자제로 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느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지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가 인정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통일 국가의 성공과 굴기의 최종 종착지는 바로 '난세'라는 것과 이 난세를 겪은 한 세대의 사람들은 통일 국가를 자연적으로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대가가 있다. 통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만약 통일이라는 한자의 조합을 나누어서 이해를 해본다면, 통(統)은 '한 곳으로 모인다'라는 의미, 일(一)은 '획일적이다'라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 단어의 배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3가지 의미가 어렴풋이 숨어있는데 바로 "집권","독재","전제"이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당신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两个研究工具及两个结论==
 
==两个研究工具及两个结论==
  
<big>두 가지 연구 방법과 두 개의 결론.</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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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두 가지 연구 방법과 두 개의 결론.</big>'''
  
 
넓은 영토와 수 억의 인구, 여러 복잡한 민속풍습을 가진 지역이 장기간 통일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통치자는 반드시 사회 각계 각층의 이익분배와 기본 제도의 건립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두 가지 관찰과 분석의 도구를 도출해 냈다. <br>
 
넓은 영토와 수 억의 인구, 여러 복잡한 민속풍습을 가진 지역이 장기간 통일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통치자는 반드시 사회 각계 각층의 이익분배와 기본 제도의 건립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두 가지 관찰과 분석의 도구를 도출해 냈다. <br>

2018년 2월 6일 (화) 17:36 기준 최신판

崛起或崩溃,是一个问题

머리말 : 중국 연구의 방법 0-1

굴기인가 붕괴인가?그것이 문제로다

중국 경제 변혁에 대한 여러 논쟁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양극단에 치우친 논쟁은 없었다.

영국의 <경제학인>잡지에서 출판한 <2050년 거대한 추세 Megachange : The world in 2050>는 예측을 하나 했다. 중국의 경제가 2030년 이후 미국을 추월하고, 전 세계의 제1 경제 대국이 되며, 2050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경제 총량이 전세계에서 20%를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학인>에서 언급한 수치와 중국 경제학자인 린이푸(林毅夫)가 계산한 결과도 어느정도 일치한다. 과거 미국 재정부 부장과 하버드 대학 총장을 역임했었던 로렌스 서머스(Lawrence H. Summers)는 300년 이후의 역사서들은 냉전의 종식을 3번째 중요한 일로, 이슬람 세계와 서방 세계의 관계를 2번째 중요한 일로 여기며,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는 중국의 발전과 굴기, 특히 중국과 인도 그리고 이들 국가와 개도국들간의 관계 및 상호 작용을 기록할 것이라는 장기적인 역사적 결론을 예측하였다.

서양인들이 볼 때, 중국경제의 굴기를 보며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예측이나 계산 등이 아닌 어떻게 분석하고 설명하는가이다.

2013년 1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103세의 고령인 로널드 로스Ronald H. Coase는 <중국의 변혁 : 시장 경제의 중국의 길>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쓰기 수 년전에도 세계 최고령의 경제학자였던 그는 중국 경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이 낮선 국가의 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200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지 30년이 지난 그 해, 그는 시카고에서 자비를 들여 중국 경제 변형 심포지엄을 열었고, 이후 모든 힘을 다 쏟아 이 책을 완성하였다. 로스는 이 책에서 중국 경제 변혁에 대한 3가지 결론은 내린다. 첫번째 결론는 "가장 위대하다"이다. 그는 1978년에 시작된 중국 경제 정책의 전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 개혁 개획이다라는 경제학자 장우챵(张五常)의 관점을 인정하며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두 번째는 "비계획"이었다. 그가 보기에 "중국을 현대 시장 경제로 이끈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뜻밖의 결과이다." 세번째는 "의외성"이다. 로스는 앞으로의 중국 굴기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인류의 행위에의 의외적인 결과"이론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로 간주한다. 그의 3가지 기본 결론은 현존하는 제도 경제학 프레임에서는 중국 경제의 굴기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 서술한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또 다른 상반된 의견은 한층 더 날카로워 보인다.

2012년초 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정확하게 예언해 유명해진 파울 크루그먼Paul R. Krugman은 <뉴욕타임즈>에서 중국의 경제가 현재 붕괴하고 있다는 내용의 사설을 발표하였다. 그의 주요 논거는 중국 인민들의 소비지출과 중국의 투자지출에 있었다. 중국 인민들의 소비지출은 국내총생산GNP의 35%에 불과하고, 무역 흑자에 의지하여 공업의 정상적인 발전을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중국의 투자지출은 국내총생산의 50%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그 중 대부분은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 부동산 거품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상황은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일어나기 이전에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조롱을 하였다. "세계 경제는 이미 유럽의 금융위기를 겪을대로 겪었다. 우리는 새로운 위기의 발원지를 원치 않는다." 파울이 이 사설을 게재함과 거의 동시에 미국 <외교정책>잡지 에서는 "2012년 중국은 앞으로 붕괴한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제되었다. 이 글은 중국의 체제, 법률, 경제 구조, 인구구조 등의 문제가 앞으로 중국의 붕괴 원인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화교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장기적인 비관론이 꽤나 유행하고 있고, 많은 수의 자유주의 학자들 또한 중국모델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MIT의 황야셩黄亚生교수는 중국 경제 발전 모델은 전혀 독특한 점이 없다는 글을 썼다. 그는 "아시아의 주요 공업국의 경제가 엄청나게 발전하던 각기 다른 연도를 출발점으로 놓고 비교를 한다면, 중국 경제의 증가 속도는 놀랄만한 것이 못된다. 중국의 성공 경험이든, 발전의 딜레마이든 어느것도 중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 여타 국가들에게서도 위와 같은 모습들을 찾을 수 있다."라는 말로 중국 모델의 가능성을 일축하였다.

하지만 양극으로 분리된 각 진영 중 어느곳도 중국 경제의 굴기가 내포하고 있는 연구의 매력을 떨쳐내지 못하였다. 필자 또한 오히려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론과 수치가 명확한 판단을 제시해 줄 수 없을 때면 나는 항상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의 말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3가지 방법으로 경제를 연구할 수 있다. 이론을 통해서, 통계를 통해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서 "중국 역사의 기본 그리고 기초"로 다시 가보려 한다. 중국 역대 경제 변혁에서 그 득과 실을 깊이 연구하고, 객관적인 법칙과 규칙등을 찾아내면 아마 나름 괜찮은 모험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본 책 집필의 출발점이다.

“分久必合,合久必分”,是谁家的大势?

"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分久必合 合久必分)"는 중국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인가?

많은 중국 남자들은 <삼국연의>로부터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이웃집의 한 낡은 책꽂이에서 번체자로 <삼국지연의>라고 쓰인 누렇게 바랜 책 한 권을 얻었다. 책을 펴들고 읽기 시작하자, 나관중 선생의 첫 번째 줄이었던 "话说天下大势, 分久必合, 合久必分 말하자면, 천하의 흐름은 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라는 말은 11살이었던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30여 년이 지나 책 더미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머리를 박으며 고심하고 있던 나는 한가지 의문이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관중 선생이 물었던 몇몇 질문들은 찾기 시작했다. :왜 이 세상의 흐름은 "분리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상태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분리된다."일까? 왜 분리되지 않으면 다시 합쳐질 수 없는 것일까? 왜 합쳐지만 반드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는 도대체 "중국의 역사적 필연적 흐름"인가 "이 세상의 역사적 흐름"인가?

이러한 것들은 어느 정도 도전이 필요한 학술적인 질문들이었고,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이자 중국사 전문가인 프레드릭 와커맨Frederic Wakeman은 심지어 마지막 질문을 두고 서방 역사와 동방 역사 간의 "차이점"으로 결론을 내렸다.
중국과 유럽은 모두 부락에서 시작해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동방의 춘추전국시대는 서방의 고대 그리스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공자가 여러 열국을 돌아다니던 시기는 피타고라스가 이탈리아의 남부에서 기하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고 맹자가 태어났던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12살이었던 시기였다. 기원전 359년에 동쪽에서는 처음으로 중앙집권식의 법이 등장하였고(상앙의 변법) 서방은 기원전 336년에 알렉산더 제국이 나타났다. 한무제(기원전 156 ~ 87)는 중앙집권 제도라는 실험을 실시하였고, 서방에서는 카이사르가(기원전 102 ~ 44) 고도의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공화제를 대체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동서양 세계에는 때 일통을 이룬 한나라와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들이 우뚝 솟아난다. 184년 한나라는 내전에 빠지고 이후 400년 가까이 삼국 양진 남북조시대(三国两晋南北朝)에 들어서게 되고, 로마제국은 외민족의 침략을 받아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동서양의 역사는 갑자기 크게 갈라져 흐르지 시작한다. 중국은 589년 새롭게 통일을 이루고 긴 시간 분열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은 암담한 중세 시대에 들어서고 아주 긴 시간 동안 봉건제의 시기를 거친 뒤, 다시는 통일되지 않는다. 비록 1999년에 유로화가 나타나고 화폐에서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유로화의 존폐는 여러 사람들의 논쟁거리가 되어버렸다. 프레드릭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첫 번째 제국이었던 한나라와 로마가 붕괴된 이후, 중국사와 유럽 사는 왜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을까?"

이것은 특정한 답이 없는 역사적 난제이다. 누군가는 지리적 조건에 따른 민족 심리, 종교, 언어, 우연적인 상황 등의 차이를 들어 다각적인 설명을 최대한 할 수는 있다. 프레드릭이 던진 답은 깔끔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의사들이 쓰는 메스처럼 아주 정확했다.) 그는 말했다. "통일은 중국의 한 문화다. 一种文化"

중국은 "통일의 문화"를 통해 역사적 영광을 획득하였다. <역사연구>라는 책에서 영국의 역사학자인 아널드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는 중국의 역사를 두고 "유일하게 지금까지 유지된 사회"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통계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는 21개의 문명사회가 출현했는데, 그중 중국 사회만이 문명의 특징을 가장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하나의 견본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통일"이라는 문화에서 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가장 원하지 않으며 가장 싫어하고 가장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은 바로 "분열"이다. 통일은 하나의 숙명과 같으며 중국 문화에서의 최종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통일은 그 자체로 정치나 경제의 발전을 절대 보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토인비 또한 통일이 도대체 "그 자제로 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느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지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가 인정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통일 국가의 성공과 굴기의 최종 종착지는 바로 '난세'라는 것과 이 난세를 겪은 한 세대의 사람들은 통일 국가를 자연적으로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대가가 있다. 통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만약 통일이라는 한자의 조합을 나누어서 이해를 해본다면, 통(統)은 '한 곳으로 모인다'라는 의미, 일(一)은 '획일적이다'라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 단어의 배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3가지 의미가 어렴풋이 숨어있는데 바로 "집권","독재","전제"이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당신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两个研究工具及两个结论

두 가지 연구 방법과 두 개의 결론.

넓은 영토와 수 억의 인구, 여러 복잡한 민속풍습을 가진 지역이 장기간 통일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통치자는 반드시 사회 각계 각층의 이익분배와 기본 제도의 건립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두 가지 관찰과 분석의 도구를 도출해 냈다.
첫번째는 4대 이익집단의 정치게임법(博弈法)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역사상 그리고 현재 중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중앙정부, 지방정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이 네 개의 집단간의 다툼과 타협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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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중앙정부, 지방정부, 유산계급, 무산계급 . 이 4가지 이익집단 간의 다툼과 타혐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번째는 4대 기본 제도의 분석법이다. 중국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는 것보다 중국의 독특한 부분에 신경을 쓰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현재 상위 30위권 경제력의 국가 들중 유일하게 2천년이나 지속된 중앙집권제도의 역사를 가진 국가이다. 중앙집권제와 대일통이라는 국가 형태는 절대 하루만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이 제도들은 피비린내나는 역사와 길고긴 숙고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 졌다. 전제정치를 하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중앙집권통치를 중앙과 지방의 권력분배, 백성들의 생각을 제어, 사회엘리트들의 통치, 이와 어울리는 거시 경제제도 형식이라는 4가지 모델을 이용하여 유지하고 싶어한다. 중국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제도들의 탄생은 본질적으로, 모두(공업문명 이전까지는) 다음 4가지 기본 제도를 둘러싸고 전개가 된다.

= 군현제도 : 제국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중앙이 인사 임명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제국의 힘이 닿지 않는 지역에는 할거 세력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 숭유제도(尊儒) : '백가쟁명'의 학술 전통을 목졸라 죽이고, 모든 백성들의 의식 형태를 하나로 통일하였다.
= 과거제도 : 공평한 시험제도를 통해 사회의 엘리트들을 체제안으로 끌어들여 사용하였다.
= 국유전영(国有专营국가가 소유하고 독점하여 운영하는)제도 :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원을 국유화 시키고 국가가 독점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국가가 민생을 통제, 계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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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현제, 숭유제, 과거제, 국유전영제도는 중앙집권 정치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이 4가지 제도들은 기둥과 같아서 중앙집권 정치체제라는 지붕을 같이 떠받치고 있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각 이익집단들의 행위와 사고를 하나로 통일시킴으로서 상명하달식의 제도를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수천년동안 다듬어지고 탐색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제도들은 나날히 정교해지교 완전해졌으며 명청시대에 그 절정을 찍었다. 량치챠오는 "중국이 전제주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국가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전제주의 체제는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발전하였다"라고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견대로라면, 중국은 정말로 통일 제도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중국은 세계화의 추세 아래, 쉽지 않은 현대화를 하기 시작하였고,위에 서술한 4가지 큰 제도들 또한 많은 부분들이 크게 변화하였다. 하지만 통일제국을 유지하고, 권위적인 통치를 실시하는 부분에있어서는 실직적인 변화가 없었다. 때문에, 제도의 수단과 만들어진 목적은 여전히 같은 궤도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이니, 과거부터 이어온 전제정치 제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중국 개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는 아주 중요한 명제 중 하나이다.

본 책은 역사의 맥락에 따라, 경제 제도의 변혁을 핵심 주제로 하여 진솔한 서술을 할 것이다.

제 1강과 2강에서는 중국이 대일통을 이루기 이전에 있었던 기원전 7세기의 관중변법과 기원전 4세기의 상앙의 변법이라는 중요한 두 개의 개혁을 살펴볼 것이다. 관중의 "사민분업(四民分业)"사상과 소금과 철의 국가 독점 정책을 기반으로, 상앙의 토지사유화와 군현제, 호적제, 군사작위제도를 토대로 각각 펼친 대범한 실험들은 모두 중국 역사 상 "최초로 시행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 둘이 시행한 정책들은 통치 형태의 극치로 이제까지 펼쳐진 정책들 중 좌우 양극단에 서있는 모습과 같다.

3장에서는 "한무제의 개혁"을 중점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한무제가 시행한 반세기에 이르는 개혁을 통해 중국은 제국이라는 형태의 건설을 완료하였다. 또한 한무제는 "유학만의 숭상"을 주창하며 전 백성들에 대한 사상 통제 모델의 기초 형태를 다졌다. 그는 산업, 유통, 화폐 및 세금 등 경제의 핵심들을 아우르며 역사적으로 첫번째 전체주의적인 경제 개혁(整体配套体制)을 실시하였다. 후세의 많은 개혁들이 한무제의 이 개혁을 모방하였다. 제 4장에서는 왕망의 개혁을 다룬다. 이 유생(儒生)황제는 한무제의 극닫주의적인 개혁을 본떠 개혁을 하였다. 이 개혁은 세계에서 최초이자, 가장 짧은 기간동안 이루어진 고전 사회주의 실험이었다.

5장과 6장에서는 중화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번영, 번성했던 두 개의 왕조인 당나라와 송나라의 정치 개혁 개혁을 서로 구별하여 이야기한다. 당태종은 역사상 가장 작은 정부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고 "정관의치"라는 전성기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제도의 결함은 130년 이후 "안사의 난"이라는 재난을 불러일으켰다. 송태조 조광윤은 과감하게 지방 번진들의 권력을 빼았고,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 정부의 도전을 해결하였다. 경제적인 제도 부분에서의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북송 시기 왕안석의 개혁은 하나의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군주제시기에 일어났던 최후의 전제주의적 개혁이다. 동양과 서양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7장에서는 "명청 침체기"를 이야기하며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왜 수천년에 이르는 발전을 지나고 난 뒤, 중국은 500여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침체기에 빠져 버렸는가?" 명나라와 청나라 두 왕조의 나라의 문을 걸어 잠구는 쇄국정책은 겁을 잔뜩 먹은 소극적인 행위였으며, 자신감을 가지고 추진한 정책들은 중국이 경제적인 활력을 왜 잃어버렸는지, 과학 기술부분에 있어서의 창의성은 왜 퇴화하였는지, "男耕女织-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옷을 짜다"라는 사회경제 형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8장부터는 양무운동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환자'로서 세계화의 조류 속으로 빨려들어갔으며 적극적으로 개혁의 궤도를 새롭게 설정하였다. 양무운동은 중국 역사 상 처음으로 실시된 "외부로부터 받아들인输入式" 개혁이었으며, 이 시기의 고난들은 당시대 엘리트들의 모든 진을 다 뺴놓았다. 청나라 말기의 양무운동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거의 같은 시기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서로 완전히 달랐다. 그 기간동안 일어난 두 번의 国进民退는 후대의 사람들이 경계심을 가질만 하다.

9장에서는 "두개의 국민국가"가 내놓았던 그 개념에서부터 패턴까지 모두 의도와 반대로 시행된 두 개의 개혁 모델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방종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과도하게 시장경제를 자유롭게 풀어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제경제'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집권개혁이었다. 하나도 예외가 없이, 그들은 모두 실패하였다. 중국의 현대화 운동은 이 시기 실직적으로 나아가지도, 후퇴하지도 못하는 함정에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