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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금문]]에서 [[]]자는 붓 聿(율)자로 나중에 위에 대나무 죽(竹)이 추가된 것이다. 聿자의 머리 부분의 세 갈래로 된 부분은 붓의 털을 나타낸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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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갑골문]][[금문]]붓 聿(율)위에 대나무 죽(竹)이 추가되어 나중에 만들어지 글자이다. 聿자는 한 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회의자]]이다. 聿자의 세 갈래로 된 부분은 붓의 털을 나타낸다. <br>
筆자를 죽(竹)이 의미를, 율(聿)이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로 보기도 한다.  이 붓(筆)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붓대를 가진 필기구이다. 원래는 손으로 붓을 쥔 모습인 율(聿)을 사용하여 붓을 나타냈는데, 나중에 죽(竹)을 더해 筆이 되었다. 간화자에서서는 [[笔]]로 표기한다. 붓을 뜻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필기구와 문구의 통칭이 되었으며, 붓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에서 기술하다, 서사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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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자를 죽(竹)이 의미를, 율(聿)이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로 보기도 한다.  이 붓(筆)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붓대를 가진 필기구이다. 원래는 손으로 붓을 쥔 모습인 율(聿)을 사용하여 붓을 나타냈는데, 나중에 죽(竹)을 더해 筆이 되었다. 간체자에서서는 [[笔]]로 표기한다. 붓을 뜻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필기구와 문구의 통칭이 되었으며, 붓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에서 기술하다, 서사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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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는 한손으로 아래에 털이 달린 가늘고 긴 나무막대를 잡고 있는 모습의 상형자가 있는데, 손으로 붓을 잡고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여기에서 상나라 사람들도 붓을 사용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귀갑과 수골에 쓰인 문자 중에는 먼저 붓을 쓰고 나서 칼로 새긴 것들이 많다. 사실 붓은 일찍이 신석기시대에 이미 존재했는데, 지금으로부터 6천 여 년 전에 생활한 반파사람들은 채색도기 위에 헤엄치는 물고기나 달리는 사슴, 사람 얼굴의 물고기를 도안을 그렸는데, 필획이 두껍고 매끄러우며 둥근 것으로 볼 때 틀림없이 붓과 같은 도구로 그린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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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는 한손으로 아래에 털이 달린 가늘고 긴 나무막대를 잡고 있는 모습의 상형자가 있는데, 손으로 붓을 잡고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여기에서 상나라 사람들도 붓을 사용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귀갑과 수골에 쓰인 문자 중에는 먼저 붓을 쓰고 나서 칼로 새긴 것들이 많다. 사실 붓은 일찍이 신석기시대에 이미 존재했는데, 지금으로부터 6천 여 년 전의 반파 유적의 채색도기에는 헤엄치는 물고기나 달리는 사슴, 사람 얼굴의 물고기를 도안이 그려졌는데, 필획이 두껍고 매끄러우며 둥근 것으로 볼 때 틀림없이 붓과 같은 도구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br>
후에 [[소전]]에서는 竹을 더하여 회의자 筆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진나라 때는 대나무로 붓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서를 보면 몽염이 붓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시황의 대장군인 몽염이 대나무관에 짐승의 털을 끼워 만든 붓을 발명했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筆자는 간단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笔]]은 여전히 회의자이다. 죽과 모로 구성된 것은 대나무대 아래에 붓털이 있는 것으로, 매우 간단 명료하고 형상적이다.<ref> 스딩궈, 《한자와 중국문화》, 역락, p.285</ref> 한편, 시라카와 시즈카는 고대에 땅을 선정할 때 점을 쳤는데, 율(聿)은 그 점친 결과를 기록한다는 뜻이라고 보았다.<ref>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솔출판사, p.499</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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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소전]]에서는 竹을 더하여 회의자 筆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진나라 때는 대나무로 붓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서를 보면 몽염이 붓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시황]]의 대장군인 몽염이 대나무 관에 짐승의 털을 끼워 만든 붓을 발명했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筆자는 간단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笔]]은 여전히 [[회의자]]이다. 죽과 모로 구성된 것은 대나무대 아래에 붓털이 있는 것으로, 매우 간단 명료하고 형상적이다.<ref> 스딩궈, 『한자와 중국문화』, 역락, p.285</ref> 한편, [[시라카와 시즈카]]는 고대에 땅을 선정할 때 점을 쳤는데, 율(聿)은 그 점친 결과를 기록한다는 뜻이라고 보았다.<ref>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솔출판사, p.499</ref><br>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글을 쓸 때, 끝이 뾰족하고 부드러운 붓을 사용했다. 갑골문에도 붓과 관련된 글자들이 보이는데, 상나라 사람들도 붓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기구로 붓을 사용한 것은 한자의 형태나 구성, 그리고 쓰는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붓을 사용할 때는 자획의 두께나 짜임새를 조절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따라서 숙련된 서예인들만이 자유롭게 다양한 서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예술성을 평가받기도 하였다.<ref>허진웅, 『중국고대사회』, 영남대 중국문학연구실 역, 지식산업사, 1969, p.20.</ref><br>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글을 쓸 때, 끝이 뾰족하고 부드러운 붓을 사용했다. 갑골문에도 붓과 관련된 글자들이 보이는데, 상나라 사람들도 붓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기구로 붓을 사용한 것은 한자의 형태나 구성, 그리고 쓰는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붓을 사용할 때는 자획의 두께나 짜임새를 조절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따라서 숙련된 서예인들만이 자유롭게 다양한 서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예술성을 평가받기도 하였다.<ref>허진웅, 『중국고대사회』, 영남대 중국문학연구실 역, 지식산업사, 1969, p.20.</ref><br>

2021년 3월 16일 (화) 19:43 기준 최신판

語源

붓필.png

자는 갑골문금문의 붓 聿(율)자 위에 대나무 죽(竹)이 추가되어 나중에 만들어지 글자이다. 聿자는 한 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회의자이다. 聿자의 세 갈래로 된 부분은 붓의 털을 나타낸다.
筆자를 죽(竹)이 의미를, 율(聿)이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로 보기도 한다. 이 붓(筆)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붓대를 가진 필기구이다. 원래는 손으로 붓을 쥔 모습인 율(聿)을 사용하여 붓을 나타냈는데, 나중에 죽(竹)을 더해 筆이 되었다. 간체자에서서는 로 표기한다. 붓을 뜻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필기구와 문구의 통칭이 되었으며, 붓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에서 기술하다, 서사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1]

文化

갑골문에는 한손으로 아래에 털이 달린 가늘고 긴 나무막대를 잡고 있는 모습의 상형자가 있는데, 손으로 붓을 잡고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여기에서 상나라 사람들도 붓을 사용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귀갑과 수골에 쓰인 문자 중에는 먼저 붓을 쓰고 나서 칼로 새긴 것들이 많다. 사실 붓은 일찍이 신석기시대에 이미 존재했는데, 지금으로부터 6천 여 년 전의 반파 유적의 채색도기에는 헤엄치는 물고기나 달리는 사슴, 사람 얼굴의 물고기를 도안이 그려졌는데, 필획이 두껍고 매끄러우며 둥근 것으로 볼 때 틀림없이 붓과 같은 도구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소전에서는 竹을 더하여 회의자 筆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진나라 때는 대나무로 붓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서를 보면 몽염이 붓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시황의 대장군인 몽염이 대나무 관에 짐승의 털을 끼워 만든 붓을 발명했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筆자는 간단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은 여전히 회의자이다. 죽과 모로 구성된 것은 대나무대 아래에 붓털이 있는 것으로, 매우 간단 명료하고 형상적이다.[2] 한편, 시라카와 시즈카는 고대에 땅을 선정할 때 점을 쳤는데, 율(聿)은 그 점친 결과를 기록한다는 뜻이라고 보았다.[3]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글을 쓸 때, 끝이 뾰족하고 부드러운 붓을 사용했다. 갑골문에도 붓과 관련된 글자들이 보이는데, 상나라 사람들도 붓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기구로 붓을 사용한 것은 한자의 형태나 구성, 그리고 쓰는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붓을 사용할 때는 자획의 두께나 짜임새를 조절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따라서 숙련된 서예인들만이 자유롭게 다양한 서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예술성을 평가받기도 하였다.[4]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붓은 호남성 장사(長沙) 교외에 잇는 전국시대 초(楚)의 유적에서 발견된 장사필(長沙筆)이다. 전체 길이는 약 21cm이며, 붓대는 대나무를 썼고, 붓봉에는 토끼의 털을 다발지은 끝을 끼워서 가는 실로 묶고, 그리고 옻(漆)으로 굳혀 놓았다. 옛날의 전설에서는 붓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시황 때의 몽염(蒙恬) 장군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당나라의 유명한 문장가인 한유가 붓을 의인화하여 쓴 <모영전(毛穎傳)>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나중에 이 글이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붓의 기원을 몽염에게서 찾게된 것이다. 그러나 장사필의 발견으로 붓이 진시황 시대보다도 앞서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5]

중국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서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이다. 질이 아주 좋은 붓 하나를 사려면 교사나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을 투자해야 하지만 관리만 잘하면 몇 년 혹은 수십 년간 쓸 수 도 있다. 붓의 크기도 천차만별이다. 작은 붓은 몇그램에 불과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40킬로그램이나 나갔다. 1950년대 일어난 문자개혁을 통해, 최초의 ‘聿’자에서 붓을 나타내는 부분이 ‘毛’자로 대체됐다. 이는 아주 멋진 발상이다. 붓은 여전히 대와 동물들의 털로 만들어지지 않는가.[6]

  1.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2. 스딩궈, 『한자와 중국문화』, 역락, p.285
  3.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의 세계』, 솔출판사, p.499
  4. 허진웅, 『중국고대사회』, 영남대 중국문학연구실 역, 지식산업사, 1969, p.20.
  5. 아츠지 데츠지, 『한자의 역사』, 학민사, 1999, p.254.
  6. 세실리아 링크비스트, 『한자왕국』, 청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