管仲变法:两千多年前的“凯恩斯主义" - 관중의 변법 : 2천년 전의 "케이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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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ring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월 28일 (일) 18: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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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중국 역사의 경제 개혁은 기원전 8세기의 춘추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기 이전, 중국은 "천하"라는 개념만 존재하였을 뿐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천 여명이 넘는 제후들은 주나라 천자에게 땅을 봉분받아, 질서를 지키며 다툼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이 당시 이들에게는 변화에 대한 어떠한 동기도 열망도 없었다. 하지만 기원전 771년, 주나라 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서주가 멸망을 하고 난 뒤부터는 상황이 바뀐다. 천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각 제후들은 싸움을 시작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되려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다. 공자는 이 당시 사회를 "예법이 무너지고 즐거움이 파괴된"로 말하였지만, 우리는 이 시기를 '개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라는 관점으로 볼 수있다. 본디 국가라는 것은 피비릿내 나는 경쟁의 산물이지 이기에... 이는 어느 세계의 역사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다.

통치자의 정책을 분석해본다면, 2천여년 간의 경제 개혁은 천년을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춘추시대부터 12세기의 북송시대까지의 개혁들은 늘어나는 수요의 충족을 기본 베이스한 개혁들이었다. 반면 북송 이후부터 18세기초의 "강건성세"(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의 청나라 최고 전성시기)까지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근현대의 경우 양무운동부터 현대까지 구망(救亡), 확장, 안정, 그리고 다시 확장, 이후의 안정이라는 양상을 띤다. 대부분의 개혁들이 "확장"과 "안정"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 하다.

춘추시대의 "춘추오패" 중, 첫 패자는 제나라의 환공이었다. 제나라는 강하고 번영했었으며 중국 역사 속 경재개혁의 첫 장을 열었다.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황하 중류였었다. 하지만 제나라는 개혁개방 초기의 광동, 복건, 띠샤(地狭), 빈하이(滨海) 처럼 중앙정부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주반도에 위치해 있었다.(이는 제나라의 개국자인 강상공이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봉 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중국 최초 경제 개혁의 시작은 "사상이 자원보다 중요하다"라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나 흥미로운 점은, 제나라 환공이 스스로 "나는 잘 먹고, 여색을 좋아하며, 농사를 좋아한다"라는 허풍을 떨고 다녔을 정도로 원래부터 원대한 보푸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는 점과, 이렇게 패자의 자격이 없었던 제환공의 옆을 관중이 보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중은 과거 전쟁에서 도망친 패잔병이자 실패한 상인이라는 전력이 있었다. "세 가지를 좋아하는 선생"과 실패한 상인은 함께 손을 잡고 중국 경제 개혁 역사의 첫번째 장은 완성시켰는데, 이는 아마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경제 대개혁일 것이다.

被严重误读的“士农工商”

“放活微观,管制宏观”

“盐铁专营”的始作俑者

鼓励消费的异端思想

“以商止战”与和平称霸

中国古代版的“凯恩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