管仲变法:两千多年前的“凯恩斯主义" - 관중의 변법 : 2천년 전의 "케인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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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ring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2월 13일 (화) 15:03 판 (“盐铁专营”的始作俑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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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중국 역사의 경제 개혁은 기원전 8세기의 춘추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기 이전, 중국은 "천하"라는 개념만 존재하였을 뿐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천 여명이 넘는 제후들은 주나라 천자에게 땅을 봉분받아, 질서를 지키며 다툼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이 당시 이들에게는 변화에 대한 어떠한 동기도 열망도 없었다. 하지만 기원전 771년, 주나라 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서주가 멸망을 하고 난 뒤부터는 상황이 바뀐다. 천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각 제후들은 싸움을 시작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되려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다. 공자는 이 당시 사회를 "예법이 무너지고 즐거움이 파괴된"로 말하였지만, 우리는 이 시기를 '개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라는 관점으로 볼 수있다. 본디 국가라는 것은 피비릿내 나는 경쟁의 산물이지 이기에... 이는 어느 세계의 역사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다.

통치자의 정책을 분석해본다면, 2천여년 간의 경제 개혁은 천년을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춘추시대부터 12세기의 북송시대까지의 개혁들은 늘어나는 수요의 충족을 기본 베이스한 개혁들이었다. 반면 북송 이후부터 18세기초의 "강건성세"(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의 청나라 최고 전성시기)까지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근현대의 경우 양무운동부터 현대까지 구망(救亡), 확장, 안정, 그리고 다시 확장, 이후의 안정이라는 양상을 띤다. 대부분의 개혁들이 "확장"과 "안정"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 하다.

춘추시대의 "춘추오패" 중, 첫 패자는 제나라의 환공이었다. 제나라는 강하고 번영했었으며 중국 역사 속 경재개혁의 첫 장을 열었다.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황하 중류였었다. 하지만 제나라는 개혁개방 초기의 광동, 복건, 띠샤(地狭), 빈하이(滨海) 처럼 중앙정부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주반도에 위치해 있었다.(이는 제나라의 개국자인 강상공이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봉 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중국 최초 경제 개혁의 시작은 "사상이 자원보다 중요하다"라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나 흥미로운 점은, 제나라 환공이 스스로 "나는 잘 먹고, 여색을 좋아하며, 농사를 좋아한다"라는 허풍을 떨고 다녔을 정도로 원래부터 원대한 보푸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는 점과, 이렇게 패자의 자격이 없었던 제환공의 옆을 관중이 보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중은 과거 전쟁에서 도망친 패잔병이자 실패한 상인이라는 전력이 있었다. "세 가지를 좋아하는 선생"과 실패한 상인은 함께 손을 잡고 중국 경제 개혁 역사의 첫번째 장은 완성시켰는데, 이는 아마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경제 대개혁일 것이다.

被严重误读的“士农工商”

사농공상에 대한 오해

산업혁명 이전 역사에 존재하던 경제 정책의 기조는 중농주의와 중상주의 2개 뿐이었다. 하이에크는 동양과 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모두 농업을 중요시하고 상업을 천대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는데 서양에서는 플라톤을, 중국에선는 맹자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리스의 사상가인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국민을 3가지 계급으로 나누었다.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철학가였고, 두 번째 계급은 전사들이었다. 세번째 계급은 상인과 수공업자, 그리고 농민이었다. 유가의 맹자는 상인들을 무시하였으며 그들을 "도둑놈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상인 출신의 관중은 당시에도 정말 극히 소수였던 중상주의자였다. 관중은 제나라를 부흥시키는데 상인의 기술을 이용하였다. 사마천은 그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를 "그가 정치를 할 때는, 화로 인한 것을 잘 다스려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돌이켜 복으로 만들고, 일의 경중을 귀하게 여기고, 신중히 일을 하여 균형을 맞추었다其为政也,善因祸而福,转败而为功。贵轻重,慎权衡"라고 평하였는데, 이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관중은 자원의 분배를 잘했고, 효율을 높혔으며, 타협과 신중한 결정 등을 통해 각종 질서를 다시 세웠다." 정말로 "기업가정신"의 표본이 아닌가.

관중의 개혁 중 후세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엄청난 오해를 일으킨 정책이 하나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백성을 4개로 나누는" 사농공상(士农工商) 정책 이다.

이 정책의 요지는 백성을 군인과 선비, 농민, 공인, 상인, 이렇게 4개의 계층으로 나누어 고정된 지역에 자신들의 임무에 따라 모여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국어-제나라어>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관중은 선비들이 지내는 사향士乡을 15개, 공인工人들과 상인들이 지내는 공상지향工商之乡을 6개로 구획하고, 각 향마다 2000개의 호户를 두었다. 이런 구획의 결과로 제나라는 3만명에 달하는 전문 군인과,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만2천명의 전문인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1개의 호를 1명으로 본다.) 이외에도, 도시 이외의 농민들은 45만 호나 되었다.

관중은 백성들을 4개로 나눈다면 4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相语以事,相示以巧"로, 같은 업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살면, 서로 경험을 공유하기 쉽고, 그 전문성을 높히기 쉬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두번째는 "相语以利,相时以时,相陈以知贾 "인데, 이는 같이 거주함으로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촉진에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번째는 전문적인 분위기의 조성이었다. 백성들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본업에 충실할 수 있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일을 방지해 직업의 안정성을 꿰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네번째는 기술의 전승이었다.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부모들이 하는 일들을 쉽게 보게되고, 아버지와 형의 지도 아래 자연스레 전문 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일을 각기 분야에 따라 나누고, 자식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게 하는 제도는 제나라의 제조업 기술을 다른 국가들보다 앞서게 만들었다. <고공기考工记>에는 제나라의 수공업 공장에 대한 많은 기록들을 남아 있는데, 비단의 경우 세계 최초의 직조 센터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제나라의 수도인 린쯔에 등장하였으며 그 규모조차 거대해 이곳에서 생산된 여러 비단 제품들은 제나라 내부에서의 수요를 모두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변 각 제후국들에도 수출할 정도였다. 심지어 "天下之人冠带衣履皆仰齐地=천하 모든이들의 갓과 허리띠, 의복과 신발은 모두 제나라 땅에서 나왔다."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로 당시 제나라의 직조 제품은 그 품질을 인정받아 큰 인기를 끌었다.

관중은 사회의 여러 계층을 직업에 따라 나눠 관리한 최초의 사람이었는데 양한(两汉)이후에 이러한 전문화된 상품경제 형태는 기본적인 경제형태로 칭송되며 자리잡았다. 세밀한 분업화와 전문화 그리고 여러 세대 그 전문성이 이전 되도록 하는 제도는 중국이 일찍히 세계 문명에서 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타이완의 학자 쟈오깡(赵冈)은 "중국사회의 전문 분업 시스템은 유럽보다 최소 1천년은 앞섰고 주요 전통 생산 기술의 경우(산업혁명 이전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기술들로만 보았을 때) 유럽보다 800년에서 1천년까지 앞섰다." 라는 말을 하였다. 그는 심지어 "명청 이전시기 생산품의 상품화 비율은 명청시대와 비교하여 결코 낮지 않았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비록 진나라(秦)를 거치며 이 제도는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호적제도의 모델이 되었고, 장인 등록 제도의 경우, 청나라때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졌다.

사람들에게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킨 부분은 바로 "사농공상"이다. 후대 사람들은 사논공상을 사(士)계층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농민이 뒤를 이으며 공인과 상인을 가장 아래에 두는 "존귀와 비천함의 서열"로 이해하곤 이 생각이 중국을 억상주의로 이끌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관중이 말한 사농공상은 위아래 같은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고대인들의 공업과 상업에 대한 태도는 여러 극적인 변화를 거쳤다. 우선 고대 중국인들은 결코 상업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는데 은나라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일에 긍정적이었다. 은나라가 멸망한 뒤 세워진 주나라의 건국자들은 은나라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는데 그 이유를 백성들이 공업과 상업에만 치중하고 농업을 등한시했다는 데에서 찾았다. 농업을 등한시하는 풍조가 민심을 불안정하게 했고 이는 국가 근간을 위협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주나라 건국자들은 공업과 상업을 경시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억상 정책을 실시한다. 이런 정책 때문에 주나라의 공업자와 상업인들의 지위는 매우 비천하였다.

이는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금문金文에서 "백공(百工)" 이라는 단어는 노예 지위의 백성과 첩이랑 같이 등장한다. <역-둔괘 - 易,遁卦>에는 "군자는 소인을 멀리하되, 미워하지 않고 엄하게 한다." 라는 말이 적혀 있으며, <일주서-정전 逸周书-程典>에서는 "사대부는 공업이나 상업같은 잡것이랑 섞이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다. <예기-왕제礼记-王制>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사대부들과 말을 섞을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당시 사대부들은 상인을 멀리했고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과 같이 거주해서 섞이면 안되었으며 공상업자들은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을 떠나서도 사대부들과 이야기 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다. <주예-지관-사시周礼-地管-司市>에는 당시의 규정이 나와있는데 귀족들은 시장에 들어가서 상업행위를 할 수 없었고 이를 어길시에는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적여있다.

하지만 관중의 입장은 이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는 "공인과 상인" 그리고 "선비와 농민"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았고 "제나라의 백성은 군주의 뿌리이다.齐国百姓,公之本也"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모두를 "국가의 근본이 되는 백성国之石民"이라 생각하였다. 공상업자들을 선비나 농부와 공평하게 바라보던 관중의 생각은 당시 사대부 계층의 인식과 많이 달랐다. <전국책战国策>에 남아있는 여씨 상인과 진나라秦 왕의 대화에는 "관중, 그는 상인 나부랭이 아닌가"라는 말은 상인 출신의 관중이 사대부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당대当代의 역사가였던 이검농李剑农은 <사기史记><국어国语>그리고<좌전左转>에 있던 기록에 의거하여 "중국에서의 상업의 발달은 제나라가 가장 시초이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만약 관중의 "사농공상"이 "사농"을 우수하고, "공상"을 사농보다 미천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었다면 이후의 그가 펼친 개혁정책들을 이해할 수 없다.

“放活微观,管制宏观”

미시경제에 대한 규제의 완화와 거시경제에 대한 규제의 강화

관중은 백성을 네 분류로 나눠 놓음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통치이념을 체현하였다. 이 노련한 정치가는 다년간의 상인 경험을 통해 공업과 상업이 농업보다 이윤 획득에 더 좋다는 것과, 상품경제의 진흥이 국력을 증강시키는 최적의 길이라는 것을 일찍이 발견하였다. 그는 제나라에서 산업과 세금, 가격 등과 관련된 여러 영역을 종합하여 개혁하였다. 그가 행한 개혁들을 현재의 용어로 말한다면 "미시경제에 대한 규제를 풀고, 거시적 관점은 국가가 제어한다." 가 될 수 있겠다.

소위 "미시적 관점에 규제를 푼다"라는 것은 쉽게 말해, 내적으로는 내수 상품경제를 자극하여 성장시키고 바깥쪽으로는 관세를 낮추어 "물이 골짜기로 고이듯如水归壑" 여러 상품들을 시장에 모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단는 말이다.

제나라의 위치는 해안가였고, 어업과 염업이 발달했었다. 관중은 어업과 염업의 경우 자유롭게 수출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세관에 등록을 하면 세금을 면제시켜주어 다른 제후국들이 제나라와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기타 수출 상품들 또한 단일세 제도를 실시하여 세관에서 한번 세금을 매긴 상품들은 시장에서 두 번 세금을 매기지 않았다.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관중은 제나라에서 사업을 하려 오는 상인들에게 문을 더욱더 크게 열었고 그들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빈 수레를 끌고 온 상인이든 등에 짐을 이고 다니는 행상인이든 세금을 일절 걷지 않았으며 제나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는 제환공에게 외국 상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상인 전문 객잔의 설립을 건의하였는데 이 객잔은 30리마다 하나씩 설치되었다. 이 객잔은 하나의 수레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는 본인의 식사를 제공하였고고, 세 개의 수레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말의 사료를 5개의 수레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을 붙여주었다. 이때부터 천하의 상인들은 마치 물이 흘러가듯 제나라로 흘러들어 갔다.

시장을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관중은 국가가 운영하는 집창촌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도인 린쯔에 7개의 공창을 만들었고, 한 개의 공창에 100명의 여자를 두어 총 700명의 여자를 관리하였다. 관중은 이렇게 외국에서 많은 상인들을 끌어들였고 그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받아들였다. 노반이 목공업에서 가지는 위치처럼 관중은 후세의 성매매업의 창시자로 경배된다.

이러한 자유무역 정책의 뒷받침 아래, 제나라 상업의 발전과 넘치는 활력은 <전국책-제책>에서 볼 수 있는데, 그곳에는 제나라 수도인 린쯔에서 한때 크게 성행한 번화의 광경이 묘사되어있다. "린쯔는 매우 부유하고 풍요로워 그 백성들은 비파를 키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촉을 두들기며 즐긴다. 닭싸움과 개의 경주를 즐기며 윷놀이와 공차기를 즐기지 않는 이가 없다. 임치의 길은 수레들이 지나가다가 서로 바퀴가 부딪히고 사람들은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붐빈다. 옷소매를 들면 장막이 되고, 사람들이 흘리는 땀은 비가 오는 것 같으며, 가정은 번창하고 부유하며, 사기가 올라있다. " 통계에 따르면, 당시 린쯔의 거주 인구는 30만 명을 넘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시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자 가장 번화하고 부유한 도시였다. 비슷한 시기 아테네 성의 인구는 5만도 안되었다.

그리고 "거시적 관점을 관리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정부의 경제에 대한 거시적 관리를 강조하는 말로 그 방법은 재정, 세수, 가격 세 방면에 대한 정부가 개입이었다.

농경 시기 국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상품은 단연코 먹을 식량이었다. 예로부터 존재해온 여러 교역 중에서 식량은 총 상품의 80%를 차지하였으니, 관중 또한 식량에 관한 정책을 아주 중히 여겼다. 그는 농경 관련 세금에 대해 다른 군주들이 터무니없이 세금을 걷거나, 무턱대고 낮추거나 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什税一 소득의 10%를 국가에 내는" 정책을 표준으로 계획을 세웠다. 세금은 2년에 한 번씩 걷었는데 풍년인 해는 매년 15%를, 수확이 일반적인 경우에는 10%, 그리고 낮은 등급의 해는 5%를 걷었다. 만약 그 해가 흉년이면 세금을 면제하였다. 이렇게 탄력적인 세금제도의 운용은 맹자가 말한 "什税一"보다 더 융통성 있고, 현실적이다. 이외에도, 관중은 예비식량 비축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국가가 곡식들을 대량으로 미리 사두어 시장에서의 곡식 가격의 변동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곡식 공급의 과잉이나 미달의 균형을 맞추는 효과를 얻었다. 관중은 어떠한 개인이라도 식량의 가격을 쥐락펴락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고 식량이 부족한 해에 식량을 사재기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또한 식량 가격의 변동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에 의해 통제되도록 하였다. 농사를 짓던 시대에 그의 이 견해는 눈여겨볼 만 하다.

관중을 또한 가격을 지렛대처럼 이용하여 경제를 조절하고 국가의 수입을 올리는 데 선수였다. 예를 들어 국가가 대량의 면포를 가지고 있으면 굳이 면포에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없이 그 원재료인 삼베(麻)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을 하였는데, 이렇게 한다면 삼베의 가격이 세금 부과로 인해 10배가 될 경우 면포의 가격은 삼베 가격의 상승 때문에 자연스레 50배가 되어버린다. 국가는 이미 많은 양의 면포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면포를 판다면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같은 원리로 국가가 다량의 견직물을 통제하고 있을 땐 명주실에 세금을 매겨 견직물의 가격을 10배로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타국과의 무역을 할 때 그는 각 국가마다 서로 다른 상황을 고려하여 상품의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외국 상품의 질이 제나라의 것보다 좋다면 본국에의 판매 가격을 높혀 질 좋은 외국 상품의 유입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수출을 촉진하고 싶을 땐 수출 가격을 낮추어 상품의 수출을 활성화하였다.

“盐铁专营”的始作俑者

"염철전매제(盐铁专营-소금과 철에 대한 독점 운영제도)"의 최초 창시자

관중의 거시 경제적 관점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는 염철전매제가 있다. 이 제도는 2천여 년 동안 이어져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중국식 중앙집권 경제제도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환공과 관중은 어떻게 하면 국가가 부유해질까 여러 차례 토론하였다. 제환공은 인구, 주택, 수목, 가축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길 건의하였다(미시적 관점). 하지만 관중은 제환공이 제안한 것에 모두 반대하였다. 그는 세금이란 형태가 있는 것이라 믿었는데 백성들이 실제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직접 세금을 메긴다면 자연적으로 백성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고 이상적인 방법은 형태가 없는 것에서 세금을 메겨 백성들의 불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관중은 "가격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이는 세금을 상품 속에 숨기는 것인데 간접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물건을 구매한 사람은 자신이 내는 세금을 보거나 만질 수가 없었고 이들이 모르는 사이에 국가는 세금을 징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간접세라는 방법은 세금을 낸다는 반감 또한 일으키지 않았다.

관중은 염철전매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唯管山海为可耳"라는 딱 7개의 글자를 제기하였는데 그 의미는 "산과 바다의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하도록 하기만 하면 끝"이다. 산에서는 철광이 나고 바다에서는 소금이 나오니 산과 바다에 대한 독점은 자연스레 염철전매제도로 이어졌다.

농경 시기 소금과 철은 백성들과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때문에 이 두 항목은 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양대 기둥 산업들이었다. 관중은 한 예를 들어 염철전매제도를 설명하였는데 "만 대의 전차를 보유한 대국의 인구는 약 천만 명이다. 만약 성인에게 인두세를 걷는다면, 납세자는 약 백만 명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매월 30전을 낸다 가정할 경우 걷어들이는 세금은 3천만 전이된다. 하지만 소금의 가격을 올려 세금을 징수한다면 매월 6천만 전을 얻을 수 있고 이는 인두세를 걷는 것보다 2배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 또한 표면적으로 볼 때의 정부는 세금을 걷은 적이 없으니 민중들의 자잘한 불만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교묘한 세금 징수의 메커니즘은 단순히 국내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관중은 소금 수출에 대해서도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아무리 끓여도 없어지지 않는 바닷물을 끓여 얻어지는 소금으로 천하의 모든 이들은 제나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며 제나라는 큰 돈을 얻게 된다.

철에 대한 국가의 독점 또한 이와 같다. 일반적인 한 농가가 농사일을 짓느냐 마냐의 상관없이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바늘. 칼, 쟁기, 끌, 톱 등은 모두 철로 만든 것이다. 바늘 하나에 1전의 가격을 더할 경우, 30개의 바늘은 30전의 수익을 낸다. 이는 한 사람이 내야 하는 인두세와 같은데 유추해보면 철 전매로 인해 얻어지는 수익의 총량은 인두세를 걷는 것보다 결코 낮지 않다.

하지만 관중은 염철전매제를 주장하면서도 정부가 국영 소금 시장이나 국영 철광을 세워 운영하는 직접적인 시장개입을 추구하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이 관중을 공부하며 "독점적인 운영"을 "국가의 운영"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것을 사실과 다르다.

염업을 예를 들어 이야기하면, 관중이 실행한 것은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정책이었을 뿐, 소금이 나는 호수 등은 민간에서 자유롭게 운영하여 소금을 생산하도록 개방하였고 여기서 생산된 소금을 국가가 일원화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염업의 판매와 생산량을 통제하니 자연스레 가격까지 통제할 수 있었는데 제나라의 소금이 다른 국가들에 수출할 때 그 판매 가격은 원가의 40배까지 올릴 수도 있으니 국가와 상인들은 모두 엄청난 소득을 올렸다.

야철업에서 관중은 "소유는 국가가, 운영은 민간이国有民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먼저 모든 광산자원에 대한 국가의 독점을 엄중히 강조하였다. 그는 이를 정식으로 법제화하였는데 광물을 발견하는 즉시 국가가 그것을 보호하여 봉인하였다. 만약 독점적으로 채굴을 하는 자가 있으면 왼발과 오른발을 도끼로 찍어 자르는 형벌을 내렸다. 국가는 철의 가격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고 생산이 되는 모든 철기를 국가가 일괄 관리하여 판매하였다. 이러한 법적인 토대위에 국가는 철기를 제조하는 공장을 열었고 민간 상인들은 이를 자유롭게 경영하였다. 이익이 생기면 상인들은 7할을 가지고 정부는 3할을 가졌는데 이는 정부가 30%의 소득세를 징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가 자원의 모든 소유권을 가지고 경영권은 민간에게 나눠주며 일정 비율로 이윤을 분배하는 정책은 후세에 "자산은 국가의 것, 경영은 민간의 것"이라는 정책의 초기 형태가 된다. 염철전매제는 이후 국가둘의 근본을 바꿔버릴 정도의 큰 영향을 주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이때부터 우리가 '중국특색'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서방의 경제이론에 비추어 볼 때 한 국가의 주요 수입은(혹은 유일한 수입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수입은) 바로 세금이다. 여기에 있어서는 사회주의경제학자나 자본주의적 자유경제학파나 이견이 없다. 카를 마르크스 또한 "세금은 정부기구의 경제적 기초이다. 다른 것은 어떠한 것도 없다.", "국가 경제는 세금을 통해 체현된다." 라 믿었다. 현대 제도경제학자들의 어떤 이론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더글라스 노스 Douglass C.North는 정부는 "보호와 공정함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세금을 걷는 조직이다. 우리는 정부를 고용하였으며,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라고도 하였다.

서방의 법치주의는 여태껏 국민은 납세자라는 역할을 강조해왔다. 14세기부터 시작하여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세금 징수도 할 수 없다"라는 명제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견고하게 확립되어왔다. 사람들은 위 명제를 위반하는 것은 폭정으로 보았고 지키는 것은 법률을 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특이한 점은, 미국 상점의 경우, 상품의 가격과 소비세를 각각 나누어 납부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세금이 가격에 다 포함되있다. 쳔옌커는 과거 중국의 통치 속에는 "기만술"이 들어있다고 하였는데 관중의 "무형에서 걷고, 백성들이 불만을 품지 않게 하라"라는 말이 '기만술'보다는 더 좋은 늬앙스를 품긴다.

"관중의 변법"이후, 중국 정부의 수입은 단순한 세금의 수입과 독점 운영을 통한 수입이라는 2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독점운영은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통제한 뒤 이를 전매의 방식으로 실현하였다. 정부는 사실상 영리의 목적을 띤 경제 조직으로 변했다. 제나라는 통치를 점점 공고히 하였고 국가의 생계와 연결된 주요 산업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국유기업은 주요 산업들에 대한 통제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섰다.

이러한 경제 환경 중에, 국유기업은 마치 "정부의 기업"같았고 정부는 마치 "기업의 정부"같았다. 그것들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일단 형성되자 민영기업들은 그 안에 어중간하게 끼이게 되고 어찌할바를 모르며 정치게임의 희생양 되고 만다. 이러한 중국식 경제제도는 1000년동안 이어져 왔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관중이야말로 정말 "나쁜 제도를 처음 창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鼓励消费的异端思想

“以商止战”与和平称霸

中国古代版的“凯恩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