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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은 춥고 건조한 기후를 잘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도 쉽게 자라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의 중원 지역에서 자라기에 아주 적합했다. 하북성 신석기 유적에서도 이 기장의 낟알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기장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춘추시기의 초나라 장군이었던 사마자반이 진나라 군대와 싸울 때의 일이다. 초나라의 공왕이 부상을 입어 사마자반 역시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군영으로 후퇴했다. 그 때 사마자반이 목이 말라, 자신의 시종을 시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시종 양곡은, 시종들 중에서도 유달리 주인을 존경하고 잘 다르던 시종이었는데, 사마자반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물 대신 술을 한 사발 가져다 줬다. 술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르던 사마자반은 결국 술에 취해 전투에 나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발견한 공왕이 화가나 사마자반을 참수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사마자반이 마신 술이 바로 기장술이라 한다.
 
기장은 춥고 건조한 기후를 잘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도 쉽게 자라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의 중원 지역에서 자라기에 아주 적합했다. 하북성 신석기 유적에서도 이 기장의 낟알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기장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춘추시기의 초나라 장군이었던 사마자반이 진나라 군대와 싸울 때의 일이다. 초나라의 공왕이 부상을 입어 사마자반 역시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군영으로 후퇴했다. 그 때 사마자반이 목이 말라, 자신의 시종을 시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시종 양곡은, 시종들 중에서도 유달리 주인을 존경하고 잘 다르던 시종이었는데, 사마자반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물 대신 술을 한 사발 가져다 줬다. 술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르던 사마자반은 결국 술에 취해 전투에 나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발견한 공왕이 화가나 사마자반을 참수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사마자반이 마신 술이 바로 기장술이라 한다.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34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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廖文豪, 『汉字树 3』, 吉西平, 2015,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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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廖文豪, 『汉字树 3』, 吉西平, 2015, p106</ref>
  
  
 
[[분류:한자어원문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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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4일 (토) 13:45 판

語源

기장 서.png

黍는 곡물 이름이고, 서미(기장 쌀)를 가리키고, 점성이 있는 것으로 식용으로 하거나 술을 빚는데 쓰였다. 갑골문 黍자는 조에 알곡이 주렁주렁 맺어있고 아래로 드리워진 형상으로, 어떤 것은 조 아래에 물을 더하여, 서미를 사용하여 술을 빚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文化

중국은 술의 나라다. 그만큼 술의 역사도 대단하다. 고대 중국에서 술은 신에게 올리거나 손님 접대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음식보다 더 중시되기도 했다. 상나라는 술 문화가 매우 발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시의 누룩이 실물로 발견되기도 했는데, 분석 결과 주로 기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장은 고량이라고도 하는데, 고량은 우리들에게 고량주나나‘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식물이다.[1]

기장이 중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인도 기원설, 중앙아시아 기원설, 동지중해 기원설 등이 있지만, 아무튼 중국에서는 이미 은대로부터 기장을 양조 원료로 사용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 서양의 술 역사는 과일주로부터 시작되지만, 중국 최초의 술은 곡물로 빚은 것이다. 이때, 주로 기장이나 수수로 누룩을 만들어 내어 술을 빚었다. 기장은 은나라 시절부터 양조 원료로 쓰인 벼의 일종으로 맛이 차진 곡물로, 오랫동안 중국인이 술을 빚는데 이용되었다.

열악한 기후조건을 가진 강북지역에서 수확 할 수 있는 것은 ‘조’, ‘밀’과 ‘기장’ 등의 곡물이다. 黍(서)는 여러 곡물 중, 기장을 형상화해서 만들 글자이다. 기장은 중국에서 신석기 시대 이래로, 재배되어온 또 다른 식용 곡물로, 식용으로 쓰이거나 술을 빚는데 사용되었다. 黍는 이후 양조하는데 기장을 주로 사용하게 되어 水자를 더하여 모습이 변하게 된 것이다.

語源

기장 서2.png

서(黍)는 곡물의 이름으로, 기장을 뜻한다. 끈적거리는 성질이 있는데, 식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술을 담는데 쓰이기도 한다. 갑골문에서는 이삭의 윗부분에 낟알이 주렁주렁 달려 아래로 드리워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벼이삭 아래에는 물을 표시해, 기장으로 술을 양조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文化

상나라는 술 문화가 매우 발달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당시의 누룩이 실물로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를 분석한 결과 술은 주로 기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3] 기장이 중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인도 기원설, 중앙아시아 기원설, 동지중해 기원설 등이 있지만, 아무튼 중국에서는 이미 은대로부터 기장을 양조 원료로 사용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4] 기장은 점성이 강한 것이 특징인데 ‘찰지다’, ‘달라붙다’는 뜻의 점黏(niān) 등의 한자가 모두 黍를 구성요소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5] 설문해자에서는 소전체를 보고 ‘禾’에다 ‘雨’를 생략된 형태로 결합시켜 이 글자를 만들었다고 해설하고 있으면서도 뒷부분에 공자가 기장으로 술을 빚었으며 (그것이) 곡식에 물을 넣은 것이라는 내용을 첨가하여 이 글자가 水자를 구성요소로 하고 있고 기장으로 술을 만들 수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語源

기장서.JPG

기장은 볏과의 한해살이풀이며 그 열매는 황실(黃實)이라고도 부르는데 엷은 누런색으로 떡, 술, 엿, 빵 등의 원료나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이처럼 기장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오랜 시간 발효했을 때 술이 된다는 점으로, 고대 중국에서 술을 빚을 때 사용한 중요한 원료였다. 黍의 갑골문인 [[파일: 黍갑골문.jpg]]을 보면, 기장이 뿌리, 가지, 잎이 있는 식물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기장의 낟알이 물에 떨어지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다. 즉 기장을 물에 넣어 술을 만드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설문해자에서는 ‘禾에 속하면서 차진 것’이라며 水의 속성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장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기 때문에 식량을 구축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은 기장을 몹시 빽빽하게 심었다. 이 때문에 黍에는 ‘많다’라는 의미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文化

기장은 춥고 건조한 기후를 잘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도 쉽게 자라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의 중원 지역에서 자라기에 아주 적합했다. 하북성 신석기 유적에서도 이 기장의 낟알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기장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춘추시기의 초나라 장군이었던 사마자반이 진나라 군대와 싸울 때의 일이다. 초나라의 공왕이 부상을 입어 사마자반 역시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군영으로 후퇴했다. 그 때 사마자반이 목이 말라, 자신의 시종을 시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시종 양곡은, 시종들 중에서도 유달리 주인을 존경하고 잘 다르던 시종이었는데, 사마자반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물 대신 술을 한 사발 가져다 줬다. 술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르던 사마자반은 결국 술에 취해 전투에 나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발견한 공왕이 화가나 사마자반을 참수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사마자반이 마신 술이 바로 기장술이라 한다.

[6]

[7]

  1. 하영삼, 연상 한자, ㈜위즈덤 하우스, p.268
  2. 이돈주, 한자·한어의 창으로 보는 중국 고대문화, 태학사, p.162
  3. 하영삼, 《문화로 읽는 한자》, 동방미디어, 1998, p.243
  4. 이돈주, 《한자, 한어의 창으로 보는 중국고대 문화》, 태학사, 2006, p.162
  5. 왕닝, 시에똥위엔, 리우팡, 《『설문해자』와 중국 고대 문화》, 김은희 역, 2010, 학고방, p.235
  6.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341
  7. 廖文豪, 『汉字树 3』, 吉西平, 2015, 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