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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영이 감정했던 당시만 해도 이런 갑골이 어디에서 출토 되었으며, 그것의 성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1908년애 이르러서야 라진옥(羅振玉)이 처음으로 갑골의 출토지점이 하남성 안양(安陽)의 은허(殷墟)라는 사실을 밝혀내었으며, 이어서 그와 왕국유(王國維)는 은허라는 곳이 바로 상나라의 후기 수도였다는 사실을 고증해 내었다. 갑골의 발견과 은허의 성질에 대한 추정은 드디어 1928년부터 은허에 대한 대대적이고도 종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도록 했으며, 중앙연구원 역사연구소에서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총 15차례에 걸친 발굴을 했다. 이 은허의 대대적인 발굴은 바로 중국 현대고고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갑골의 발굴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고고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발굴 결과 은허에서는 상나라 때의 갑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으며, 은허는 원수(洹水) 남쪽 강변의 소둔(小屯)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그 면적이 약 24 ㎢에 이르는 대형 유적지였다. 이곳은 일찍이 북송시기 때부터 이미 명문을 지닌 상나라 때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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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정주의 이리강(二里崗)상나라 유적지에서도 상나라 때의 갑골이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발견된 갑골 중 2편에서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글자가 새겨진 갑골의 수가 너무 적어 문구를 해독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는 발굴이 아닌 채집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상나라 때의 갑골 연구는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이 실제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정주 지역의 갑골의 발견은 상나라 때의 갑골문이 은허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이다. 그 이후, 주나라 유적지에서도 서주시대의 갑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954년 산동성 홍동현의 방퇴 마을을 시작으로 북경 창평현의 백부, 섬서성 장안현의 풍호 유적지, 부풍현과 기산현 사이에 광범위하게 위치한 주원(周原)유적지 등 지금까지 모두 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그중에서도 1977년부터 출토된 주원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량이 가장 많다. 기산현의 봉추 마을에서 출토된 갑골은 무려 1만여 편에 이르며, 그 중 글자가 새겨진 것만 해도 3백여 편에 달한다. 서주 갑골문의 발견은 갑골학 연구의 범위를 한층 확대시켜 주었다.
 

2016년 12월 6일 (화) 00:09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