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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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경학과 유신, 입헌론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강유위는 13세 이후 [주차기](朱次琦)로부터 수학했고 스승으로부터 개혁적 정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고문을 익힌 강유위는 수차례 [동시](童試)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고 25세와 31세에는 북경으로 올라가 순천향시에 응시했으나 역시 낙방했다. 거듭 과거에 떨어지면서 팔고문과 구식학문에 회의를 갖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공양학과 서양학문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강유위가 개혁가로 성장할 수 있는 사상적 계기는 1882년부터 이루어진다. 강유위는 [만국공보]를 통해 서양의 지식을 접하였으며, 전족 등 구습폐지 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대동(大同)’이상에 대한 각성과 숙고를 시작한다. 즉, 강유위는 실리공법전서(1884)와 강자내외편(1886)의 저술을 통하여 평등을 공리로 하는 대동의 뜻을 정립한다. 한편 1888년 강유위는 제 1차상서의 상달에 실패하고 광주로 돌아왔을 때 요평(寥平)의 금문학서를 접하고 금문경학의 ‘미언대의’와 ‘통경치용’의 지적 계시를 받았다. 이는 곧 자신의 금문학서인 신학위경고(1891), 공자개제고(1892)의 저술과 풀판으로 이어졌다. 신학위경고는 고문경학의 경향적 근거에 대한 비판이라면 공자개제고는 금문학에 근거한 개혁의 철학을 담은 저작이다. 강의 이두 저작은 당대 관리와 유학자들에 큰 반향을 일르켰고 1894년 여연원(余聯沅)의 탄핵을 받아 이단으로 몰려 신학위경고와 그 판이 소각, 파괴되었다.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통하여 고문경학의 경학적 허위성을 폭로하였다. 먼저, 강유위는 동한(東漢) 이후의 경학은 유흠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위경(僞經)’이라 단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