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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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kdal0048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13일 (수) 20: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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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공망(太公望)

본명 강상(姜尚)
별칭 강자아, 여상(呂尚), 강태공(姜太公)
직업 정치가, 병법가
활동 기간 (周)나라

태공망의 생애

태공망의 이름과 출신

흔히 강태공(姜太公)으로 알려져 있는 강상은 동쪽 바닷가 동해사람이다. 그 선조가 일찍이 사악(四嶽)으로 우(禹, 중국전설상의 (夏) 왕조 시조)를 도와 물과 땅을 정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순 임금과 하(夏) 때는 여(呂)와 신(申) 땅에 봉해졌으며, 성을 강씨(姜氏)라 했다. 하와 상 때는 신과 여 땅에 방계 자손이 봉해지기도 하고 평민이 되기도 했는데 강상은 그 후손이다.

강상은 여상(呂尚),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불리는데 여상은 봉지인 여(呂)에서 성을 취하여 부른 것이고, 태공망은 주 문왕과의 일화와 관련이 있다.


주문왕(周文王)과 주무왕(周武王)의 사(師)가 된 여상

강상을 만난 서백(후에 문왕)

여상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사(師)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몇 가지 말을 사마천의 《사기》의 제태공세가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 1. 주(周)의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서기에 앞서 점을 쳤더니 “얻을 것은 용도 이무기,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패왕을 보좌할 신하를 얻을 것이다.”라는 괘가 나왔다. 그 후 서백은 사냥에 나섰다가 위수(渭水) 북쪽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게 된다. 당시 여상은 곤궁하고 나이가 많았는데, 여상을 본 서백은 몹시 기뻐하며
“우리 선군이신 태공(太公) 때부터 ‘성인께서 주에 오시면 주가 흥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분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라고 하며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고, 사(師)로 모셨다.


  • 2. 여상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았고, 일찍이 주(紂, 상(商)왕조의 마지막 왕)를 섬겼으나 무도하여 그를 떠났다. 제후에게 유세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서쪽 서백에게 귀의하였다.


  • 3. 여상은 처사로 바닷가에 숨어 살고 있었으나, 서백이 유리(羑里)에 갇히자 평소 알고 지내던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여상을 불렀다. 여상은 미녀와 기이한 물건을 구해 주 임금에게 바쳐 서백의 죄를 면하게 했고, 서백은 풀려난 후 여상은 서백(후에 문왕)의 사(師)가 되었다.


태공망과 (齊)나라 건국

서백 창(昌)은 유리에서 벗어나 돌아온 후 여상과 모의하여 정권을 무너뜨렸는데, 여상의 용병술과 권모, 계책이 많이 쓰였다. 서백이 주 문왕(文王)이 되고 천하의 3분의 2가 주에 귀의했는데 이 역시 여상의 많은 권모와 계책 덕분이었다. 여상은 권모와 계책에 능한 훌륭한 정치가이자 병법가였다.


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했다. 2년 후 임금은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가두었다. 무왕이 주 임금을 정벌하기에 앞서 거북점을 쳤는데 징조가 불길하게 나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공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오직 여상만이 무왕에게 강하게 정벌을 권하였고, 무왕은 마침내 정벌에 나서 상을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다. 무왕은 사상보(무왕은 여상을 사상보(師尙父)라 했다.)를 제(齊)의 영구(營丘)에 봉했다.


여상은 동쪽의 봉국으로 가서 정치를 고쳐 그곳의 습속에 따라 예를 간소하게 했다.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어업과 소금업의 이점을 잘 살리니 많은 인민들이 제로 와서 제가 큰 나라가 되었다. 또한 주 성왕(成王)이 어릴 때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를 배반하자 여상에게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정벌권을 부여했다. 정벌권을 가진 제는 더 큰 나라가 되었고, 영구를 도읍으로 삼았다.


태공이 약 백 살 넘어 죽고 그 아들의 아들로 제나라는 이어졌다.


현대적 의미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서백에게 등용되어 입신출세하였다. 강태공은 많은 세월 위수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했는데, 사실은 고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러한 강태공의 고사를 잘 알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저 한가롭게 낚시나 하러 다니는 사람, 혹은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 낚시광을 일러 강태공이라 부른다. 강태공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때를 기다려 제후 자리에까지 오른 강태공의 생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관련 작품

서적


(明)대 신마소설(神魔小說) 《봉신연의(封神演義)》 는 100회로 이루어진 장회소설로, 신마소설은 신과 마의 다툼을 소재로 한 소설로 노신(魯迅)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에서 처음 쓰인 용어이다. 봉신연의의 자세한 창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융겅(隆慶, 1567~1572)에서 만력(萬曆, 1573~1619) 연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육서성(陸西星)이라는 설과 허중림(許仲琳)이라는 설이 있다.

강태공이 주(周) 문왕(文王),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상(商)의 주(纣)를 토벌한 역사적 배경을 그리고 있으며, 많은 고사이야기와 강태공 이야기 이외에 다양한 신선, 요괴 및 闡敎, 截敎의 도교 교파 간의 싸움이 등장한다.


  • 2. 《강태공전》


《강태공전》은 작자와 창작 연대 미상의 조선후기 한글소설이며, 《강태공실기》라고도 한다. 《강태공전》은 역사적 사실로 전승되어오던 ‘무왕벌주(武王伐紂)’ 설화를 강태공의 일대기를중심으로 비현실적이고 신이한 요소를 더하여 소설로 꾸민 작품이다. 필사본 10종, 경판 방각본 3종, 활자본 8종이 현존한다. 강태공전은 봉신연의의 한글 축약 번안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강태공전》은 강태공을 중심으로 《봉신연의》를 재구성했다. 따라서 봉신연의에 비중 있게 등장하던 여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우 간략하게 다루거나 심지어 생략하고 있다.


  • 3. 《육도삼략(六韜三略)》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주나라 강상(강태공)이 썼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병법서이다.


TV

년도 작품명 출연
1990 드라마 《封神榜》 蓝天野
1981、 2001 드라마 《封神榜》 余子明
2007 드라마 《封神榜之凤鸣岐山》 刘德凯
2014 드라마 《封神英雄榜》 陈键锋
2016 드라마 《封神传奇》 李连杰


관련 고사성어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어질 복, 물 수, 아닐 불, 돌아올 반, 동이 분)
- 한번 저질러진 일은 되풀이하지 못한다.
낚시하는 강태공


상(商)나라말기 주왕(紂王)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나라를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있었다. 이에 주의 무왕이 아버지 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강상(姜尙)등의 도움으로 난을 일으켜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상(商)나라를 무너뜨린 뒤, 주(周)나라를 세웠다.

본래 강상(姜尙)은 동해의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사는 선비였다. 그가 마씨(馬氏)와 결혼을 했는데 늘 책만 읽고 가정은 돌보지 않아 끼니를 이을 수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였다. 이에 마씨(馬氏)는 집을 나가 버렸고, 강상(姜尙)은 허구헌날 낚시질만 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서백(西伯)을 만나 입신출세하여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었을 때 집을 나간 마씨(馬氏)가 돌아와서 이제는 밥 굶을 일 없으니 다시 살겠다고 했다. 강상(姜尙)이 마씨(馬氏)에게물을 길러오라 시키고, 물을 길러오니 다시 마당에 부으라고 하였다. 마당에 물을 부으니 이제는 그것을 다시 동이 주워 담으라고 하자 마씨(馬氏)가 땅에 엎질러진 물을 어찌 주워 담을 수 있냐고 따졌다. 이에 강상(姜尙)이 말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복수불반분, 覆水不返盆) 한번 나간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 수구초심(首丘初心, 머리 수, 언덕 구, 처음 초, 마음 심)
-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


강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영구(營丘)에 봉해져 계속해서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나 주(周)나라에 와서 장례(葬禮)를 치렀다.

이를 두고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고지인유언 왈호사정구수인야(古之人有言 曰狐死正丘首仁也;음악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즐기며 예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의 말이 있어 말하기를 「여우가 죽을 때 언덕에 머리를 바르게 하는 것은 인(仁)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이는 《예기(禮記)》 단궁상편(檀弓上篇)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