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의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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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원의 치란, 현종 제위 기간동안의 태평성대를 말한다. 이름의 의미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와 비견될 만하다하여 현종의 연호 개원을 붙여 개원의 치라고 부른다. 정관의 치처럼 당의 위세를 대외적으로 넓히진 못했지만,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정관의 치를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 발전

현종 이전 60년 동안 측전무후 시기부터 조성된 정치적 부패를 해결했어야 했다. 그는 우선 환관과 인척의 정치 참여를 막음으로써 정치 안정을 꾀하였고, 현명한 재상들을 등용했다. 그의 인재등용은 진사과 중심의 과거제를 통한 선발방식으로, 이를 통해 한문출신의 관리들이 많이 선출되었다. 또한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중앙의 관리 외에도 능력있는 수도의 관리들을 지방에 도독으로 보내는 등 지방의 관리에도 신경썼다.

경제·문화적 발전

현종의 정치시기에는 호구가 급증하여 정관시대의 거의 두배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외국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고 하는데 멀리 페르시아, 사라센 등지에서까지도 온 많은 외교 사절과 상인들이 즐비해 장안은 국제도시로써의 위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특히 장안에는 동시와 서시라는 두개의 시장이 들어서 있어 수많은 상점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여기서 파는 물건에는 당나라의 것뿐만 아니라 저 멀리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물건들도 있었다고 하니 경제적으로 얼마나 부흥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단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적 발전 외에도 이백, 두보, 왕유 등의 유수한 작가들이 배출되는 등 문화적으로도 매우 발전한 시기였다. 또한 작가뿐만 아니라 화가, 사학자, 음악가, 천문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어 찬란한 당나라 문화를 꽃피운 시기였다고 한다.

정책적 문제

현종의 진사과 위주의 관리 등용방식은 과거제를 통한 관리들을 대거 등용시키며 구 귀족출신의 관료들과의 대립을 만들어내어 당쟁의 문제를 만들어 냈다. 또한 그가 실시한 모병제는 직업군인을 형성하였고, 이는 지방의 도독이나 절도사와 같은 관리들의 사병화로 이어져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태평성대의 종장

통치 말기로 갈수록 현명했던 현종은 충신들의 조언을 배척하고 간신 이임보 등을 가까이 둠으로써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737년 총애하던 무혜비가 승하한 후,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하면서 일가가 힘을 얻었고 그로인해 정국이 더욱 혼란해졌다. 그녀가 바로 중국 4대 미녀로 유명한 양귀비이다. 결국 755년 자신이 총애하던 절도사 안녹산 및 그의 부하 사사명에 의해 '안사의 난'이 발생함으로써, 양귀비는 죽임을 당하고 현종은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762년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