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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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정원을 원림園林이라고 한다. 원림은 도교적 생각이 짙게 깔린 사람과 자연의 소통 공간이다. 개인 소유의 원림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부터이다. 한나라의 몰락과 옛 질서에 대한 회의, 북방 이민족의 침범에 대한 공포와 정치적 혼란,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믿음의 상실 등으로 인해 문인들은 ‘혼돈’의 유교적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연친화적인 도교와 불교 사상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치관이 변한 것이다. 문인들은 도교의 자연관을 원림에 표현했다. 원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세계였다. 혼란스런 현실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였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왜 원림을 이상세계로 본 것일까. 그들에게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곳은 이상세계이다. 원림에는 항상 산과 물이 존재한다. 산은 양 그리고 물은 음을 표상한다.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정적인 산은 뼈대이며 동적인 물은 혈관을 상징한다. 산과 물이 공존하는 세계, 중국인들에게는 이상세계이다.

원림에 산을 갖다놓을 수는 없으니 산의 대체물이 있다. ‘석가산石假山’이라는 돌로 만든 가짜 산을 배치해놓거나, 태호석이란 돌을 꽂아두던지 그것도 아니면 물가에 정자를 세워둔다. 그리고 원림에는 연못이 있거나 아니면 물이 원림을 에둘러 흐른다. 산과 물이 공존하는 것이다. 

태호석太湖石은 중국인들이 애용하는 대표적인 정원석이다. 원래 소주와 접해 있는 태호라는 호수 밑바닥에서 나는 돌인데 오랜 세월동안 물결에 쓸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중국인들은 이 태호석에 상징적 의미를 많이 부여했다. 구멍이 많이 뚫려 있는 모양새 때문에 이 돌은 도교에서 말하는 동천洞天을 상징한다. 하늘로 통하는 동굴을 뜻하는 '洞天'은 유토피아의 세계로 통하는 관문을 상징한다.

원림에서 산수의 결합은 하나의 연못 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이른바 ‘일지삼산一池三山’의 패턴을 보여준다. ‘일지삼산’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그리고 영주 등 동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고 전해지는 유토피아인 ‘삼산’을 모방한 구도이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산은 우주의 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겨졌다. 
중국의 여러 도시들 중 특히 양주는 아름답고 화려한 정원이 많다. 그 이유는 청나라 건륭제가 여러 차례 강남을 유람했을 때 양주 염상들이 황제를 위해 조성한 것이라 한다. 양주의 정원 중 대표적인 것이 개원이다. 이곳은 원래 명대에 ‘수지원’이라 불린 정원이었는데, 100년의 세월이 흘러 청나라 강희, 건륭 연간에 이르러 마씨 형제가 수리를 하여 ‘소영롱산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후 주인이 바뀌어 가며 오랜 세월이 흘러 대청가경(大淸嘉慶) 23년(1818년) 황지균이 이것을 구입하여 새로이 수리를 하여 ‘개원’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는 장사치이긴 했지만 학문이 높고 그림을 잘 그려 문인의 됨됨이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인적 소양에 의해서 이 정원을 지었을까? 상인 지식층의 문인사회 진입이 1500년경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료들의 약탈적 횡포의 위험을 줄이고 다른 상인의 부상을 막기 위해 상인들은 관료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관료들이 점하고 있는 고상한 문화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상인들은 또한 그들이 축적한 부를 그들의 자제들을 교육하는데 투자했다. 경제적 지위를 사회적 지위로 확대하는 관문은 과거시험이었다. 상인들은 그들의 자제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됨으로써 신분상승과 특권의 혜택을 꾀할 수 있었다. 
신분상승을 추구했던 상인들은 문인의 지위를 갈망했다. 문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그들은 문인과 같은 교양인이 되어야 했다. 한 가지 전략은 교양 있는 문인 지식층이 지향하는 바를 이해하고 그들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문화적 자산을 소유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상류층 엘리트 사회 내부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문화적 소양이다. 골동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문인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이다(의우헌 내부에 여러 장물들). 골동품을 소유하고 감상할 수 있는 감식안을 가지는 것은 소유자의 인격과 심미취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6세기 후반에 와서 시각매체를 비롯한 책들의 출판과 유통의 급증은 교양인이 되고자 했던 상인들이 새로운 독자층으로 대두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련된 문화상품 소비자를 위한 안내서라 할 수 있는 <격고요론格古要論>이나 <고반여사考槃餘事>와 같은 책이 주는 지식은 그 자체로 경제력을 문화적 힘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는 모든 사람이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었다(총서루). 이러한 책은 문인 엘리트 사회로 진입을 갈망했던 상인들을 고상한 취향과 감식안을 갖도록 교육하는 데 필요했다. 이러한 책을 통해 문화적 소양을 갖춤으로써 상인들은 엘리트를 특징짓는 학문과 감식안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16세기 후반에 와서 출판이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된 것은 문인이 갖추어야 할 문화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소수 문인들이 전유했던 엘리트 문화에 관한 지침서의 대량 유통이 절실했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개원 (个园)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황지균이 푸른 대나무가 마음이 든든하면서 곧은 동시에 겸허하면서도 정절을 지킨다고 생각해 대나무를 정원수로 정하면서 대나무 죽(竹)자의 반만을 써서 개(个)원(园)이라고 하였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은 황지균이 허심과 절조를 가진 대나무를 워낙 좋아해 정원에 만 그루를 심었는데 달빛이 만드는 대나무의 그림자가 수도 없이 많은 개(个)자를 그리니 정원의 이름을 개원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8년 중국의 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었으며, 개원은 돌을 겹겹이 쌓아 올린 정교한 가산(假山)으로 유명하다. 상이한 모양과 재질의 돌들로 사계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개원 내에 있는 4개의 가산은 각각 춘,하,추,동을 나타낸다.
1)봄 풍경(석순)
개원의 남쪽 입구는 봄 풍경으로, 둥근 달문 위에 새긴 ‘개원’이라는 글자를 시작으로 봄 풍경이 시작된다. 겨울을 나면서도 시들지 않은 대나무 숲과 대나무 숲속의 푸른돌이 마치 죽순처럼 솟아나 있어 마치 비온 뒤에 솟아난 죽순이 봄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다고 하여 “춘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봄 경치를 나타내는 것은 길가에 피어있는 작약이라 한다. 결국 개원의 봄에는 화중군자인 난을 보고, 부귀를 상징하는 작약을 보며, 허심과 지조를 나타내는 대나무를 보게 된다. 죽림의 뒤편에는 누창분장이 있는데, 죽석의 그림자가 담 위에 비추어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가 이동하면서 봄날 산림의 흥취를 갖추고 있다. 
달문을 지나면 의우헌(宜雨軒)에 이르게 되는데, 과거 중국 문인들은 비를 벗에 비유하기도 했으니 손님을 맞이하던 홀이라고 할 수 있다. 의우헌은 사면에 모두 창을 내서 창마다 서로 다른 정원의 사계절 경관을 볼 수 있다. 
의우헌의 문 앞에는 “朝宜調琴, 暮宜鼓瑟 舊雨適至, 新雨初來”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 글귀의 뜻은 “아침에는 금을 고르기에 좋고, 저녁은 술을 고르기에 좋으며, 옛 비는 마침 제 때에 왔었는데, 새 비는 처음으로 왔구나” 라는 뜻이다. 즉, 금, 슬, 옛 비, 새로운 비 모두 반긴다는 뜻이다. 여기서 금슬은 부부화합, 형제우애, 붕우융합을 비유해 왔으며, 구우(舊雨), 신우(新雨)는 옛 친구, 새 친구를 말함이니, ‘의우헌’이란 ‘친구들이 즐겁게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 된다. 또한 내부에는 사군자와 사슴, 학 등의 목제 조각품이 있는데, 이것은 주인이 추구하는 생활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매화의 굳은 절개와 난의 맑고 고아함, 대나무의 허심, 국화의 기상과 복록과 장수를 기리는 이 조각품들은 민족적 정서를 담은, 전통문화를 숭상하는 산물이다. 태호석을 쌓아 만든 연못을 가운데 두고 ‘호천자춘壺天自春’ 누각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이 누각 앞쪽에는 계수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정원이 있기 때문에 속칭 ‘계화청桂花廳’이라고도 한다. 이 누각은 밖을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벽이 모두 유리로 된 건축양식인 ‘사면청四面廳’ 기법으로 건축되었다. 동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 밖에는 테라스가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있는 테라스에는 앉아서 밖을 바라볼 수 있는 독특한 모양의 벤치가 있다. 

2)여름 풍경(태호석)

개원의 서북쪽에는 여름 풍경이 나타난다. 포산루 서쪽에서 시작하여 물속에 태호석을 겹쳐 쌓은 가산에 이르고 돌다리를 건너 수까지 수려하고 그윽한 정경이 눈길을 끈다. 의우헌에서 서쪽으로 대나무 숲을 지나면 맑은 물의 연못이 나타난다. 연못가에는 태호석을 쌓아 동산을 만들었는데 천태만상의 돌들이 모여 있다. 바위들은 혹은 홀로 선 학 같기도 하며 한들거리는 물고기 꼬리 같기도 하다. 수면에는 물고기 가시모양의 가는 바위가 기이하다. 구멍이 나고 뚫려 있으며 주름이 지고 여윈 태호석의 온갖 특징을 한 몸에 모은 그 바위는 물위에 불쑥 솟아 더욱 눈길을 끈다. 이 가산의 산정에 올라서면 ‘학정(鶴亭)이 나오는데, 기둥만 달랑 네 개가 있고, 앉는 자리가 없다 보니 마치 방금 학이 날아와 앉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 동산에 조성된 동굴에 들어서 밖을 바라보면 녹음이 우거지고 맑은 물의 연못에는 연꽃이 만개해있어 여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동산의 다른 쪽 에는 조금 투박해 보이는 이층 건물로 된 ‘포산루’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의 아래층은 주로 집안의 연회를 베푼다든지 친구들을 만나는 곳이었으며, 이층은 집안 부녀들의 모임장소로 활용된 곳이다. 포산루는 양쪽에 복도를 조성해 두 산을 끌어안고 있다. 하나는 태호석이 우아한 라인을 그리는 여름의 산이고, 다른 하나는 칼로 깎은 듯 곧게 솟은 바위가 장관인 가을의 산이다. 아담한 여름의 산에서 강인한 가을의 산으로 과도하는데 포산루가 전환점의 역할을 한다. 두 개의 산, 즉 ‘하산’과 ‘추산’을 앉고 있는 형상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그 이름에 걸맞는 듯하다. 포산루는 ‘호천자춘(壺天自春)’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호천’은 신선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호천자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신선의 세계에는 봄이 스스로 온다.’라는 의미로서, 세속을 멀리하려는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누각은 여름 산과 가을 산 사이에 있어 여러 갈래의 산길을 통해 직접 이 누각의 이층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육교 같은 역할을 한다. 이 회랑을 천천히 건너면 여름에서 가을로 혹은 가을에서 여름으로 각기 다른 두 계절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어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시공터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가을 풍경(황석)

개원의 동쪽에는 가을 풍경이 펼쳐지는데, 거대한 황석 봉우리의 등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돌다리와 잔도, 유곡, 석굴 등이 잇따라 나타난다. 서쪽을 마주 향한 가산은 석양이 질 때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을빛을 드러낸다. 석양에 의해 산세는 더 웅장하고 험준하게 느껴진다. 바위들 사이로는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와 철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다양하게 바뀌는 단풍나무들이 조화로워 나무와 바위가 혼연일체를 이룬다. 이곳 추산의 한 곳, 높이 앉은 곳에는 불운정이 있다. 멀리는 시내의 경치를 구경하던 곳이며, 가까이에는 정원을 감상하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그 밑에는 청의정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정자는 정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주인과 손님이 연회를 즐긴 뒤 경치를 구경하고 난 다음에 쉬어 가던 곳이라고 한다. 그 남쪽에는 투풍루월청(透風漏月廳)이 있다. 이 곳은 밤의 생활과 정치를 즐기던 곳인데, ‘바람이 뚫고 들어오고, 달빛이 새어 들어 온다’는 의미를 지녔다. 

4)겨울 풍경(선석)

가을의 산을 지나면 햇빛 아래 유난히 하얗게 빛을 뿌리는 바위들이 모여 눈이 녹지 않은 것 같은 차가운 겨울의 산이 만들어진다. 겨울 풍경을 연출하는 가산은 설석이라고도 부르는 선석을 쌓아올린 것으로, 눈이 쌓여 있는 느낌을 준다. 가산 아래의 지면은 얼음이 갈라진 듯한 무늬의 백반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생강나무와 남천죽 두세 그루가 높이 서 있다. 산에 조성된 담에는 24개의 구멍을 내서 바람이 불때마다 바람소리가 나는데, 겨울에 겨울의 산에서 바람소리를 들으면 한기가 더해지고 여름에 들으면 더위가 한 순간에 가시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겨울의 산을 돌아서면 다시 봄과 연결되는 구조이다. 이처럼 개원은 춘하추동이 엇갈리는 자연을 교묘하게 정원 속에 담았다. 정원의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경관이 바뀌고 정원을 다 돌면 일 년 사계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정원의 외곽에는 총서루가 있는데, 이곳은 책을 보관하던 곳이며, 공부를 하던 곳이다. 상인들에게 문인에 대하여 안전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책이었다. 취향안내서는 그림이나 서예, 오래된 청동기 같은 높은 품위와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로서 지위를 인정받는 데 필요한 당대의 생활소품까지 총망라했다. 단지 돈만 많은 사람들은 이 책들을 통해 고가의 물건이 만들어내는 멋진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즉 무엇을 수집할지, 언제 어떻게 그것들을 뽐낼지, 무엇을 감상할지, 어떻게 품평할지, 그리고 고상하게 보이게 행동하는 요령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개원의 주인의 집은 정원의 남측에 위치해 있다. 원래의 대문은 남쪽에 있으니, 정원은 집의 뒤편에 위치한 셈이다. 이 집은 양주의 수백 년 전통 염상들의 가택 형태를 취하고 있어 당시 주택건축이 어땠는지 잘 알 수 있다. 
개인적인 감상은 이러하다. 개원은 단순히 황지균 자신의 문인적 풍치를 뽐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닌, 문인으로의 지위 상승 욕망의 표현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은 유교의(공적, 계급적)영역에서 벗어난 도교(사적, 비현실적)공간이 아닌 사농공상의 신분제도 안에서 신분 상승의 열망을 표현한 공간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원이란 곳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공간일 수도 있다. 그에게 개원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 문인계층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자신도 그들과 같은 사상을 공유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유교적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도교. 그는 너무나도 상인적인 인물이었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