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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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you23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18일 (화) 17:39 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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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연표
1972 닉슨의 중국 방문
1973 43 방안
1975 덩샤오핑, 국무원에 사회주의 현대화 관련 정책 문건 제출
1976 마오쩌둥 사망, 화궈펑 당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1978 중국 고위 경제사절단 해외 방문
1978 11기 3중전회
1979 중미국교정상화

개요

단기적으로는 공산당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의 결과, 장기적으로는 마오 시기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문혁이 종결되는 1976년 즈음의 중국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1950년대와 비교했을 때 거의 나아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마오쩌둥 사망과 문혁의 종결 이후 등장한 화궈펑 체제는 체제 정당성을 위해서 새로운 경제발전 방식을 모색하였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개혁개방은 마오쩌둥의 지명을 통해 등장한 화궈펑 체제의 의제이기도 했다. 게다가 개혁개방은 본래 마오 시기, 즉 문혁 후반기의 중미 관계 개선이나 외국 자본 유치, 기술 도입 등의 기초 위에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화궈펑 체제에서 개혁개방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문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 등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1978년 11기 3중전회부터이다. 화궈펑 체제는 마오쩌둥의 지명을 통해 등장했으므로 마오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양개범시를 제시했다. 하지만 양개범시가 존재하는 한 문혁 시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에 문혁 반대 세력이 양개범시에 대해 반대를 하며 진리표준토론을 전개했다. 그 결과 화궈펑 세력이 패배하고 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덩샤오핑 등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개혁개방 이전 개혁개방 이후
소유 제도 공유제 공유제+비공유제
자원배분 제도 계획경제 시장경제+계획경제
경제발전의 중심(노동력의 배치) 전통·농업(농촌) 현대·공업(도시)

화궈펑

화궈펑은 마오쩌둥에 의해 임명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지시와 결정을 절대적 권위 삼아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외관상 마오주의 형식을 많이 따랐더라도, 마오의 모든 행방을 따르진 않았다. 화궈펑은 마오주의 말기의 정책을 폐기하고 상당부분을 1950년대의 마오주의로 돌렸다. 화궈펑은 마오의 외양을 하면서 마오 말기의 정책을 폐기했는데, 예를 들어 "백화제방"이라는 마오의 슬로건을 외치며, 문혁 때 폐기되었던 연극·오페라·영화 등을 부활시켰다. 문학 잡지와 학술 잡지도 재발행되었고, 다양한 잡지들이 새롭게 창간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상흔문학'이 쏟아져 나왔다. "양위중용"이라는 마오주의의 격언을 상기시키며 국제문화교류를 촉진하고 서양문학도 번역 출판하도록 했다. 그리고 1977~78년에는 문혁이나 그 이전부터 침묵당했던 지식인들이 조용히 복권되었다. 그리고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문혁기의 평등주의적 교육개혁을 폐지하고 50년대의 엘리트주의적 교육제도를 재확립했다. 대학교와 고등연구소가 부활하고, 이에 따라 관련 기관들의 기능을 문혁 이전처럼 회복시켜 나가며 새로이 공포된 당과 국가헌법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용어인 '4개 현대화'를 위해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게다가 공식 이데올로기로는 마오주의의 다자이 모델이 계속 찬양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업생산을 위한 자류지 확대를 허용하고 농촌시장의 발전을 장려했다. 화궈펑은 경제적 근대화의 주역이 되고자 했다. 그는 1975년 가을 덩샤오핑이 국무원에 제출한 정책 문건에 기초하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수사적 표현을 빌려 경제적 제안을 하였다. (물론, 덩샤오핑의 제안이 먼저였다는 것은 철저히 내비치지 않았다) 1977년 화궈펑 정부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로부터 근대적 기술을 도입하고, 중국의 석탄과 석유를 수출하여 그 재정을 충당하려 했다.

화궈펑은 1978년 11월에 개막사에서 중앙공작회의의 의제로 ①농업을 기초로 하는 방침 문제와 농업 생산력 제고 문제, ②1979년과 1980년의 경제 계획에 관한 문제 ③리셴녠(李先念)이 국무원 이론회의에서 했던 연설에 관한 문제를 제시했다. 그런데 화궈펑은 이 세 가지에 대해 토론하기 전에 먼저 1979년 1월부터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당의 사업 중심을 전환하는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하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대내 개혁

덩샤오핑은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 인민공사 폐지: 공동생산 공동분배로 이루어지는 인민공사 하에서는 생산력이 올라갈 수 없었다. 따라서 덩샤오핑은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일부 유휴지를 개인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산된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도록 했다.
  • 농업생산 책임제 실시: 덩샤오핑은 각 농가에 토지를 할당해 준 뒤 농업생산 책임제를 실시했다. 농민들은 국가와 개별 계약을 통해 국가에 곡식을 팔았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 개인의 이윤 동기를 자극한 이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인민공사 폐지 이후 중국의 농업생산량은 급증했다. 1953~1978년 농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3.2%에 불과했으나 1979~1985년에는 9.4%로 증가했다. 식량생산 증가율 또한 1978년 이전 기간에는 2.4%였으나 이후 7년동안 4.9% 상승하며 1984년에는 식량 수출국 대열에 올랐다.
  • 향진기업 제도 도입: 향진기업은 농촌은 농업을, 도시는 공업을 담당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한 것으로 농촌의 부업을 장려함으로써 농가의 소득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향진기업 발달은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을 억제하고 농촌의 현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 개체호: 도시에는 개체호(個體戶) 개념을 도입했다. 개체호는 중국의 도시지역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7명 미만의 자영업자들을 말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본주의의 찌꺼기'로 비판의 대상이었으나 개체호는 개혁개방과 함께 부활했으며, 정부의 시장경제 활성화 정책에 따라 그 수가 급증했다. 국영기업에서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물품의 제조와 판매업, 서비스업, 요식업 등이 중심업종을 이룬다. 개체호의 출현은 개인의 자본과 노동력을 토대로 벌어들인 소득을 본인이 직접 지배하는 경제형식으로서, 개혁개방 초기에 중국이 달려 나갈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도였다. 개체호는 개혁개방 이후 20여 년이 지난 1999년에 3160만개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으나 최근에는 기업들이 집단화하면서 그 수가 약간 줄고 있다.

대외 개방

폐쇄적인 자력갱생정책 대신 대외개방을 통해 국제 시장에 참여하고자 했다. 덩샤오핑은 미국과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수교를 맺었다. 1978년 한때 중일전쟁을 벌인 일본과 중일 우호조약을 맺었고, 1979년 미국을 방문해 미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28일부터 2월 5일까지 미국을 방문해 국교정상화에 서명하고, 미국에게서 관세최혜국 지위를 얻어냈다.

  • 특구 설치: 중국의 특구 설치는 점개방-선개방-면개방-전방위개방 단계로 진행됐다. 덩샤오핑은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남연해 지역부터 단계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해 내륙 서부까지 완전히 개방하는 방법을 썼다. 점개방 단계는 1979~1983년 시기로,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와 푸지엔성의 샤먼에 이른바 4대 경제특구가 설치됐다. 덩샤오핑은 1984년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이들 특구를 순시했다. 남방순시에서 돌아온 덩샤오핑은 경제특구 확대를 촉구했다. 이후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진행된 선개방 단계에서 공산당은 14개 연해지역의 주요 항만도시를 개방도시로 지정했고, 양자강삼각주, 주강삼각주를 개방지역으로 지정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계속된 면개방 단계에서 산동반도 요동반도 및 환발해만권을 개방지역으로 지정했으며, 중국 최남단 섬인 하이난(海南)도를 성으로 승격해 다섯 번째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전방위개방은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서부 내류기역도 개방한 것으로, 이로써 중국 대륙은 완전히 개방됐다.

4개 현대화

저우언라이가 창시한 개념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의 상징이자 경제성장의 초석이 된 정책이다.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당시 공식적인 중국 주요 경제 정책이 되었다.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의 개혁파들은 회의에서 '대규모 대중적 계급투쟁'의 종결을 선언함으로써 계급투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마오쩌둥 시대의 노선과의 결별을 명확히 하고 4개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새 시대의 총체적 과업으로 규정했다.

3보주

三步走(산바오조우)는 덩샤오핑이 1987년 밝힌 3단계 중국경제 발전론으로, 溫飽(원바오)-小康(샤오캉)-大同(다퉁)로 나아가는 발전단계를 말한다.

  • 溫飽(원바오):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는 뜻으로 인민의 먹고 입는 문제 해결, 즉 초보적인 단계부터 해결한다는 뜻이다. 20세기 말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4배로 끌어올려 1000달러를 넘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
  • 小康(샤오캉): "생활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생활 수준을 중류 정도로 이끌어 올리고자 했다. 공산당 창건 100주년인 2021년까지 국민소득을 다시 2배로 끌어올려 중진국에 진입하고자 했다. [2]
  • 大同(다퉁): "크게 발전하여 모두가 잘 사는 사회"라는 뜻으로 중국의 현대화를 이룩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하고자 했다.

1개의 중심, 2개의 기본점

14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은 국가의 목표로 하나의 중심, 두개의 기본점으로 설정하였다. 하나의 중심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원리로 한 경제개발이고, 두개의 기본점은 '개혁개방의 지속'과 맑스레닌주의,모택동 사상의 견지, 인민민주독재, 공산당의 영도, 사회주의 노선이라는 4개 기본원칙의 견지를 말한다. 이러한 기본 원칙은 보수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개혁파들 역시 개혁개방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충격을 수반하기에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도력과 정치 사회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던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실사구시 원칙에 입각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의 주장은 끊임없는 현상의 변화 가능성으로 인하여 많은 반발을 일으켰고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에 4항 기본원칙을 지정하여 개혁 개방의 한계선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 이후~현재

참고자료

『차이나 핸드북』, 성균중국연구소 엮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모리스 마이스너
『덩샤오핑 : 개혁개방의 총 설계자』, 박형기
『개혁과 개방』, 조영남


  1. 원바오 단계는 80년대 말 완료했다.
  2. 2002년 11월 열린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는 '정치보고'를 통해 지속적인 개혁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 정책 추진으로 중국이 샤오캉 사회에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당시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를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