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한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2부분까지.)
2번째 줄: 2번째 줄:
  
  
== 1. 개요 ==
+
== '''1. 개요''' ==
 +
중국 간쑤성 북서부의 에티나 강/에치나 강/어지나 강 유역에서 발굴된<ref> 黑河라고도 하며, 간쑤성(감숙성甘肅省) 장액시(張掖市)에서 발원하여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治州]]의 아라산맹(阿拉善盟) 에젠기(액제납기;額濟納旗)를 거쳐 거연해(거연택)로 흐른다. 여기서 ‘거연’에 ‘거연海’라는 이명이 있는 것은 이 곳이 염호이기 때문이다. 초승달 모양으로 된 하나의 호수였으나 오늘날은 동과 서 두 개로 나뉘어 있다. </ref> 한나라 시대의 1만여 편의 문서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현전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는 기원 전 102년(전한 漢武帝 태초太初 3), 가장 늦은 것은 기원 후 30년(후한 光武帝 건무建武 6)의 것이다.
 +
거연한간(居延漢簡)이 발굴된 지역은 당대 행정구역 상 거연 현에 해당하며, 전한 무제(漢武帝)가 유목민족 흉노(匈奴)를 공격, 제압하고자 설치한 하서4군(河西四郡: 무위, 장액, 주천, 돈황) 중에서도 최전방 거점으로 기능한 곳이다. 상호견제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한 무제는 기원 전 102년 이 지역을 얻은 후 지은 거연성에 감시초소와 둔전 등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이 곳을 방어하였다. 국경 방위를 위해 내지에서 이주해온 관리,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거주하며 군사, 행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작성된 행정문서를 포함한 많은 문서들을 통틀어 거연한간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
이 문서들은 나무나 대나무를 얇게 자른 위에 칠묵(漆墨)으로써 주로 작성되었으며, 필체는 한나라의 예서체(漢隸體)다. 문서의 작성자는 대부분이 거연현(居延縣)의 하급 관리인 이사(吏士)들이었던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지는 않으나, 소박하고 고졸하면서도 힘이 있는 필체라고 평가받고 있다.
 +
그 종류는 당시 거연현의 관청에서 작성한 공문서, 장부(帳簿), 봉화烽火, 신부信符, 보급補給, 법률法律, 의료문서 등으로 아주 다양하다. 이는 당대 한자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 군사, 의료, 복식,<ref> 거연한간에서 언급되는 의복은 그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의복의 묘사도 형태, 제작공정, 색깔, 소속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그들의 복식문화는 물론 경제, 지역 환경을 짐작케 한다. 이곳은 본디 흉노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의복도 기본적으로 상하의가 분리된 형태로, 이동이 많은 유목민족의 특징을 반영하여 활동성과 기능성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가하면 소매가 넓고 품이 풍성하며 옷자락이 긴 한족들의 심의도 물론 확인되는데, 이는 한족과의 문화적 교류와 연관된다. 출처: 최덕경, 「거연한간에 나타난 한대 의복과 의생활」, 『역사와경계』, vol.35, 1998. </ref> 자연생태 등 사회 모습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학술자료인 셈이다.
  
중국 간쑤성 북서부의 에티나 강/에치나 강/어지나 강 유역에서 발굴된<ref> 黑河라고도 하며, 간쑤성(감숙성甘肅省) 장액시(張掖市)에서 발원하여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治州]]의 아라산맹(阿拉善盟) 에젠기(액제납기;額濟納旗)를 거쳐 거연해(거연택)로 흐른다. 여기서 ‘거연’에 ‘거연海’라는 이명이 있는 것은 이 곳이 염호이기 때문이다. 초승달 모양으로 된 하나의 호수였으나 오늘날은 동과 서 두 개로 나뉘어 있다. </ref> 한나라 시대의 1만여 편의 문서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현전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는 기원 전 102년(전한 漢武帝 태초太初 3), 가장 늦은 것은 기원 후 30년(후한 光武帝 건무建武 6)의 것이다.
 
  거연한간(居延漢簡)이 발굴된 지역은 당대 행정구역 상 거연 현에 해당하며, 전한 무제(漢武帝)가 유목민족 흉노(匈奴)를 공격, 제압하고자 설치한 하서4군(河西四郡: 무위, 장액, 주천, 돈황) 중에서도 최전방 거점으로 기능한 곳이다. 상호견제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한 무제는 기원 전 102년 이 지역을 얻은 후 지은 거연성에 감시초소와 둔전 등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이 곳을 방어하였다. 국경 방위를 위해 내지에서 이주해온 관리,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거주하며 군사, 행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작성된 행정문서를 포함한 많은 문서들을 통틀어 거연한간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 문서들은 나무나 대나무를 얇게 자른 위에 칠묵(漆墨)으로써 주로 작성되었으며, 필체는 한나라의 예서체(漢隸體)다. 문서의 작성자는 대부분이 거연현(居延縣)의 하급 관리인 이사(吏士)들이었던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지는 않으나, 소박하고 고졸하면서도 힘이 있는 필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문서들은 당시 거연현의 관청에서 작성한 공문서, 장부(帳簿), 봉화烽火, 신부信符, 보급補給, 법률法律, 의료문서 등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이는 당대 한자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 군사, 의료, 복식,<ref> 거연한간에서 언급되는 의복은 그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의복의 묘사도 형태, 제작공정, 색깔, 소속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그들의 복식문화는 물론 경제, 지역 환경을 짐작케 한다. 이곳은 본디 흉노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의복도 기본적으로 상하의가 분리된 형태로, 이동이 많은 유목민족의 특징을 반영하여 활동성과 기능성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가하면 소매가 넓고 품이 풍성하며 옷자락이 긴 한족들의 심의도 물론 확인되는데, 이는 한족과의 문화적 교류와 연관된다. 출처: 최덕경, 「거연한간에 나타난 한대 의복과 의생활」, 『역사와경계』, vol.35, 1998. </ref> 자연생태 등 사회 모습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학술자료인 셈이다.
 
  
 +
== '''2. 발견 및 소장''' ==
 +
거연한간은 크게 두 차례 발굴되어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첫 발굴조사는 1930년대 초로<ref> 1901년~1916년까지 영국 스타인(Mark A. Stein)에 의해서 중국 서북지역의 간독들이 일부 발굴되긴 했으나, 모두 중국 외부로 반출되며 당시 제대로 된 학술 연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출처: 하기태, 정한솔, 신상우, 「居延漢簡과 傷寒論의 病症 비교 연구」, 『한의병리학회』, vol,25, 2011, p.19. </ref>, 스웨덴인 베르그만(Folke Bergman)<ref> 위키백과에 내력 기재 </ref>이 이끌던 서북과학조사단(西北科學調査團)의 고고학반에 의해 조사가 시작되었다. 1930년부터 1년간의 조사로 베르그만이 카라호도 남부 보로촌에서 360여 점의 한 대 목간(木簡)을 발견한 후로 1년도 채 지나기 전 거연성 지역 성채와 봉수대 발굴로 약 1만 조각의 한나라 대 목간과 죽간(竹簡)이 발견된다.<ref> 아츠지데츠지, 『한자의 역사』, 학민사, 1994. pp.139-140. </ref>
 +
이 유물들은 중일전쟁 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회도서관에 잠시 보관된 뒤, 대만에 반환되어 현재는 [중앙연구원역사언어연구소(中央硏究院歷史言語研究所)]홈페이지 링크를 넣으니 문서오류가 계속 발생해서 작성이 안 되는관계로 이런 식으로 기재www2.ihp.sinica.edu.tw/에 소장되어 있으며,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DB로도 구축되어 있다. 또한 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에 의하여거연한간갑을편(居延漢簡甲乙編)(上․下)이라는 책으로도 출판된 바 있다. 이어 1970년대, 중화인민공화국 약 2만 점의 간독(簡牘)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이전에 출토된 거연한간과의 구분을 위하여 거연신간(居延新簡)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감숙성박물관(甘肅省博物館)<ref> 감숙성 난주시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1939년에 설립된 과학교육관에서 1943년 서북인민과학관으로, 다시 1956년 오늘날의 감숙성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거연에서 발견된 한간 외에도 돈황, 무위 등에서 출토된 한간 수만 매를 소장하고 있다.
 +
출처: 돈황학대사전편집위원회 편, 『돈황학대사전』, 서울:소명출판, 2016, p.1502. </ref>에 다수가 소장되어 있다.<ref> 이미진, 장기원, 최준용, 박성하, 김기봉, 정한솔, 하기태, 「居延漢簡과 傷寒雜病論의 치료법 비교 연구」, 『동의생리병리학회지』, vol.27, 2013. pp.19-20. </ref> 학계에서는 『거연한간』의 분석을 통한 서북 변경지역의 군사 편제, 군정조직 및 둔전제(屯田制)운영, 문서행정 연구 등을 중점적으로 행하였으나, 차츰 서북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여러 방면에서의 폭 넓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
 +
 +
 +
== '''3. 거연한간 형성의 시대적 배경''' ==
  
 
== 2. 발견 및 소장 ==
 
== 2. 발견 및 소장 ==

2018년 11월 23일 (금) 16:07 판

거연한간(居延漢簡)


1. 개요

중국 간쑤성 북서부의 에티나 강/에치나 강/어지나 강 유역에서 발굴된[1] 한나라 시대의 1만여 편의 문서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현전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는 기원 전 102년(전한 漢武帝 태초太初 3), 가장 늦은 것은 기원 후 30년(후한 光武帝 건무建武 6)의 것이다. 거연한간(居延漢簡)이 발굴된 지역은 당대 행정구역 상 거연 현에 해당하며, 전한 무제(漢武帝)가 유목민족 흉노(匈奴)를 공격, 제압하고자 설치한 하서4군(河西四郡: 무위, 장액, 주천, 돈황) 중에서도 최전방 거점으로 기능한 곳이다. 상호견제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한 무제는 기원 전 102년 이 지역을 얻은 후 지은 거연성에 감시초소와 둔전 등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이 곳을 방어하였다. 국경 방위를 위해 내지에서 이주해온 관리,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거주하며 군사, 행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작성된 행정문서를 포함한 많은 문서들을 통틀어 거연한간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 문서들은 나무나 대나무를 얇게 자른 위에 칠묵(漆墨)으로써 주로 작성되었으며, 필체는 한나라의 예서체(漢隸體)다. 문서의 작성자는 대부분이 거연현(居延縣)의 하급 관리인 이사(吏士)들이었던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지는 않으나, 소박하고 고졸하면서도 힘이 있는 필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 종류는 당시 거연현의 관청에서 작성한 공문서, 장부(帳簿), 봉화烽火, 신부信符, 보급補給, 법률法律, 의료문서 등으로 아주 다양하다. 이는 당대 한자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 군사, 의료, 복식,[2] 자연생태 등 사회 모습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학술자료인 셈이다.


2. 발견 및 소장

거연한간은 크게 두 차례 발굴되어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첫 발굴조사는 1930년대 초로[3], 스웨덴인 베르그만(Folke Bergman)[4]이 이끌던 서북과학조사단(西北科學調査團)의 고고학반에 의해 조사가 시작되었다. 1930년부터 1년간의 조사로 베르그만이 카라호도 남부 보로촌에서 360여 점의 한 대 목간(木簡)을 발견한 후로 1년도 채 지나기 전 거연성 지역 성채와 봉수대 발굴로 약 1만 조각의 한나라 대 목간과 죽간(竹簡)이 발견된다.[5] 이 유물들은 중일전쟁 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회도서관에 잠시 보관된 뒤, 대만에 반환되어 현재는 [중앙연구원역사언어연구소(中央硏究院歷史言語研究所)]홈페이지 링크를 넣으니 문서오류가 계속 발생해서 작성이 안 되는관계로 이런 식으로 기재www2.ihp.sinica.edu.tw/에 소장되어 있으며,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DB로도 구축되어 있다. 또한 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에 의하여거연한간갑을편(居延漢簡甲乙編)(上․下)이라는 책으로도 출판된 바 있다. 이어 1970년대, 중화인민공화국 약 2만 점의 간독(簡牘)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이전에 출토된 거연한간과의 구분을 위하여 거연신간(居延新簡)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감숙성박물관(甘肅省博物館)[6]에 다수가 소장되어 있다.[7] 학계에서는 『거연한간』의 분석을 통한 서북 변경지역의 군사 편제, 군정조직 및 둔전제(屯田制)운영, 문서행정 연구 등을 중점적으로 행하였으나, 차츰 서북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여러 방면에서의 폭 넓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3. 거연한간 형성의 시대적 배경

2. 발견 및 소장

  1. 黑河라고도 하며, 간쑤성(감숙성甘肅省) 장액시(張掖市)에서 발원하여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治州의 아라산맹(阿拉善盟) 에젠기(액제납기;額濟納旗)를 거쳐 거연해(거연택)로 흐른다. 여기서 ‘거연’에 ‘거연海’라는 이명이 있는 것은 이 곳이 염호이기 때문이다. 초승달 모양으로 된 하나의 호수였으나 오늘날은 동과 서 두 개로 나뉘어 있다.
  2. 거연한간에서 언급되는 의복은 그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의복의 묘사도 형태, 제작공정, 색깔, 소속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그들의 복식문화는 물론 경제, 지역 환경을 짐작케 한다. 이곳은 본디 흉노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의복도 기본적으로 상하의가 분리된 형태로, 이동이 많은 유목민족의 특징을 반영하여 활동성과 기능성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가하면 소매가 넓고 품이 풍성하며 옷자락이 긴 한족들의 심의도 물론 확인되는데, 이는 한족과의 문화적 교류와 연관된다. 출처: 최덕경, 「거연한간에 나타난 한대 의복과 의생활」, 『역사와경계』, vol.35, 1998.
  3. 1901년~1916년까지 영국 스타인(Mark A. Stein)에 의해서 중국 서북지역의 간독들이 일부 발굴되긴 했으나, 모두 중국 외부로 반출되며 당시 제대로 된 학술 연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출처: 하기태, 정한솔, 신상우, 「居延漢簡과 傷寒論의 病症 비교 연구」, 『한의병리학회』, vol,25, 2011, p.19.
  4. 위키백과에 내력 기재
  5. 아츠지데츠지, 『한자의 역사』, 학민사, 1994. pp.139-140.
  6. 감숙성 난주시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1939년에 설립된 과학교육관에서 1943년 서북인민과학관으로, 다시 1956년 오늘날의 감숙성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거연에서 발견된 한간 외에도 돈황, 무위 등에서 출토된 한간 수만 매를 소장하고 있다. 출처: 돈황학대사전편집위원회 편, 『돈황학대사전』, 서울:소명출판, 2016, p.1502.
  7. 이미진, 장기원, 최준용, 박성하, 김기봉, 정한솔, 하기태, 「居延漢簡과 傷寒雜病論의 치료법 비교 연구」, 『동의생리병리학회지』, vol.27, 2013. pp.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