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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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8월 23일 (목) 16:1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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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결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공식적 평가와 함께 작성 과정에서 화궈펑의 퇴진이 결정되었다. 이 문건에는 4천여 명의 당 간부와 이론가들이 동원됐으며 만장일치로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문건의 완성을 위해 15개월의 기간이 소요됐다고 알려졌으며 덩샤오핑도 이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의에서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을 국가의 주요모순으로 보았다. 농업합작화나 1956년 사회주의 개조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의 경우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으며, 단지 지나치게 확대된 점이 문제였다고 평가했다. 대약진운동에 관해서는 자연재해와 소련의 기술관료들이 철수한 것에 그 책임을 돌렸고,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이 그것을 일으킨 것이 과오라고 인정했지만 주요한 문제점들은 린뱌오와 4인방의 책임으로 돌렸다. 덩샤오핑은 마오의 실수나 잘못은 비판하되 혁명적 합법성과 국가 정통성을 위해서 마오의 공헌을 어느 정도 인정해줘야 된다고 강조했다. 결의는 마오의 업적을 높이 샀지만 그의 마지막 통치 20년의 잘못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여기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큰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10년에 걸친 재난으로 평가되었다."

이 결의에 앞서 1980년 10월, 당의 고급간부 4천명이 참가한 1개월에 걸친 대토론회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중국 최고의 이론가이자 마오쩌둥의 비서를 역임했던 후챠오무가 이 결의가 작성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울면서 호소할 정도로 신랄하고 직접적인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제기된 많은 직접적인 비판들은 정식으로 통과된 결의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이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지위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상당히 취약해진 상태였는데, 때문에 공산당은 이러한 상황에서 반우파투쟁이나 대약진운동 등 역사적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이와 관련해서, 1980년대 이후 실제로 이뤄진 개혁 정책이 이 결의의 평가와는 다르게 농업합작화 및 마오 시기의 사회주의 개조를 역전시키는 정책들이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호별영농제는 농업합작화의 폐기를 의미했고, 개혁 시기 이루어진 소유제의 전환 역시 이전까지의 정책에 대한 역전을 의미했다. 실제로 추진한 정책들과 반대됐던 정책들마저 그 성과를 옹호했던 이유는, 아직까지도 중국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이라는 가치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반우파투쟁에 대한 평가에서 지식인들이 탄압받으며 중국 역사 전체에 걸쳐 끼친 폐단을 축소시키고, 대약진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천만의 사망자 문제 또한 회피하였고, 문혁의 문제 역시 당-민, 관-민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회피하고 린뱌오 및 4인방 등 개인들에게만 그 책임을 돌린 것은, [마오쩌둥-사회주의 건설기-공산당] 이라는 세 가지 상징이 불가분의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결의」 또한 과거의 역사 문제에 대한 비판들을 상당 부분 회피하여 결정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은 곧 사회주의 건설기에 대한 비판이 되고, 이는 곧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되기 때문에 역사 문제를 상당 부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덩샤오핑은 "1957년까지는 대체로 마오쩌둥 동지의 영도가 옳았으나 1957년 반우파투쟁 이후부터 오류가 점점 늘어났다"고 발언한 바 있다. 덩샤오핑의 상기 발언 및 「결의」의 논리에 따르면,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으며 그것은 '마오쩌둥 동지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1957년 10월 이후 마오쩌둥이 "정풍의 4단계론"을 이야기하며 '대명대방'의 형식으로서 '군중 노선'을 제시한 것, 그리고 문화대혁명 초기에 당이 통제하고 주도하는 형태의 정치운동을 거부, 즉 당 공작조 철수를 지시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오쩌둥의 오류"는 덩샤오핑이 갖가지 역사 평가와 발언을 통해 암시하고자 하는 '공산당 혹은 개인의 지위를 수호하기 위한 대중 탄압'보다는 차라리 '쌍백방침' 내지 '정풍운동'에 연원이 닿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977년에 출판되었던 모택동 선집 5권(1958년까지의 글들을 모은 선집)이 1991년에는 출판되지 않아 현재 일반 서점에서는 마오쩌둥의 1949년까지의 글들을 모아놓은 선집만을 구할 수 있다는 점과, 1957년 반우파운동영도소조 조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반우파투쟁을 추진했던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의」의 역사 평가에는 81년 당시 공산당의 정치적인 고려가 깊숙히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더욱 증폭된다. 즉 지식인 탄압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잃어버린 20년"으로 회피하면서도 동시에 1956년까지의 마오쩌둥은 긍정함으로써 [마오쩌둥->사회주의 건설->공산당 영도]라는 가치는 수호하려는 시도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는 반우파투쟁에 있어서 공산당의 영도를 비판했던 우파들에 대한 반격은 정당했다고 평가하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한다.

참고자료

(서평)「개혁개방이 아닌 덩샤오핑 체제」(『덩샤오핑 시대의 탄생』, 안치영, 창비), 김도경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모리스 마이스너
"3차 사상투쟁의 전조? : 「건국 이후 역사문제 결의」 발표 30주년 좌담회 감상", 안치영
「마오쩌둥은 어디로 갔는가?」, 성근제, 성균차이나브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