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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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공수반(公輸般, B.C.507~?)은 춘추시대 말기 (魯)나라 사람으로 보통은 노반이라 알고 있으며 그의 본명에 대해서는 공수반(公輸般)이라는 설과 노반과 공수는 다른 사람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공수반(노반)은 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운제라는 무기를 만든 인물이며, 그 외에도 뛰어난 많은 무기들을 발명하였다. 그는 건축가이자 조각가로서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나타내어 중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노반의 능력을 칭송하는 이야기들이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외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는 묵자와의 대화가 중심인 묵자의 공수편으로도 유명하다.


노반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교체기를 살았다. 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생산력이 크게 제고되던 시기이다. 이것은 수공업의 한 단계 발전을 촉진하였다. 노반은 초나라를 위해 구름사다리, 구강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고 대패, 끌, 송곳, 곡척 등의 무수한 공구를 발명, 제조하였다고 한다. 톱과 먹통 역시 노반의 발명이라고 전해진다. 노반을 신으로 모시는 노반전조사전이라고도 불린다. 나무와 기와를 사용하는 공사에 대한 논의, 약조를 정하고 규정을 행하는 것, 공사의 가격 산정, 스승에게서 전해 받고 무리를 모으는 것 등 모두를 조사전 안에서 행한다.
노반은 비록 행업신으로 받들어지지만, 그는 인간의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는 신불神佛과는 전혀 다르다. 노반의 전설 중에서 그는 얼굴이 부드럽고 선해 보이며, 헤어져 떨어진 옷을 입고, 사방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우환과 환난을 물리치는 일에 매달리는 충실하고 후덕한 장자의 모습이다. 노반 신은 중국의 기술이 뛰어난 공인을 대표한다. 그는 노동인민의 비범하고 총명한 재주와 창조력의 화신이다.

전설과 일화

중국인들은 도교의 신들은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노반 또한 신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노반을 모시는 사당이 존재하는데 그 중 천진(天津)시의 노반 사당과 홍콩의 노반 고묘(古廟)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노반의 전설 중에서 그는 얼굴이 부드럽고 선해 보이며, 헤어져 떨어진 옷을 입고, 사방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우환과 환난을 물리치는 일에 매달리는 충실하고 후덕한 장자의 모습이다. 노반 신은 중국의 기술이 뛰어난 공인을 대표한다. 그는 노동인민의 비범하고 총명한 재주와 창조력의 화신이다. 그는 장인이나 직인의 수호신으로 극진히 칭송받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전설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중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어릴 적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노반은 15세가 될 무렵 갑자기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의 문하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입문 이후 눈에 띄게 두각을 나타내며 불과 몇 개월 만에 학문의 진수를 깨우쳤다. 그 후 전쟁이 매일처럼 일어나는 세상을 등지고 태산 남쪽에 자리 잡은 소화산(小和山)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포로동(鮑老董)이라는 인물을 만나 각종 기술을 배웠다. 노반은 조각이나 건축은 물론 배, 차, 농기구 등 여러 분야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가 만든 것 중에는 목제 솔개가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새로 허공으로 날리자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날아다니다 사흘 후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 외에도 그는 톱이나 대패 같은 목공 도구의 발명자일 뿐만 아니라 목공의 기본인 자, 즉 곡척(曲尺, 한글의 ‘ㄱ’자 모양으로 90도 각도로 만든 자)을 만든 인물로, 그 사용법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노반은 중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알려졌다.

인류 최초의 비행기, 목연

공수반은 인류 최초의 비행기라 부를 만한 목연(木鳶)이라는 것도 발명했다. 목연은 동력으로 지탱되지는 않지만 기계적 조작에 의해 하늘을 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전설이 『유양잡조』에서 『조야첨재』를 인용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노반은 재주가 신기에 가까웠다. 양주에서 사리탑을 세울 때 목연을 만들어 기관을 세 번 두드려 날게 한 다음 그것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그의 아내가 임신함에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캐묻자 아내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훗날 부친이 몰래 목연을 엿보다가 기관을 10여 번 두드려 타고서 오나라 회계산에 이르렀는데,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요괴라고 여겨 살해했다. 공수반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목연을 만들어 타고 오나라로 가서 부친의 시신을 수습했다. 공수반은 오나라 사람이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것에 원한을 품고 숙주의 성 남쪽에 나무 신선을 만들어 손가락으로 동남쪽 오나라 땅을 가리키게 했다. 이에 오나라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 오나라의 점쟁이가 점을 치고서 “오나라의 가뭄은 공수반이 일으킨 것이다.”라고 말하자 오나라 사람들이 예물을 갖추고 공수반을 찾아가 사죄했다. 공수반이 신선의 손가락을 자르니 그 달에 오나라에 큰 비가 내렸다.

멈추지 않는 목제 마차

공수반은 뛰어난 솜씨로 어머니를 위해 목제 마차와 마부를 만들었다. 마차가 완성되자 자신의 어머니를 태웠는데 한 번 달리기 시작한 마차가 되돌아오지 않아서 결국 모친을 잃었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조신의 애마를 먹어치운 노반의 사자

어느 때, 숭문구 화시대가(花市大街, 현재 북경역 남족 지역)에 조군(竈君, 중국 신화에 나오는 부엌의 신)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부근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사당이 완공되자 조군이 이 지역 사람들을 잘 보살펴줄 것이라 믿고 열심히 향을 피우고 공물을 바쳤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어려워지고, 일부 돈 있는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져갔다. 그때부터 주민들은 이때까지 내려온 조신의 기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흰 수염이 난 땜쟁이 노인이 사당 주위에서 서성거렸고 사람들이 물었다. “노인장, 뭘 하고 계시는 거요?” “아, 별거 아니야. 이 사당 앞에 철로 만든 사자상이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웃으며 그런 큰돈을 내놓는 사람은 없을 거라 했다. 하지만 이튿날 조군 사당 앞에 사자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밤에는 거리에서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그 다음날 아침에는 조신의 상 옆에 붙어 있던 애마상(愛馬像)이 사라지고 사당 앞마당에는 말의 뼈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흰 수염 노인이 노반이었고, 노반이 사자상을 만들어 사자에게 말을 먹어치우라고 시켰고 조신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쳐버려 사당 어디에도 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공물을 바쳤는데도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조신을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욕하며 그때부터 어느 누구도 사당에 참배하러 가지 않았다.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신인 조신과 대비되어 노반을 추앙했다. 이러한 노반의 일화를 통해 ‘버릴 신이 있으면, 받아들일 신도 있다.“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노반 관련 고사성어

墨翟之守 묵적지수

묵적(묵자)의 지킴이라는 뜻으로, 견고한 수비, 굳건히 성(城)을 지킴. 또는 융통성이 없이 자기의 주의, 주장, 소신 등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킴을 이르는 말.
훗날 언어 변천 과정에서 ‘묵수’로 간략화 되었다. 여기서 강조한 것은 선수(善守), 즉 ‘뛰어난 방어술’이다. 초나라송나라의 전쟁 과정 속 묵자와 공수반의 대결에서 위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공수반이 초를 위해 운제계(성벽을 타 넘을 수 있는 특수 사다리)를 만들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묵자는 공수반을 찾아갔다. 묵자는 어찌하여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은 사다리까지 만들어 아무 죄 없는 송나라 백성들을 죽이는 불의한 일을 하냐며 공수반을 반박했다. 공수반은 묵자가 초왕을 알현하도록 주선하여 곤란한 처지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묵자는 초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도적의 심보와 마찬가지라며 초왕을 설득했다. 결국 초왕은 말했다
“과인은 공수반이 운제계를 개발해 실험해 볼까 했을 뿐이오.”
“외람된 말이오나, 그 운제계가 실은 별로 쓸모없는 물건인 줄 압니다.” 그 말에 공수반이 발끈하여 왕이 보는 앞에서 모의전을 벌여 그 결과를 가지고 전쟁의 여부를 가름하기로 했다. 결국 묵자는 허리띠를 풀어 성책을 만들고, 나뭇조각으로 방패 대용의 기계를 만들어 운제계로 공격하는 공수반과 모의 전쟁을 벌였다.
이 겨룸은 공수반에게 아홉 번을 공격당했으나 아홉 번을 모두 막아내어 묵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왕은 즉시 송나라 침공 계획을 없었던 일로 해 버렸다. 결국 묵자는 초나라의 송나라 침공을 저지하려는 목적을 달성했다.


오늘날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손자병법』이 공격자 관점에서 서술된 것과는 대비적으로 묵자는 약소국의 적극적 방어 입장에서 무기 및 장비, 건축 공사, 방어 요령에 대해 연구한 고대 중국 방어 전략전술의 권위자로 칭해진다. 묵수와 손자병법은 각각 수비와 공격으로 중국 고대 군사학의 쌍벽을 이룬다. 후한경학하휴(何休)는 『춘추공양전』의 학문을 매우 좋아해 책 한 권을 쓰고 ‘공양묵수(公羊墨守)’라 이름 붙였다. 이 의미는 『춘추공양전』의 이치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심원해, 마치 묵자가 성을 지키는 것처럼 견고해 깰 수 없다는 것이다.

墨守成規 묵수성규

묵자처럼 기존의 규범을 확고히 지킨다.’라는 뜻으로 묵적지수와 유사한 의미의 성어.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위의 두 성어(묵적지수, 묵수성규)는 본래의 뜻과 달리 낡은 틀이나 규정에 매달리고 아주 고지식하다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同巧相勝 동교상승

'같은 재주로 서로 이기려 함.'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에서 가장 먼저 보인 사자성어이다. 이 성어는 본래 묵자와 공수반이 같은 기술과 지혜를 가졌음을 가리킨다.

班門弄斧(班门弄斧) 반문농부

반 씨의 문 앞에서 도끼를 놀리다.
자신의 실력은 헤아리지 않고 엉뚱하게 덤빈다는 뜻.


한서』 「서전상」에 “공수반은 도끼로 나무 기구를 만드는 데 가장 뛰어났다”고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전문가 앞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뜻의 ‘반문농부’라는 성어가 생겨났다. 중국 노나라 목공의 기예로 이름난 노반을 흉내 내어 그의 집 문 앞에서 도끼를 가지고 자기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교묘한 목수라고 허풍을 쳤던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는 아래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춘추 시대 노나라에 기술이 매우 뛰어난 공수반이라는 목수가 있었다. 그는 대들보나 기둥을 만드는데도 꽃을 새기고 문자를 파는 등 못하는 재주가 없었다. 따라서 도끼 씀이 귀신같고 기교가 신이 민망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 자루의 보통 도끼라도 그 손에서 움직이면 나무가 정교하고 곱게 하나의 기구로 다듬어져 누구도 그를 따를 자가 없어 일대 교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 젊은 목수가 하나 있었는데 조그만 솜씨를 갓 배웠음에도 항상 도끼와 수예 작품을 들고 다니며 허풍을 쳤다. 어느 날 그는 노반집 앞에 나타나서 큰 소리를 치며 자랑했다. 그의 수공예 작품을 꺼내들고 지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자랑했다. 이를 구경하던 그 지방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머리를 들어 그의 등 뒤에 있는 노반 집 대문을 쳐다보고는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그중 한 사람이 더 참지 못하고 그 젊은 목수에게 말을 꺼냈다.

"젊은 친구! 등 뒤에 있는 주택이 뉘 집인지 아오?"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는 까닭도 모른 채 대답을 했다.

"그 집이 바로 당대에 명성이 쟁쟁한 목수 노반의 주택이오, 그의 수예품이야 말로 천하의 걸작이오, 젊은 친구 한 번 들어가서 참관을 해 보구려."

청년 목수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한 뒤 노반의 기교에 대해 탄복한 나머지 머리를 떨구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솜씨에 의하여 만들어진 작품인지라 그는 지기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비범한 걸작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의 기구를 챙겨 가지고는 말없이 자리를 뜨고 말았다.


채석강변에 한 무더기의 흙이여, 采石江邊一堆土(채석강변일퇴토)
이백의 이름이 천고에 드높도다. 李白之名高天古(이백지명고천고)
오가는 사람마다 시 한 수를 남기나니 來來往往一首詩(내내왕왕일수시)
노반 문전에서 큰 도끼를 자랑하누나. 盧班門前弄大斧(노반문전농대부)

공수반(노반)과 묵자의 관계

공수반묵자는 모두 당시 중국에서 과학기술이 가장 발달한 노나라 삼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묵자를 연구할 때에는 공수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현존하는 『묵자』 53편 가운데에서 공수반은 묵자의 주요 토론 및 변론의 대상이었다. 또한 양자의 변론은 상당히 광범위해 정치, 전쟁분야는 물론 사회발전과 생산, 생활 분야까지 두루 걸쳐 있다. 이는 「소염」 「범의 「비공」 「비악」 「노문」 「공수」 및 「비성문」등에서 확인 가능하다. 묵자의 과학기술 원리 서적에서도 공수반의 실천 경험이 묵가의 기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묵경』에서 언급한 기하학 원리는 공수반이 사용한 먹줄, 삼각자, 끌 등의 도구 및 그의 실천 경험이 이론으로 승화한 것이다. 이처럼 묵자와 공수반은 아주 긴밀한 관계였다. 그들은 동년배이자 기본적으로 동업자였기 때문에 서로 대립하면서도 경쟁과정에서 상호 도움을 주고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공수반(노반)에 대한 평가

공수반은 노반이라고도 하는데 노나라의 아주 유명한 기술자였다. 그가 노나라 소공(昭公)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공수반은 조각이나 건축은 물론 배, 차, 농기구 등 여러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목제 차도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그는 중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며 그에 걸맞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공수반의 목공 기술은 아주 교묘하고 뛰어나 그의 수많은 발명품이 역사책에 수록되었고, 심지어 신화와 전설이 되었다. 예전에 목공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를 ‘노반 사부(魯般 師傅)’ 라고 받들어 모셔, 일을 하러 갈 때마다 그의 모습을 새긴 신상을 상자 속에 넣고 다니며 그 앞에 향을 피워놓고 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그는 후대의 건축가들에게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현재도 그는 장인이나 직인의 수호신으로 극진히 추앙받는 신으로써 여겨진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10대 건축물’ 중 하나인 쉬안쿵사(懸空寺)역시 공수반이 지은 것이다. 쉬안쿵사로 통하는 가장 오래된 석굴 위에는 ‘공수천교(公輸天巧)’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마노 다카야, 『도교의 신들』, 이만옥 역, 들녘, 2001.
천웨이런, 『묵자가 필요한 시간』, 윤무학 역, 374, 2018.
사마천, 『현대인을 위한 동양고전신서』, 김동환 역, 학영사, 2009.
『고사성어 따라잡기』, 구인환 역, 신원문화사, 2002.
『시험에 꼭 나오는 사자성어』, 편집부 역, 느낌이 있는 책,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