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신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우와 문학)
(관공과 화교)
18번째 줄: 18번째 줄:
 
관우는 오랫동안 문학에 회자되며 이미지를 만들어졌다. 관우가 문학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진(晉)나라 학자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송대에는 상업이 발달하며 통속문학도 발전했다. 큰 도시에는 정기적 공연을 진행하는 와자가 있었다. 이곳에서 전문 예인들이 ‘설삼분’이라는 형식의 통해 삼국시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원나라 때는 송나라의 선비들이 이민족의 통치아래 받는 차별과 열등감을 잡극이나 장편소설을 통해 표출하였다. 특히 관우를 주인공으로 한 <관운장대파치우>, <참웅호>, <관운장천리독행>, <관공참요> 등이 유행했다. 이 무렵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우의 이미지가 생겨났다. 관우는 키가 9척에 수염이 길고, 얼굴은 대추처럼 빨갛고, 눈은 봉황처럼 길고, 눈썹은 누에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원말 명 교체기에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와 원잡극, 민간의 전설 등을 모아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고, 이것이 우리에게 아직 까지 읽히고 있다.
 
관우는 오랫동안 문학에 회자되며 이미지를 만들어졌다. 관우가 문학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진(晉)나라 학자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송대에는 상업이 발달하며 통속문학도 발전했다. 큰 도시에는 정기적 공연을 진행하는 와자가 있었다. 이곳에서 전문 예인들이 ‘설삼분’이라는 형식의 통해 삼국시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원나라 때는 송나라의 선비들이 이민족의 통치아래 받는 차별과 열등감을 잡극이나 장편소설을 통해 표출하였다. 특히 관우를 주인공으로 한 <관운장대파치우>, <참웅호>, <관운장천리독행>, <관공참요> 등이 유행했다. 이 무렵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우의 이미지가 생겨났다. 관우는 키가 9척에 수염이 길고, 얼굴은 대추처럼 빨갛고, 눈은 봉황처럼 길고, 눈썹은 누에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원말 명 교체기에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와 원잡극, 민간의 전설 등을 모아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고, 이것이 우리에게 아직 까지 읽히고 있다.
  
===관공과 화교===
+
==관공과 화교==
 
청왕조가 멸망하고 신중국인 건국되며 관공신앙이 점점 쇠퇴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모든 종교활동이 금지되어 관공묘들도 문을 닫았다. 하지만 대만, 홍콩, 마카오와 화교들이 거주하는 동남아지역에서는 계속 관공신앙의 전통을 유지했다. 개혁개방 이후 종교정책에 대한 규제 완화되자 종교 사원들 부활하고 관공신앙도 다시 나타났다. 또한 정부에서는 관공을 화교들의 투자 유치를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관공을 통해 문화적, 역사적 공통점을 확인시키며 화교들의 투자를 유치하고 교류가 확대되었다.
 
청왕조가 멸망하고 신중국인 건국되며 관공신앙이 점점 쇠퇴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모든 종교활동이 금지되어 관공묘들도 문을 닫았다. 하지만 대만, 홍콩, 마카오와 화교들이 거주하는 동남아지역에서는 계속 관공신앙의 전통을 유지했다. 개혁개방 이후 종교정책에 대한 규제 완화되자 종교 사원들 부활하고 관공신앙도 다시 나타났다. 또한 정부에서는 관공을 화교들의 투자 유치를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관공을 통해 문화적, 역사적 공통점을 확인시키며 화교들의 투자를 유치하고 교류가 확대되었다.
  

2016년 5월 28일 (토) 21:23 판

관우의 생애

관우는 자는 운장으로 산서성 원청현에서 태어난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이다. 그는 160년에 태어나 219년에 전장에서 죽었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만나 의형제를 맺고 유비의 호위관이 되었다. 관우는 위나라 조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조조가 관우의 능력을 크게 사 한수정후에 봉했다. 하지만 관우는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갔다. 관우의 충의의 이미지가 나오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계속되는 전쟁 속에 관우는 조조와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조조와 손권의 협공으로 전쟁에서 죽었다.

관공 신앙의 역사

관공신앙의 기원

관공신앙은 수, 당대부터 형성되었다는 견해가 중국학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몇몇 학자는 수, 당대 이전인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혈연의식에 기반한 호족의 출현으로 촌락의 공동체 정신이 약해지며 원래 촌락에서 믿던 수호신에 대한 숭배도 감소하게 되었다. 점점 개인의 신적인 경향이 강한 성황신(도시신)이나 토지신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 대 이후 화북지역이 몰락하며 백여만명의 유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한다. 이 유민들은 형주에 자리를 잡고 정착을 위해 형주 근처에서 죽은 관우의 귀(歸)를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또한 형주가 초나라 땅이었기 때문에 초나라의 음사를 중시하고 귀신을 믿는 풍조가 관우를 신격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관공과 소금

당대에는 도교와 불교가 관공과 만나 새로운 관공신앙을 만들게 되었다. 당대 불교가 절정을 이루면서 불교의 민간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관우의 현령전설이 이용되었다. 불교 경전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로 각색되는 일이 많았다. 불교의 인과관념이 민간에 침투하여 관우는 권선징악의 신권을 가진 신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도교 또한 황실의 영속을 위한 국가 종교였다. 하지만 안사의 난(755~763) 이후 도교계가 전란을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고 이는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대중들도 따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우도 도교의 한 신으로 수용되었다. 관우는 소금과도 관련이 깊다. 관우는 산서성 출신으로 소금밀매에 관여하였다가 염상을 죽이고 도망다니던 중 유비와 장비를 만나게 되었다. 관우의 고향인 해주 지역은 염전이 많은 지역이었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염지가 마르면 사람들은 전쟁의 신, 치우(蚩尤)가 노한 것으로 생각해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까지 해주 사람들은 관우를 염신으로 여겼다. 하지만 송나라에 들어와 관우는 그 영험함을 인정받아 국가 호국의 신으로 인정된다. 이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한나라 때부터 소금은 국가가 독점해 파는 전매품이었다. 소금으로 인한 이익은 거의 국방비에 충당되었다. 인종 때 섬서성에 서하산 소금 수입을 금지하고 해주산 소금을 배급하여 서하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해주의 염전에 가뭄이 들어 국방비가 모자라자 인조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여 염전이 해갈되었다. 관우는 이후 영험성을 인정받아 공(公), 왕(王)으로 승격되었다. 국가에서 인정을 받은 관공은 더욱 인기가 높아졌고 민간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특히 사염상(私鹽商)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사염상들은 소금을 밀매하는 조직인데 소금 가격이 높을수록 암거래를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들은 해주산 소금을 다른 지역으로 밀매를 하며 관우가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즈음부터 관우는 재물을 부르는 신, 재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원대에는 송대에 이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관공신앙을 믿었다. 이민족 정권이었던 원 왕조는 한인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공신앙을 이용하였다. 원 세조 때 한림원 시독사 학경이 "영령함과 의리가 천하에 퍼지고 그 시작이 바로 이곳이다"는 글로 유비의 어짐과 관우의 의를 칭송하였다. 이후 중원지역 곳곳에 관공묘를 세우고 매년 5월 13일(관우생일)과 9월13일에 묘회(廟會)를 열었다.

재물의 신으로서 관공

송, 원대 이후 상품경제의 발달로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의 상품교환과 이익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인간의 탐욕에 대한 통제가 국가의 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인들 서로의 도덕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관공의 의의 이미지가 상인들 사이의 신뢰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유교사상 중심의 유교와 불교의 통합을 꾀하였다. 즉, 불교와 도교도 황제의 정치를 도와야 하고 신들도 위계가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정책 아래 관우는 원대에 내려진 모든 직위를 폐지하고 본래 직위인 한수정후로 되돌려 놓았다. 한수정후는 조조가 관우에게 내린 직위였는데 관우가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기위해 조조가 내린 직위 내려놓고 유비에게 돌아갔다. 이는 주원장이 이민족이 관우에게 내린 직위를 모두 원래대로 돌려놓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관우에게 명나라의 충신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주원장의 마음이 담겨있다. 명 말에는 반란과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호국과 충의를 내세워 관우뿐 아니라 유비, 장비를 모신 삼의묘를 건립했다. 만력18년 관우는 협천호국충의대제가 되었고 만력42년에는 귀, 신, 인의 삼계를 다스리는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이라는 최고의 신이 되어 관우는 강태공을 대신하여 무묘(武廟)의 주신이 되었다. 명대 중엽 이후 원거리 무역과 시장이 형성되며 상인들의 유동범위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다른 지역의 상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향토신앙이 성행하며 동시에 같은 이익집단끼리 믿는 행업신도 등장하였다. 관공은 산섬상인과 산서상인들이 주로 많이 믿었다. 산서상인들은 소금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고 나중에는 정부와 결탁해 자본을 축적하고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구성했다. 이들은 소금뿐만 아니라 금융과 유통산업에도 손을 뻗어 청대에는 전국의 금융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은 회관을 만들어 정기적이로 제사를 지내고 회원 간의 의를 다졌다. 상인들에게 관공신앙은 윤리적 규범으로서 작용했다. 이후 산서상인들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도 활동하며 관공신앙을 전파했다. 청대에는 만주족이 한족의 정치, 경제,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청의 통치자들은 관우의 충의를 선양하고 관우묘를 지음으로써 민족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통합하려하였다. 만주족은 원래 샤머니즘을 믿었는데 샤머니즘이 관공과 결합하여 궁중제사의 일부로 발전되었다.

관우와 문학

관우는 오랫동안 문학에 회자되며 이미지를 만들어졌다. 관우가 문학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진(晉)나라 학자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송대에는 상업이 발달하며 통속문학도 발전했다. 큰 도시에는 정기적 공연을 진행하는 와자가 있었다. 이곳에서 전문 예인들이 ‘설삼분’이라는 형식의 통해 삼국시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원나라 때는 송나라의 선비들이 이민족의 통치아래 받는 차별과 열등감을 잡극이나 장편소설을 통해 표출하였다. 특히 관우를 주인공으로 한 <관운장대파치우>, <참웅호>, <관운장천리독행>, <관공참요> 등이 유행했다. 이 무렵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우의 이미지가 생겨났다. 관우는 키가 9척에 수염이 길고, 얼굴은 대추처럼 빨갛고, 눈은 봉황처럼 길고, 눈썹은 누에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원말 명 교체기에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와 원잡극, 민간의 전설 등을 모아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고, 이것이 우리에게 아직 까지 읽히고 있다.

관공과 화교

청왕조가 멸망하고 신중국인 건국되며 관공신앙이 점점 쇠퇴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모든 종교활동이 금지되어 관공묘들도 문을 닫았다. 하지만 대만, 홍콩, 마카오와 화교들이 거주하는 동남아지역에서는 계속 관공신앙의 전통을 유지했다. 개혁개방 이후 종교정책에 대한 규제 완화되자 종교 사원들 부활하고 관공신앙도 다시 나타났다. 또한 정부에서는 관공을 화교들의 투자 유치를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관공을 통해 문화적, 역사적 공통점을 확인시키며 화교들의 투자를 유치하고 교류가 확대되었다.

관공 신앙에 대한 현대 중국의 노력

현대 중국 산서성 원청시에서 관공 신앙을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원청시 문화국 관계자는 관공신앙은 1850여년에 이르는 긴 역사동안 민간의 풍속이었고 중화문화의 상징이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참고문헌

  • 구은아, 중국 관공신앙 고찰 -관공신앙의 역사적 전개와 현대 관공문화를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구 제30집 pp.235~256, 2012
  • 유상규, 한⋅중 관제신앙의 사적 전개와 전승 양상, 고려대학 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2010.12
  • 이지승, 관공신앙과 산섬상인의 발전, 서울디지털대학교, 동양사학연구 제112輯, 2007
  • 조건파, [전문가 초청 특별세미나]관공신앙과 화인경제윤리,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국내학술회의 pp.31~37, 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