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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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ttyth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10월 19일 (월) 09:43 판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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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1]

인물이름 굴원(屈原)/ 현대한어 병기:[Qū Yuán]
생몰년도 B.C 340~B.C 278(추정년도)
출생지역 중국 호북성(湖北省)
생존시기 전국시대(戰國時代)
관련분야 정치, 문학
주요저서 초사(楚辭),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辭)[2]


"濯淖汚泥之中, 蟬蛻於濁穢, 以浮遊塵埃之外,

不獲世之滋垢, 皭然泥而不滓者也.推此志也, 雖與日月爭光可也."

"진흙속을 뒹굴다 더러워지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씻어내고,

먼지 쌓인 속세 밖으로 헤쳐 나와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연꽃처럼) 깨끗하여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워지지 않은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지조는 해와 달과 그 빛을 다툴 만하다." -사기(史記):「굴원가생열전」[3]


굴원의 생애

굴원은 성이 굴(屈)이고, 자(字)는 원(原)이며 어릴 때 이름은 평(平)이다. 전국(戰國) 시대 초(楚)나라 선왕(宣王) 27년에 태어났고 죽은 해는 대략 경양왕(頃襄王) 22년쯤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유능한 정치인이었으나 계속되는 중상모략에 유배를 당하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인 인물이다.


중국 호북성(湖北省) 자귀현(?歸縣) 굴원진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젊어서부터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았고 26세에 좌도(左徒:左相)라는 관직을 맡아 내정과 외교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변법을 주장할 때 정적(政敵)들의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지기도 하였다. 《이소(離騷)》는 그때의 분함을 시(詩)로 표현한 것이라고 《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굴원이 살던 시대는 초나라는 제(齊)나라, 진(秦)나라 3국이 대립하였던 때였다. 당시 굴원은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나라 회왕과 중신들은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진나라의 장의(張儀)의 전략에 속아 오히려 굴원이 실각하고 말았다. 초나라는 연횡설에 따라 제나라와 단교하였다가 진나라에 기만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진나라와 전쟁을 벌였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패하였다. 그 후 굴원이 다시 등용되어 정사를 맡게 되었고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으로 장의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이때 장의가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되었지만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장의를 석방하고 말았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장의는 진나라로 달아난 뒤였다. 이후 진나라에서 화평을 위해 초나라 왕을 진나라로 초대한다는 계략을 펴오자 굴원은 왕이 진나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왕은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고 그는 자신을 알아봐 주지 못하는 세상을 한탄하며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문학적 성취

굴원은 시인으로서, 그로부터 중국엔 문학으로 세간에 이름을 날린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초사(楚辭)란 문체를 창안했고, 이로 작품을 남겼는데,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 따르면 모두 25편(篇)에 달한다고 한다. 비록 몇몇 작품은 굴원의 저작인지가 의심이 가는 것이 있지만 그래도 굴원의 저작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다수를 점한다. 이를테면 그 유명한 《이소(離騷)》가 바로 그 예이다. 《이소》는 굴원의 가장 주요적인 작품으로, 초국의 특수한 명물들을 묘사하였다.

굴원의 작품은 충군애국(忠軍愛國)의 사상이 충만했는데, 소인배가 국가에 해를 가져오는 것을 청소하며, 군주의 혼용을 원망해 초국을 진흥시키고자 하는 포부가 이 속에 담겨져 있다. 열렬히 이상을 추구하여, 몸소 순국할 것을 감원하였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그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굴원의 작품은 개인 품격과 고양, 그리고 속세에 더렵혀지지 않고 이상을 좇으며 견정불굴의 태도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특히 《어부사(漁夫辭)》에서 이가 두드러진다.

작품소개 및 해석

이소(離騷)

《이소》는 굴원의 정치 이상을 담았고, 군소한 소인배들을 비평하여 초왕이 참언을 맹신한 것을 타격했다. 그 이상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자신은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이소》의 설상(設想)은 위로는 하늘을, 아래로는 대지에 이르는데, 위로 하늘임금(天帝)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굴원의 진지는 갈 길이 없었고, 따라서 나라와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가고자 한 생각과 자신의 옛 고향을 보고 싶은 마음에 최종적으로 이신순국(以身殉國)을 택하였다. 《이소》는 굴원이 유배 중에 쓴 작품들의 대표 작품으로, 그의 일생 중 가장 위대한 시편이라 평해지고 있다. 전편 373행, 모두 합해 2,490자, 굴원의 자신의 사상, 감정, 상상, 인격을 모두 융합시켜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체와 고도의 예술 수법으로 자신의 역사와 고달한 정치 이념을 경토하였으며, 혼용적인 왕실과 부패한 귀족에 대한 분노를 담아내었다. 《이소》는 낭만주의 색채를 가지는데 이는 특히 후반부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비흥(比興) 수법을 썼는데, 생동적인 비유는 하나의 유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애영(哀郢)

《애영》은 그의 국도의 함몰과 국가 앞날에 대한 무한한 애상을 경소하며, 국가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해지는 원인을 지적해냈다. 본편은 진국의 장수 백기가 영을 돌파하여 초왕이 진을 옮긴 해에 지어졌으며 그가 봄에 영을 떠나 하수를 지나 하포에 이르렀음을 서술하였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비통한 마음은 깊어만 갔는지, 편중에 민생의 흔들림과 무너짐, 백성의 이산(離散), 대하(大夏)가 언덕이 되어버리는, 동문이 황폐해진 이야기가 담겨 있고, 이는 확실히 국파가망의 아픔이 서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편중에 그가 차라리 고향에서 죽길 바라는 정서가 드러나 있고, 향토와 국토를 상도 하는 심후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애영》 중 표면상으로 드러난 감정은 가장 우울하고, 가장 애고(哀苦)하다.


기타

굴원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자살한 날은 기원전 278년의 음력 5월 5일로 추정된다. 그의 자살소식에 백성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배를 띄워 굴원의 시체를 수색하였다고 하며, 한편으로 물고기들이 그의 시신을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음식물을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매해 이날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굴원을 애도하고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강에 배를 띄우고 대나무 통에 찹쌀 등을 넣어 강물에 던졌다고 하며, 이것이 중국 단오절의 유래라고 한다. 한편으로 2005년 한국의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이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이는 중국 측이 '강릉단오제'의 성격을 오해함으로써 생긴 해프닝이라 볼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단오절 항목 참고. [4]

  1. 사진출처: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30270291
  2. 굴원이 지었다고 알려져있으나, 곽말약(郭沫若:중국의 고문학자)의 <굴원연구>, 마오둔(茅盾:소설가 겸 평론가)의 <초사와 중국신화> 등은 어부사는 굴원의 작품이 아니며, 굴원의 제자였던 송옥 또는 전국 시기의 초나라 사람이 쓴 것이라 주장하였다. 자세한 진위여부 및 논쟁배경은 추가예정.
  3. 서적:<사마천, 인간경영의 숲을 거닐다.> 저자: 신장용, 일송복 327p
  4. 전남일보 기사:<중국 단오절과 강릉단오제> 작성자:강다해 2015.06.22http://www.jnilbo.com/read.php3?aid=1434898800471898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