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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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鲁迅,lǔ xùn)

출생 1881.09.25
절강성 소흥부(浙江省 绍兴)
사망 1936.10.19
강소성 상하이(江蘇省 上海)
가족 동생 저우쭤런, 첫번째 아내 주안, 두번째 아내 쉬광핑
주요 작품 광인일기, 아Q정전, 야초 등등
관련 활동 문학가, 사상가


근현대 중국 국민문화의 어머니

 
— 타케우치 요시미(문학 평론가), <근대의 초극>

개요

노신(鲁迅),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본명은 주장수(周樟寿) 후에 주수인(周树人)으로 개명하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노신이란 이름은 1918년 5월 <신청년(新靑年)>에 발표한 소설 <광인일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이다. 중국 근현대사를 배우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며,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노신에 대하여 "노신의 방향이야말로, 중화 민족의 신문화의 방향"이라 평하기도 하였다(하지만 노신에 대한 마오의 고평가는 정치적인 이유를 배제하기 어렵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항목에서 다시 서술).

생애

어린시절

1881년 9월 25일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난 노신은 그 당시 지역에서 나름대로 위세 있는 사대부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화, 전설 및 소설 등을 즐겨 읽었으며 그림 모사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대갓집 출신답게 어려서부터 고서를 포함한 전통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소설을 통해 문장의 법칙을 깨우치면 경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노신의 소설 읽기를 오히려 더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노서(鲁瑞) 또한 소설과 탄사를 즐겨 읽었으며 청말 전족폐지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가장 앞장서서 전족을 풀어버렸던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노서는 농촌 출신으로 어린 노신에게 농촌 민중들의 생활과 삶을 깊이 있게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유년기의 성장배경은 노신의 민중관 형성과 전통적인 봉건제 사회의 모순점을 파악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요소라 추측할 수 있으며, 문학가로서 본인의 잠재력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유학 시절과 초기작품활동 시기

이렇듯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노신이었으나 그가 13세가 되던 시기 조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면서 집안이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노신의 집안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가산을 털어 명망 있는 한의사와 약방을 전전하였으나 별다른 진전 없이 세상을 뜨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노신은 본가를 떠나 남경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하고 곧이어 광무철로학당으로 옮겨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한다. 가끔 일부 사람들은 이 시기를 '소년 노신이 봉건제도 아래 탄압받던 민중을 구하기 위해 진리를 찾아 떠난 첫 여정'쯤으로 과대해석하는데, 노신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 <외침>에서 '내가 남경에 진출한 이유는 새로운 지방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라고 밝힌바 있다. 1902년 남경에서 졸업한 노신은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입학하여 서양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노신은 비과학적인 중의학이 아버지를 병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라 보았으며, 더욱 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서양의학을 배워 아버지처럼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중국 민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다. 하지만 의학 공부에 매진하던 시기, 학교의 '환등기'를 통해 목격한 중일전쟁의 참상(중국인 한 명이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모습을 무기력한 중국 민중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은 노신에게 각성의 계기가 된다. 노신은 이 '환등기 사건'을 통해 '민중들의 신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한들 정신이 썩어있다면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라고 판단하고 민중의 신체를 치료하는 의학에서 그들의 정신을 계몽시킬 수 있는 문학으로 방향을 급격히 선회한다.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자퇴한 노신은 한동안 일본 도쿄에 머물면서 현지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였고, 앞서 언급한 문학을 통한 민중의 계몽을 위해 외국작품의 번역과 문장 투고에 전념한다. 이 시기에 노신 최초의 문장인 <스파르타의 혼(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번역소설)>이 유학생 잡지에 투고되었으며, 그의 동생 조우주런(周作人)과 함께 문학 활동을 이어갔으나 본국의 가정형편이 어려워 지면서 노신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사범학교와 북경 임시정부의 교육부를 전전하면서 계몽 정신을 이어갔지만, 당시 중국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맛보고 허무감 사로잡혀 집에 첩거 후 고전정리에만 몰두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던 노신은 1920년대 초부터 갑작스럽게 문학창작활동에 나서는데. 이러한 노신의 심경변화에 대한 설명은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외침> 서문에서 잘 설명돼있다.

노신과 일본유학 시절부터 교류했던 친구이자 학자인 전현동(錢玄同)은 어느 날 방에서 고문 필사에 몰두하던 노신을 찾아가 <신청년> 에
글을 투고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대해 노신은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이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자 전현동은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은가.”

이러한 전현동의 반론에 노신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1918년 5월 <신청년>에 자신의 첫 번째 단편소설인 <광인일기>를 기고한다. <광인일기>를 기점으로 노신은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여 당시의 중국사회와 중국 민중들의 현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아Q정전>의 첫 회를 1921년에 기고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