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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인물정보
|이름 = 다케우치 요시미(鲁迅,lǔ xù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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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그림 = 노신 프로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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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파일:다케우치요시미.jpg]]
 
|출생일 = 1910.10.2
 
|출생일 = 1910.10.2
 
|출생지 = 일본 나가노현 미나미사쿠 군
 
|출생지 = 일본 나가노현 미나미사쿠 군
 
|사망일 = 1977.3.3
 
|사망일 = 1977.3.3
|사망지 = [[강소성]] 상하이(江蘇省 上海)
 
|가족 = 동생 [[저우쭤런]], 첫번째 아내 주안, 두번째 아내 [[쉬광핑]]
 
 
|관련 활동 = 중국학자, 문학평론가
 
|관련 활동 = 중국학자, 문학평론가
|주요 작품 = [[광인일기]], [[아Q정전]], [[야초]]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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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 [[근대적 초극]], [[루쉰]],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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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근현대 중국 국민문화의 어머니|타케우치 요시미(문학 평론가)|<근대의 초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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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문학은 행동이다. 관념이 아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행동을 소외함으로써 성립하는 행동이다. (...) 문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다.|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개요==
 
==개요==
  
노신(鲁迅),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본명은 주장수(周樟寿) 후에 주수인(周树人)으로 개명하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노신이란 이름은 1918년 5월 <신청년(新靑年)>에 발표한 소설 <[[광인일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이다. 중국 근현대사를 배우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며,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노신에 대하여 "노신의 방향이야말로, 중화 민족의 신문화의 방향"이라 평하기도 하였다(하지만 노신에 대한 마오의 고평가는 정치적인 이유를 배제하기 어렵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항목에서 다시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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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노 현(長野県)에서 태어난 중국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구제(舊制) 오사카 고교(大阪高校)를 졸업해 1931년에 도쿄 제국 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의 지나문학과(支那文学科)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4년 3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고, 1935년부터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간행하며 본격적인 중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다진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유학한다. 1960년대 안보투쟁(安保闘争) 당시 안보 개정안 강행 처리에 항의하여, 당시 몸담고 있던 도쿄 도립대학 인문학부 교수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뒤 잡지 『주고쿠(中国)』를 간행하고, 만년에는 루쉰(魯迅)의 문학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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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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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는 1910년 10월 2일 일본 나가노 현 미나미사쿠 군 우스다마치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지나(支那)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2년 8월, 외무성의 지나문화사업부에서 주관한 “조선 만주견학 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조선 각지를 거쳐 창춘까지 간 후, 베이징에서 사비로 잠깐 머문 뒤 2개월 후인 10월에 귀국하였다. 34년 3월에 졸업 논문 『위다푸(郁達夫) 연구』를 발표하며 대학 과정을 마친다. 남만주철도에 취직을 기대했던 적이 있지만, 7월 2일 정식으로 거절당했다.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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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3월 1일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오카자키 토시오(岡崎俊夫), 마쓰다 쇼(增田涉), 마쓰에다 시게오(松枝茂夫)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였다. 모임을 이어 오면서 중국문학연구회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4일 도쿄 히비야에서 저우쭤런(周作人)의 환영회를 개최했을 당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35년에는 모임의 기관지로서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창간했다. 그는 『중국문학월보』제 20호 <루쉰 특집 호>를 편집하기 위해 루쉰의 『고함(吶喊)』, 『화개집(華蓋集)』 등의 작품을 읽고 감상으로 「루쉰론」을 썼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루쉰론이기도 하며, 그의 루쉰 이해의 원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문학월보는 후에 『중국문학(中國文學)』으로 개칭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당시 팽배해 있던 일본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연구회의 유지가 점점 어렵게 되자, 1943년 연구회를 해산하고 기관지(당시 192호까지 창간됨)도 폐간했다.
  
1881년 9월 25일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난 노신은 그 당시 지역에서 나름대로 위세 있는 사대부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화, 전설 및 소설 등을 즐겨 읽었으며 그림 모사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대갓집 출신답게 어려서부터 고서를 포함한 전통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소설을 통해 문장의 법칙을 깨우치면 경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노신의 소설 읽기를 오히려 더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노서(鲁瑞) 또한 소설과 탄사를 즐겨 읽었으며 청말 전족폐지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가장 앞장서서 전족을 풀어버렸던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노서는 농촌 출신으로 어린 노신에게 농촌 민중들의 생활과 삶을 깊이 있게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유년기의 성장배경은 노신의 민중관 형성과 전통적인 봉건제 사회의 모순점을 파악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요소라 추측할 수 있으며, 문학가로서 본인의 잠재력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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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10월, 다케우치 요시미는 외무성 문화 사업부의 보조를 받기로 한 뒤, 2년간 어학연수를 하러 베이징으로 출발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41년 5월부터 『루쉰』 집필을 시작하였고, 2년 뒤 12월에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후베이성에 파견되었다. 이때 다케우치 요시미는 복잡한 심정으로 집필을 마친 『루쉰』 원고를 다케다 다이쥰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쥰의 발문과 함께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 49년 3월부터 게이오대학의 문학부에 시간강사, 도쿄도립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는데, 60년 5월 안보투쟁에 참여해 미일안전보장개정조약에 반대를 표하는 과정에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전후에는 주로 루쉰 작품의 번역, 평론과 일본문화에 관한 평론, 논문 등을 썼다. 일본 공산당을 비판, 국민문학논쟁, 안보조약변경 반대 운동 등에 참가하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식도암에 의해 1977년 3월 3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유학 시절과 초기작품활동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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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렇듯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노신이었으나 그가 13세가 되던 시기 조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면서 집안이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노신의 집안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가산을 털어 명망 있는 한의사와 약방을 전전하였으나 별다른 진전 없이 세상을 뜨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노신은 본가를 떠나 [[남경]]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하고 곧이어 광무철로학당으로 옮겨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한다. 가끔 일부 사람들은 이 시기를 '소년 노신이 봉건제도 아래 탄압받던 민중을 구하기 위해 진리를 찾아 떠난 첫 여정'쯤으로 과대해석하는데, 노신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 <[[외침]]>에서 '내가 남경에 진출한 이유는 새로운 지방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라고 밝힌바 있다. 1902년 남경에서 졸업한 노신은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입학하여 서양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노신은 비과학적인 중의학이 아버지를 병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라 보았으며, 더욱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서양의학을 배워 아버지처럼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중국 민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다. 하지만 의학 공부에 매진하던 시기, 학교의 '환등기'를 통해 목격한 중일전쟁의 참상(중국인 한 명이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모습을 무기력한 중국 민중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은 노신에게 각성의 계기가 된다. 노신은 이 '환등기 사건'을 통해 '민중들의 신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한들 정신이 썩어있다면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라고 판단하고 민중의 신체를 치료하는 의학에서 그들의 정신을 계몽시킬 수 있는 문학으로 방향을 급격히 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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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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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에 다케우치 요시미는 소집 명령을 받고 일개 병사로서 중국에 종군했다. 이때 유언의 심정으로 쓴 『루쉰』의 원고를 다케다 다이준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준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루쉰』의 본문은 루쉰의 죽음과 삶에 관해 사실에 근거한 접근을 시작으로 루쉰의 전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을 되짚고 그의 사상과 작품, 그리고 5장에서는 루쉰이 생각하는 문학과 정치의 관계, 나아가서는 계몽가, 혁명가로서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서 루쉰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루쉰』이라는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37년 7.7사변이 발생한 직후, 다케우치는 10월에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의 베이징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사람들의 거의 없는 모습이었는데, 이 광경을 본 그는 베이징의 무력함을 느꼈고 나아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전 일본 학계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문학의 궁극적인 의미와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그 구체적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케우치는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고 출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양은 서구의 근대주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서양 근대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 역시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 또는 새로운 근대의 창출을 목표로 했던 다케우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쉰을 그 가능성의 근간으로 삼아서 연구하였다. 그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 『루쉰』 인 것이다.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자퇴한 노신은 한동안 일본 도쿄에 머물면서 현지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였고, 앞서 언급한 문학을 통한 민중의 계몽을 위해 외국작품의 번역과 문장 투고에 전념한다. 이 시기에 노신 최초의 문장인 <스파르타의 혼(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번역소설)>이 유학생 잡지에 투고되었으며, 그의 동생 조우주런(周作人)과 함께 문학 활동을 이어갔으나 본국의 가정형편이 어려워 지면서 노신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사범학교와 북경 임시정부의 교육부를 전전하면서 계몽 정신을 이어갔지만, 당시 중국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맛보고 허무감 사로잡혀 집에 첩거 후 고전정리에만 몰두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던 노신은 1920년대 초부터 갑작스럽게 문학창작활동에 나서는데. 이러한 노신의 심경변화에 대한 설명은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외침> 서문에서 잘 설명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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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노신과 일본유학 시절부터 교류했던 친구이자 학자인 전현동(錢玄同)은 어느 날 방에서 고문 필사에 몰두하던 노신을 찾아가 <신청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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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경대 졸업 이후 ‘중국 문학 연구회’로 활동할 당시 불거졌던 지나학에 대한 논쟁에 있다. 지나학은 기존의 구()한학의 비과학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학문으로 학술연구의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고전을 실증적 태도로 재해석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는 지나학이 구한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생활에서의 유리, 삶에 대한 열정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책상머리의 학문’이기 때문에 “사상을 낳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논쟁에서 ‘현실의 혼탁함을 직시’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당대 일본의 역사성과 상황성에 개입하라는 요구였다.<ref>{{각주}}</ref> 그는 중국학 연구의 분야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 평론계 전체를 향해 일본 근대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주 내용은 ‘일본의 근대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 근대화의 우등생이라고 자부하던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 글에서 동양의 근대화는 서구의 침입에 의해 자신들이 ‘비서양’ 즉, ‘동양’이라는 자각을 함으로써 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근대화와 일본의 근대화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케우치가 서구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시했던 부분은 자기인식, 즉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유럽이 '의심하는 나를 의심할 수 없다'는 근대정신에 의해서 계속되는 자기 갱신의 긴장속에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성립한 유럽의 자기보존운동이 자기확장적인 형태로, 즉 동양을 포함한 비서구에 대한 침입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았다.<ref>{{각주}}</ref>
글을 투고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대해 노신은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br>
 
많은 사람이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br>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br>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자 전현동은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br>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은가.”
 
  
이러한 전현동의 반론에 노신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1918년 5월 <신청년>에 자신의 첫 번째 단편소설인 <[[광인일기]]>를 기고한다. <[[광인일기]]>를 기점으로 노신은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여 당시의 중국사회와 중국 민중들의 현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아Q정전]]>의 첫 회를 1921년에 기고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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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초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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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근대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 초극이란 1942년까지의 논의(좌담회, 문학계에 집필된 『근대적 초극』을 뜻함)을 뜻한다. 즉, 근대적 초극이란 일반적으로 성전의식에 기조가 되는 말이었으며 일본 군국주의 지배하의 총력전에 협력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근대적 초극’과 같은 전쟁에 관련된 단어 사용을 금기시 했다. 따라서 『근대적 초극』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적 초극’이라는 사상에서 서양에 대립하는 동양의 저항이라는 사상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즉, 그 사상적 배경에는 독자적인 동양주의나 일본주의를 통해 서구 근대에 대항하려고 한 근대비판이 있었음으로 단순히 전쟁협력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비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다케우치 요시미는 ‘성전의식의 기조’라는 부정적 근대적 초극의 의미에서 ‘일본주의, 아시아 주의를 통해서 서양에 대립하자’라는 좋은 사상만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사회적 투쟁과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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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적 초극』이라는 문장에서 ‘사상’과 ‘상징’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은 동양주의나 일본주의를 통해 서구 근대에 대항하려고 하는 근대비판을 의미하고, ‘상징’은 성전의식의 기조가 되는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현재 ‘근대적 초극’이라는 단어 내에는 ‘사상’과 ‘상징’이 서로 혼재되어 있으며, 다케우치는 이러한 혼재된 단어 내에서 ‘사상으로부터 이데올로기를 떼어 내는 것’ 혹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사상을 추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표현하였다.
 
 
1920년대부터 노신은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북경 여자사범대학의 학생운동에도 동참하였다. 사범대학의 학교 이사진들이 개혁성향의 학생들을 대거 퇴학시키자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교내에서 투쟁을 감행하였고, 교육부는 이를 막기 위해 학교의 폐교를 결정한다. 학생들의 투쟁을 통해 학교는 어렵게 다시 운영되고 학생들도 복귀할 수 있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노신은 비난을 받고 13년간 몸담았던 교육부에서 파면당하였다. 1920년대는 노신을 포함한 지식인 계층에게 암울했던 시기였다. 1926년 3월 18일, 학생과 시민들의 평화시위를 군벌 정부가 무력진압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혁명에 뛰어들었던 노신의 젊은 제자들 역시 희생당하였다. 3·18 사태가 벌어진 지 1주일 뒤 노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반정부 인사로 규정하고 수배령을 발포하였으며, 이로 인해 노신은 자신의 여제자인 [[쉬광핑]](許廣平)과 함께 도피생활에 들어간다. 1927년 4월 12일 국민당 정부는 [[4.12 상하이 쿠데타|상하이 쿠데타]]를 통해 백색테러를 일으켜 지식인들과 공산당원들을 대거 숙청한다. 이렇듯 1920년대에 일어난 일렬의 사건들은 노신에게 크나큰 충격과 비극 그리고 분노를 안겨주었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노신은 순수 문학창작보다는 산문과 잡문을 통해 더욱 더 직접적이며 날이 서 있는 글들로 자신의 사상을 표출하였다. 말년에 가까운 1930년에 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였으며, 1932년에는 중국민권보장동맹의 발기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평소 지병이던 천식과 폐결핵이 악화하여 중일전쟁 발발 1년 전인 1936년 10월 19일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사흘 뒤인 10월 22일에 진행되었으며, 민족혼’(民族魂)이라 쓰인 천과 함께 묘지에 묻혔다.
 
 
 
==문학==
 
  
노신이 일찍이 의학도의 길을 접고 문학창작의 길에 투신한 이유는 중국 인민들의 정신세계를 계몽시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뜻이 있어서이다. 이러한 초창기 노신의 의도와 맞물려 중국 공산당과 모택동은 노신을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포장하여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대외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 노신이란 인물을 혁명가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노신에 대한 당시의 중국 공산당 평가 역시 노신의 혁명적 성향을 과대평가하게 하지만, 문학가로서의 성취를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면이 어느 정도 존재하며, 이러한 정치적 해석 때문인지 대만에서는 노신을 좌익작가로 분류하여 80년대까지 그의 작품을 금서로 지정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중국의(정확히는 대만) 영향을 받아 노신의 계몽주의적 사상과 혁명성에 중점을 두어 편향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2000년대 이후로 중국과 한국을 막론하고 노신 그리고 그의 사상과 문학을 좀 더 입체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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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일본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며 비판을 한다. 다케우치의 입장에서 ‘근대적 초극’이라는 문제는 일본 근대의 문제가 함축되어있는 문제였는데, 사상가들은 이를 전쟁과 관련된 단어라고 치부하고 방치한 것이다. 이에 다케우치는 ‘근대적 초극’에 대한 논의의 회피가 일본 ‘사상’ 전통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자세 자체가 바로 일본 근대의 가장 큰 폐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노신을 혁명가로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수 있다. 혁명가들이란 구체제를 뜯어고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본인의 사상에 확고한 신념이 있는 자들이 대다수다. 어떻게 보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중시하는 게 혁명가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노신은 정반대의 인간이었다. 노신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였으며 생애 전반에 걸쳐 한 가지 사상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비판을 가하길 멈추지 않았다. 말년에 좌련에 가담하여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일정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중국 공산당의 노선에 동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을 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신의 성향은 그가 1925년에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노신은 ‘자신의 사상이 너무 어두워 다른 이들을 전염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사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그런데도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은 진심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노신은 혁명가보다는 사상가이자 문학가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인물해석에서도 더 접근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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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서의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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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이전의 사상가들이 쓴 글과 달리 일본의 패전 이 후에 쓰인 것으로 가장 눈여겨 점은 일본의 전후 반성과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중국과의 비교를 통하여 일본을 바라보는 점이다.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아시아, 특히 중국이 가지는 의미는 결과적으로 일본을 돌아보는 반성과 성찰을 다루고 있으며 저자가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일본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의 비교를 통해서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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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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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근대성은 시간이 지나자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은 유럽 내부에서 ‘반근대’라는 형태로 등장했다. 아울러 비(非)서구(동양)와의 접촉으로 비서구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동시에 서양 근대에 모순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근대의 극복’이란 두 가지 과제를 품고 출발하게 되었다.  
  
==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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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동양의 ‘저항’에 의해 서양이 동양의 가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동양이 서양의 근대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접한 뒤 서양은 역으로 근대적 모순의 해결법을 ‘동양적 가치’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보인다.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한 ‘되감기’이다. 여기에 대하여 다케우치는 ‘서구적인 우수한 문화가치를 보다 대규모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서양을 한번 더 동양에 의해 다시 싸안아서 역으로 서양 자신을 이쪽에서 변혁한다는 이 문화적인 되감기 또는 가치상의 되감기에 의해 보편성을 이루어냅니다. 동양의 힘이 서양이 만들어낸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높이기 위해 서양을 변혁합니다. 이것이 동과 서의 현재의 문제입니다.’라고 표현했다. 즉, 이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계사의 추구’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노신이 생전에 창작한 문학 작품의 수는 중편 1편과 단편 32편으로 중국의 대문호라는 칭호에 비해 그 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문서 상단에서 언급한 일본의 문학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역시 중국의 근현대 문학 속에서 노신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문장이 난해하다는 점을 들어 ‘노신의 소설은 재미가없다’라고까지 평가하였다. 노신 본인 또한 자신의 순수 창작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잡문과 번역 작업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신의 문학적 기교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문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강렬하고 ,깊은 인상과 여운을 심어주는 매력이 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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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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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는 동양이 유럽의 침입으로 인해 비로소 동양이란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또 이렇게 유럽에 의해 자신이 비서양 즉 동양임을 인식하게 된 동양은 자연히 ‘저항’을 통한 근대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현재 서양의 근대는 모순이 많았고, 이에 따라 동양은 ‘근대의 추구’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의 모순에 대한 저항인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의 근대화를 모두 이룩해야했다. 따라서 저항을 통해 동양은 자신을 근대화했는데, 이 저항은 ‘근대화의 모순’에 대한 저항 뿐 아니라 서양과 동양의 근대화가 다르다는 동양 근대화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런 저항이 없는 것은 동양에 대한 주체성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저항이 없는 동양은 동양이 아니라고 보았다.
  
{{틀:내용 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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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양이 유럽에 의해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그 유럽의 영향 하에서 근대화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동양의 근대화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고 정리했는데, 그것이 바로 ‘전향형’과 ‘회심형’이었다. 이것은 각각 일본형과 중국형으로 대표된다. ‘전향’이란 바로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그것의 대표인 일본은 우등생문화에 의해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근대화를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이 우등생문화는 일본이데올로기를 창출하여 일본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왔고 그것을 국민에게 주입함으로써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후의 고도성장은 그 흔들렸던 신화를 교묘히 유지해가는 것을 가능케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다케우치에게 있어서 동양은 무엇보다 저항을 갖지 않는다면 ‘동양’이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당시 일본의 사상은 주체성이 없었으며, 다케우치는 일본 또한 본인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기 위해 서구에 대해 회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가지 예로 노신의 순수창작소설 <[[광인일기]]>을 살펴보자면, 소설의 줄거리는 결국 광인의 피해망상증이 회복되어 조그마한 관직에 오르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노신은 소설의 플롯을 재배열함으로써 광인의 일기 마지막 구절이자 소설의 마지막 문구인 “사람을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한다'의 여운을 극대화 시킨다. 또한, 소설의 서장 부분을 문언문으로, 광인의 일기 부분을 백화문으로 작성하여 문장의 서술양식만으로 범인(凡人)과 광인의 뚜렷한 경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문학가 노신만의 치밀하며 독창적인 문장구성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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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유럽의 근대는 자기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고 진보의 운동을 해나가는데, 그 가공할 힘은 서양에 대해 회의한다고 생각하는 다케우치 요시미 자신의 사유까지도 유럽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로 이끌어 간다. 즉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하지 않으면 어느새 동일성의 강력한 힘은 동양을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어렵게 한다. , 다케우치 요시미의 ‘저항’이란 서양에 대한 ‘회의’와 ‘부정’의 연속으로 주체적인 ‘동양’을 지속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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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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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挣扎적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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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는 挣扎를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 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 즉, 해석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고뇌와 마주하게 하는 매체’라고 말하였다. 대립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모순적인 사물의 양극을 주체 속에 두고서 주체의 부정적 개입을 통해 새로운 주체적 정신을 기르는 것. 이 과정에서 부단히 자기를 갱신하고 자기를 창조하는 것. 즉, 상대방에게 저항과 수용을 동시에 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예시로 중국을 일본의 상대로 두고 이 둘을 비교하며 자신에 대해 단점을 고뇌하며 중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일본을 설립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挣扎적태도를 취할때에는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보면 안된다. 즉, 挣扎적태도를 취할 때는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관성이 개입이 된다면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에 화중취율의 자세를 견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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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 파시스트에게서 자신의 사상을 찾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분명 이들의 사상은 절대적으로 보았을 때 단점이 많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파시스트의 사상 속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 속에서 장점만을 취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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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서 '挣扎'를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자신의 모순을 상대방에게 대상화해서 그것과 싸우는것, 타자와의 투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는 것이다. 이런 '挣扎'라는 자기부정의 방식은 사상의 변화라는 측면보다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변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또 이것은 언제 어디서 형성되었는지를 발견하는 노력으로 다케우치를 이끌고 간다. 그것이 바로 '회심(回心)이다.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운동방식이 '挣扎'라고 한다면, 그 사상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 바로 이 '회심'이다.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학론뿐만 아니라 사상 이해의 근간이다. '회심'을 넓힌다면 국가와 민족, 아시아에 대한 이해로 확대된다.
  
 
===평가와 비판===
 
===평가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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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관련된 기억은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린 전후 일본사회의 풍토에서 ‘근대의 초극’은 잊혀져야 할 과거의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근대의 초극’ 박멸론이 우세 하던 상황에서 과감하게 『근대적 초극』을 발표하여 ‘근대의 초극’에 대한 재 평가를 요구한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초극론자’라는 수식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근대적 초극』의 내용을 보면 다케우치 요시미가 ‘근대의 초극’ 논의를 검토하면서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초극의 재평가가 아닌 근대 일본의 ‘사상’의 형성과 관련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초극’은 일본 근대의 문제가 집중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 과 진정하게 부딪혀 보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결국 일본 ‘사상’ 전통 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자세 자체가 바로 일본 근대 의 가장 큰 폐단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근대의 초극’이란 부정적인 유산 속에서 ‘사상’의 계기를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것에서 그의 ‘화중취율(火中取栗)’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언어적 의미에서 ‘초극론자’ 또는 ‘반근대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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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가 ‘근대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의 ‘근대’에 대한 인식도 원칙적으로는 ‘근대주의’ 또는 ‘역사주의’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보면 그의 시각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이해하고, 서구 근대 발전론의 시각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선진과 후진을 대립시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 ‘근대주의자’다. 하지만 동양과 아시아주의를 말하고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또 ‘반근대주의자’다. 이와 관련해 사카이 나오키(酒井 直樹)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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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요시미는 근대를 긍정적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한 비판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 비판은 그의 이러한 저항관에 유래하고 있다.이 저항관이야말로 근대를 초극하는 가능성을 단순히 믿었던 자와 다케우치를 확실히 구별해주는 것이다. 근대주의에 깊이 침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대한 유효한 비판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다케우치가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루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이와 같이 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근대라는 말이 환기하는 불확실한 느낌은 이러한 저항이 점차 산종(散種)해가는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루쉰 속에서 보았던 것에 강하게 이끌려 대면했을 때 ‘유희(戯れ)’라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신은 고전문학을 가리켜 '기만의 문학이자 아름다운 수의에 덮인 주검'이라 묘사하였는데, 항상 완벽하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 전통 희극이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을 아무런 사고와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원흉이라 평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기만 문학을 비판하면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참답고 심각하게 인생을 들여다보고 그것의 피와 살을 그려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노신 문학의 사실주의는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노신의 사실주의는 인물이나 사물의 표면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문학이나 예술이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서도 노신은 현실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있는 그대로 모델로서 사용하지 않고 여러 인물군상들과 함께 생활하고 깊이 있게 관여하여 그들의 본질적인 특징과 보편성을 잡아내어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아Q]]'라 할 수 있다. 아Q는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한 개인을 모티브 삼은 게 아니며, 노신이 고향 사람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전형화를 통해 만들어진 그 당시 중국 민중의 표상이다. 노신적 사실주의와 전형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캐릭터의 영향력은 단순히 중국 민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로 그 생명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데, 국적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Q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실례로 <아Q정전>이 연재되던 시기에 노신의 주변인들을 포함한 중국 민중은 소설 속 아Q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한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아Q의 이야기는 중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현대인들과 많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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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의 아시아와 관련된 글 중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침략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침략에는 연대감의 왜곡된 표현이라는 측면도 있다.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건전하기까지 하다’ ‘나는 무능한 사회주의자보다 유능한 파시스트를 유산으로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와 같은 구절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루아침에 변모했다.라고 시작되는 대동아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과거도 있다. 이 구절들을 보면 그는 극우주의라고 여겨진다. 이에 당시 일본 사회는 그를 ‘우익적인 아시아주의가 표면에 흘러 넘친다.’고 표현했고, 함동주씨는 이를 ‘아시아주의를 연대 의식 위주로 고찰하여 긍정적인 면을 밝히는 집착한 결과 아시아주의에 내재된 침략 이데올로기로서의 면모를 축소 해석했다. ‘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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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하여, 이것은 그의 사유방식에서 오는 오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쑨거는 그의 많은시국판단의 착오에 대해 ‘그가 자신의 입장이 정확한가에 대해 질문하고 그 잘못에 대한 반성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지식인과 달리 다케우치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역사로 진입하는가의 문제였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대동아전쟁에서 이를 옹호한 것은 대동아 전쟁을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하여 서방에 도전한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어문화학과와 다케우치 요시미==
 
 
 
===마오쩌뚱===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마오는 노신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며, 중국 혁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인물이라고까지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를 당시의 정치적인 맥락 아래서 판단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모택동과 그의 공산당원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혁명운동과 투쟁을 벌인 주체(하드웨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신적 기틀과 사상(이른바 소프트웨어)을 확립한 인물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혁명의 당위성으로 내건 공산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한 혁명적 사상은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도 생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택동 본인조차 그 방향성을 확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혁명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본인과 당에 부족한 소프트웨어, 즉 사상적인 측면을 중국 최초의 근현대 작가이자 대문호인 노신을 통해 보충하고자 하였다. 모택동은 때로 노신의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더 하거나 왜곡하였으며, 공산 혁명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노신을 공산 혁명의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작업과는 별개로 모택동 개인이 노신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해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높이 평가하였는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모택동은 오로지 노신이 중국 인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이 있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췄으며 1938년 한 강연에서 “농공 간부들이 글을 배웠다면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장을 짓는 있어서 결코 노신보다 뒤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발언은 문학가로서 노신의 성취를 깎아내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50년대 반우파 운동이 한창인 시기, ‘만약 노신이 지금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지인의 질문에 ‘감옥에 갇혀 계속 글을 쓰거나 돌아가는 사태를 보며 침묵하였을 것’이라 응대하였다. 이러한 답변 역시 모택동 노신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을 뿐 그의 문학 작품에서 표출되는 사상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뒷밭침해 주는 근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노신이 중공성립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가정해보자면, 노신 역시 마오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을 것이다. 노신은 생전에 문학이 혁명의 도구나 정치선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부정하는 인물이었으며, 또한 예술가가 본연의 예술성을 잃어가면서까지 작품 속에서 본인의 혁명이론을 실천하려 한다면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문학이라 비판하였던 적이 있다. 이러한 노신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분명 마오의 [[연안문예강화]]에도 반대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쑤쉐린(蘇雪林)===
 
 
 
노신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여류작가 쑤쉐린은(蘇雪林:북경여자사범대학 출신으로 1949년 대만으로 넘어가 중국 문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노신을 적대한 이들 중에서 가장 통렬하게 노신을 비판한 인물일 것이다. 그녀는 노신이 죽고 난 뒤 그에 대한 비판에 더 열을 가하였으며, 노신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병들어 있으며 비루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매도하였으며, 그가 좌파 패거리와 문인들로 인해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청년들이 이러한 ‘우상 만들기’를 진정으로 믿고 그의 문장을 읽으면서 정신적으로 오염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노신에 대한 쑤쉐린의 감정적 비난은 크게 2가지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전통적인 유교 문학의 계승자인 쑤쉐린의 입장에서 유교적 전통을 ‘식인행위’에 비유하며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노신은 명백한 이단이자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신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염세주의의 냄새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을 또 다른 비난의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그녀는 노신의 문장에 대해 “한 개인의 사상의 암울과 허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일이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신을 비판한 문학가나 평론가는 비단 쑤쉐린 한 명뿐만이 아니며, 노신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의 문학작품과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노신을 진정 중화전통의 혐오자이자 염세주의로 무장한 비관론자라고 보기는 힘들며,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을 아래 서술하고자 한다.   
 
 
 
====반론1: 반전통주의자인가?====
 
 
 
노신은 분명 자신의 초기 소설을 통해 유교적 전통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게끔 하는 식인의 메커니즘에 비유하였으며, 중국인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식인의 메커니즘에 안주하고 있는 식인종들이자 비굴하며 정신승리를 아편 삼는 아Q적 인간으로 묘사한 바 있다. 문장을 통한 노신의 비판은 언제나 날이 서 있으며, 때로는 지독하리만큼 무자비한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야단친다고 해서 이를 혐오라 볼 수 없듯이, 노신의 칼날과도 같은 비판을 근거하여 그가 중국문화와 중국인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혐오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신의 문학작품에서 비판과 회의적 색채에 숨겨진 또 하나의 코드는 ‘노스텔지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노신의 초기 소설뿐만 아니라 후기의 산문집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후기 산문집인 <아침 꽃 저녁에 줍다>를 노스텔지어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예로 꼽을 수 있는데, 문장에서 등장하는 어린 노신의 보모인 ‘키다리 어멈’은 민간 신앙을 믿으며 품위 없이 남의 일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인물로 노신이 자신의 문장을 통해 거침없이 비판하던 전형적인 중국인의 표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선량한 마음씨로 어린 노신을 열성적으로 보살피고 아낌없이 사랑을 준 인물이기도 하며, 문장 속 묘사를 통해 '키다리 할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렇듯 문장 속에서 드러나는 날카로운 비판만큼이나 고향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역시 노신 문학의 핵심이라 볼 수 있으며, 중국인들에 대한 노신의 통렬한 비판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아무런 자각 없이 인습의 바다에 빠져 죽는 상황에서 이들을 살리기 위한 처절한 외침이라 보는 것이 더 알맞은 해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쑤쉐린의 비판과는 달리 노신은 맹목적으로 전통을 비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노신은 후기 잡문집 <무덤>을 통해서 5.4 시기의 젊은 지식인들이 조건 없이 중국의 전통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토양에서 성장한 서구식 모델을 함부로 적용하는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때로는 노신의 애국심과 자국민에 대한 애정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도 있었는데, 그가 미국의 소설가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과 그녀의 대표작품인 <대지>를 비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지>는 펄 벅 개인이 실제로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고증에 맞게 중국 농민들의 삶을 애잔하게 묘사한 작품이며, 작가 역시 기존의 서구 중심적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난 진정으로 중국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작품에 비판을 가한 것은 어쩌면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문학창작 활동에 전념했던 노신 스스로에 대한 모순이자, 잠재돼있던 노신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표출되었던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반론2: 비관론자 또는 허무주의자인가?====
 
 
 
노신에게 낙인찍힌 비관론자라는 타이틀과는 달리 노신은 '희망'이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헛된 희망을 경계하고 스스로가 희망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노력한 인물이었다. 노신은 <[[야초]]>에서 페퇴피의 정의를 인용하여 희망을 "달콤한 말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약속을 늘어놓지만, 결국엔 부질없고 허망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의 벽 앞에서 절망하는 것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이며 희망의 본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도 같이 언급하면서, 결과적으로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삶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을 문장을 통해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신이란 인간을 평가하자면 그는 희망을 아편 삼는 낙관주의자도 아니며 더더욱이 절망 앞에서 무릎을 꿇는 비관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철인(鐵人)과도 같은 정신력으로 현실의 고통에 맞서 투쟁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그의 지독한 비판과 염세주의적 문체는 대중들로서는 지극히 어둡고 비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어쩌면 대중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과 외로움을 여과 없이 들어내어 직면하게끔 하고자 하는 것이 현실주의자 노신의 진정한 목적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작품 목록==
 
==작품 목록==
  
* 아래 표는 노신의 작품들 중 중문과 수업에서 다루었던 작품들만 따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노신 작품목록은 추가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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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표는 수업과 연계된 다케우치 요시미의 대표작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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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과의 연계
 
! 수업과의 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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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呐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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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1923년 출판, 노신의 첫번째 단편소설집. 수록된 단편으로<BR> <[[광인일기]]>, <[[고향]]>, <[[아Q정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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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출판<BR>
|중국문화사2,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중국문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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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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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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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1927년 출판, 잡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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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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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초]](野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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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초극]]
|1927년 출판, 산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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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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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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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서의 아시아]]
|1928년 출판,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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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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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참고자료==
  
중국 고전의 아이콘이 [[공자]]라면, 근대문학의 아이콘은 노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수업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2~3학년 수업에 고루고루 등장하니, 적어도 한 학기에 노신 작품 한편 정도는 접할 기회가 생긴다. 특히 2학년 2학기 수업으로 [[중국문학산책]]과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를 같이 수강한다면, 학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2 수업에서 동시에 노신에 관한 주제를 배울 수 있다. [[중국문학산책]]에서는 주로 노신의 초기 소설작품에 대해서 다루며,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에서는 주로 노신 후기의 산문과 잡문을 다룬다. 배우는 내용 자체는 겹치진 않지만, 노신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동시기에 배울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기도 하며, 또한 한쪽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 다른 수업에 도움이 되는 등 예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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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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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광덕. (2003). 타케우치 요시미(竹內好)가 지핀 ‘루쉰’(魯迅)이란 불. 진보평론, (16), 233-255.,<br>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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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의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 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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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류세종. 2004. 서평 :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3. 10, 크라운판, 220쪽.). 중국어문학, 44(0) : 607-613 <br>
1) <毛澤東과 魯迅의 관계 재검토> 안영선 저 <br>
 
2) <근대의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 <br>
 
3) <루쉰과 저우쭈어런> 쑨위 저<br>
 
4) <인물 세계사: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아Q정전’의 작가 루쉰> 박중서 저<br>
 
5) <정신계의 전사, 노신> 엄영욱 저
 

2018년 6월 16일 (토) 13:14 기준 최신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파일:다케우치요시미.jpg|200px|alt=]]
출생 1910.10.2
일본 나가노현 미나미사쿠 군
사망 1977.3.3
주요 작품 근대적 초극, 루쉰,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등등
관련 활동 중국학자, 문학평론가


문학은 행동이다. 관념이 아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행동을 소외함으로써 성립하는 행동이다. (...) 문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다.

 
—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개요

일본 나가노 현(長野県)에서 태어난 중국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구제(舊制) 오사카 고교(大阪高校)를 졸업해 1931년에 도쿄 제국 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의 지나문학과(支那文学科)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4년 3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고, 1935년부터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간행하며 본격적인 중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다진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유학한다. 1960년대 안보투쟁(安保闘争) 당시 안보 개정안 강행 처리에 항의하여, 당시 몸담고 있던 도쿄 도립대학 인문학부 교수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뒤 잡지 『주고쿠(中国)』를 간행하고, 만년에는 루쉰(魯迅)의 문학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생애

다케우치 요시미는 1910년 10월 2일 일본 나가노 현 미나미사쿠 군 우스다마치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지나(支那)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2년 8월, 외무성의 지나문화사업부에서 주관한 “조선 만주견학 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조선 각지를 거쳐 창춘까지 간 후, 베이징에서 사비로 잠깐 머문 뒤 2개월 후인 10월에 귀국하였다. 34년 3월에 졸업 논문 『위다푸(郁達夫) 연구』를 발표하며 대학 과정을 마친다. 남만주철도에 취직을 기대했던 적이 있지만, 7월 2일 정식으로 거절당했다.

이듬해 3월 1일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오카자키 토시오(岡崎俊夫), 마쓰다 쇼(增田涉), 마쓰에다 시게오(松枝茂夫)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였다. 모임을 이어 오면서 중국문학연구회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4일 도쿄 히비야에서 저우쭤런(周作人)의 환영회를 개최했을 당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35년에는 모임의 기관지로서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창간했다. 그는 『중국문학월보』제 20호 <루쉰 특집 호>를 편집하기 위해 루쉰의 『고함(吶喊)』, 『화개집(華蓋集)』 등의 작품을 읽고 감상으로 「루쉰론」을 썼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루쉰론이기도 하며, 그의 루쉰 이해의 원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문학월보는 후에 『중국문학(中國文學)』으로 개칭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당시 팽배해 있던 일본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연구회의 유지가 점점 어렵게 되자, 1943년 연구회를 해산하고 기관지(당시 192호까지 창간됨)도 폐간했다.

37년 10월, 다케우치 요시미는 외무성 문화 사업부의 보조를 받기로 한 뒤, 2년간 어학연수를 하러 베이징으로 출발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41년 5월부터 『루쉰』 집필을 시작하였고, 2년 뒤 12월에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후베이성에 파견되었다. 이때 다케우치 요시미는 복잡한 심정으로 집필을 마친 『루쉰』 원고를 다케다 다이쥰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쥰의 발문과 함께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 49년 3월부터 게이오대학의 문학부에 시간강사, 도쿄도립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는데, 60년 5월 안보투쟁에 참여해 미일안전보장개정조약에 반대를 표하는 과정에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전후에는 주로 루쉰 작품의 번역, 평론과 일본문화에 관한 평론, 논문 등을 썼다. 일본 공산당을 비판, 국민문학논쟁, 안보조약변경 반대 운동 등에 참가하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식도암에 의해 1977년 3월 3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

루쉰

1943년 12월에 다케우치 요시미는 소집 명령을 받고 일개 병사로서 중국에 종군했다. 이때 유언의 심정으로 쓴 『루쉰』의 원고를 다케다 다이준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준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루쉰』의 본문은 루쉰의 죽음과 삶에 관해 사실에 근거한 접근을 시작으로 루쉰의 전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을 되짚고 그의 사상과 작품, 그리고 5장에서는 루쉰이 생각하는 문학과 정치의 관계, 나아가서는 계몽가, 혁명가로서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서 루쉰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루쉰』이라는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37년 7.7사변이 발생한 직후, 다케우치는 10월에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의 베이징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사람들의 거의 없는 모습이었는데, 이 광경을 본 그는 베이징의 무력함을 느꼈고 더 나아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전 일본 학계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문학의 궁극적인 의미와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그 구체적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케우치는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고 출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양은 서구의 근대주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서양 근대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 역시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 또는 새로운 근대의 창출을 목표로 했던 다케우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쉰을 그 가능성의 근간으로 삼아서 연구하였다. 그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 『루쉰』 인 것이다.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경대 졸업 이후 ‘중국 문학 연구회’로 활동할 당시 불거졌던 지나학에 대한 논쟁에 있다. 지나학은 기존의 구(舊)한학의 비과학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학문으로 학술연구의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고전을 실증적 태도로 재해석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는 지나학이 구한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생활에서의 유리, 삶에 대한 열정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책상머리의 학문’이기 때문에 “사상을 낳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논쟁에서 ‘현실의 혼탁함을 직시’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당대 일본의 역사성과 상황성에 개입하라는 요구였다.[1] 그는 중국학 연구의 분야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 평론계 전체를 향해 일본 근대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주 내용은 ‘일본의 근대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 근대화의 우등생이라고 자부하던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 글에서 동양의 근대화는 서구의 침입에 의해 자신들이 ‘비서양’ 즉, ‘동양’이라는 자각을 함으로써 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근대화와 일본의 근대화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케우치가 서구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시했던 부분은 자기인식, 즉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유럽이 '의심하는 나를 의심할 수 없다'는 근대정신에 의해서 계속되는 자기 갱신의 긴장속에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성립한 유럽의 자기보존운동이 자기확장적인 형태로, 즉 동양을 포함한 비서구에 대한 침입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았다.[2]

근대적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근대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 초극이란 1942년까지의 논의(좌담회, 문학계에 집필된 『근대적 초극』을 뜻함)을 뜻한다. 즉, 근대적 초극이란 일반적으로 성전의식에 기조가 되는 말이었으며 일본 군국주의 지배하의 총력전에 협력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근대적 초극’과 같은 전쟁에 관련된 단어 사용을 금기시 했다. 따라서 『근대적 초극』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적 초극’이라는 사상에서 서양에 대립하는 동양의 저항이라는 사상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즉, 그 사상적 배경에는 독자적인 동양주의나 일본주의를 통해 서구 근대에 대항하려고 한 근대비판이 있었음으로 단순히 전쟁협력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비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다케우치 요시미는 ‘성전의식의 기조’라는 부정적 근대적 초극의 의미에서 ‘일본주의, 아시아 주의를 통해서 서양에 대립하자’라는 좋은 사상만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적 초극』이라는 문장에서 ‘사상’과 ‘상징’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은 동양주의나 일본주의를 통해 서구 근대에 대항하려고 하는 근대비판을 의미하고, ‘상징’은 성전의식의 기조가 되는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현재 ‘근대적 초극’이라는 단어 내에는 ‘사상’과 ‘상징’이 서로 혼재되어 있으며, 다케우치는 이러한 혼재된 단어 내에서 ‘사상으로부터 이데올로기를 떼어 내는 것’ 혹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사상을 추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며 비판을 한다. 다케우치의 입장에서 ‘근대적 초극’이라는 문제는 일본 근대의 문제가 함축되어있는 문제였는데, 사상가들은 이를 전쟁과 관련된 단어라고 치부하고 방치한 것이다. 이에 다케우치는 ‘근대적 초극’에 대한 논의의 회피가 일본 ‘사상’ 전통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자세 자체가 바로 일본 근대의 가장 큰 폐단이었다고 주장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다케우치 요시미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이전의 사상가들이 쓴 글과 달리 일본의 패전 이 후에 쓰인 것으로 가장 눈여겨 볼 점은 일본의 전후 반성과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중국과의 비교를 통하여 일본을 바라보는 점이다.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아시아, 특히 중국이 가지는 의미는 결과적으로 일본을 돌아보는 반성과 성찰을 다루고 있으며 저자가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일본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의 비교를 통해서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되감기

유럽 근대성은 시간이 지나자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은 유럽 내부에서 ‘반근대’라는 형태로 등장했다. 아울러 비(非)서구(동양)와의 접촉으로 비서구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동시에 서양 근대에 모순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근대의 극복’이란 두 가지 과제를 품고 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양의 ‘저항’에 의해 서양이 동양의 가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동양이 서양의 근대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접한 뒤 서양은 역으로 근대적 모순의 해결법을 ‘동양적 가치’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보인다.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한 ‘되감기’이다. 여기에 대하여 다케우치는 ‘서구적인 우수한 문화가치를 보다 대규모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서양을 한번 더 동양에 의해 다시 싸안아서 역으로 서양 자신을 이쪽에서 변혁한다는 이 문화적인 되감기 또는 가치상의 되감기에 의해 보편성을 이루어냅니다. 동양의 힘이 서양이 만들어낸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높이기 위해 서양을 변혁합니다. 이것이 동과 서의 현재의 문제입니다.’라고 표현했다. 즉, 이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계사의 추구’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저항

다케우치는 동양이 유럽의 침입으로 인해 비로소 동양이란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또 이렇게 유럽에 의해 자신이 비서양 즉 동양임을 인식하게 된 동양은 자연히 ‘저항’을 통한 근대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현재 서양의 근대는 모순이 많았고, 이에 따라 동양은 ‘근대의 추구’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의 모순에 대한 저항인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의 근대화를 모두 이룩해야했다. 따라서 저항을 통해 동양은 자신을 근대화했는데, 이 저항은 ‘근대화의 모순’에 대한 저항 뿐 아니라 서양과 동양의 근대화가 다르다는 동양 근대화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런 저항이 없는 것은 동양에 대한 주체성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저항이 없는 동양은 동양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동양이 유럽에 의해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그 유럽의 영향 하에서 근대화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동양의 근대화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고 정리했는데, 그것이 바로 ‘전향형’과 ‘회심형’이었다. 이것은 각각 일본형과 중국형으로 대표된다. ‘전향’이란 바로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그것의 대표인 일본은 우등생문화에 의해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근대화를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이 우등생문화는 일본이데올로기를 창출하여 일본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왔고 그것을 국민에게 주입함으로써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후의 고도성장은 그 흔들렸던 신화를 교묘히 유지해가는 것을 가능케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다케우치에게 있어서 동양은 무엇보다 저항을 갖지 않는다면 ‘동양’이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당시 일본의 사상은 주체성이 없었으며, 다케우치는 일본 또한 본인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기 위해 서구에 대해 회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유럽의 근대는 자기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고 진보의 운동을 해나가는데, 그 가공할 힘은 서양에 대해 회의한다고 생각하는 다케우치 요시미 자신의 사유까지도 유럽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로 이끌어 간다. 즉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하지 않으면 어느새 동일성의 강력한 힘은 동양을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즉, 다케우치 요시미의 ‘저항’이란 서양에 대한 ‘회의’와 ‘부정’의 연속으로 주체적인 ‘동양’을 지속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挣扎적태도

다케우치 요시미는 挣扎를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 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 즉, 해석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고뇌와 마주하게 하는 매체’라고 말하였다. 대립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모순적인 사물의 양극을 주체 속에 두고서 주체의 부정적 개입을 통해 새로운 주체적 정신을 기르는 것. 이 과정에서 부단히 자기를 갱신하고 자기를 창조하는 것. 즉, 상대방에게 저항과 수용을 동시에 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예시로 중국을 일본의 상대로 두고 이 둘을 비교하며 자신에 대해 단점을 고뇌하며 중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일본을 설립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挣扎적태도를 취할때에는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보면 안된다. 즉, 挣扎적태도를 취할 때는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관성이 개입이 된다면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에 화중취율의 자세를 견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 파시스트에게서 자신의 사상을 찾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분명 이들의 사상은 절대적으로 보았을 때 단점이 많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파시스트의 사상 속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 속에서 장점만을 취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리해서 '挣扎'를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자신의 모순을 상대방에게 대상화해서 그것과 싸우는것, 타자와의 투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는 것이다. 이런 '挣扎'라는 자기부정의 방식은 사상의 변화라는 측면보다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변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또 이것은 언제 어디서 형성되었는지를 발견하는 노력으로 다케우치를 이끌고 간다. 그것이 바로 '회심(回心)이다.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운동방식이 '挣扎'라고 한다면, 그 사상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 바로 이 '회심'이다.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학론뿐만 아니라 사상 이해의 근간이다. '회심'을 넓힌다면 국가와 민족, 아시아에 대한 이해로 확대된다.

평가와 비판

전쟁과 관련된 기억은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린 전후 일본사회의 풍토에서 ‘근대의 초극’은 잊혀져야 할 과거의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근대의 초극’ 박멸론이 우세 하던 상황에서 과감하게 『근대적 초극』을 발표하여 ‘근대의 초극’에 대한 재 평가를 요구한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초극론자’라는 수식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근대적 초극』의 내용을 보면 다케우치 요시미가 ‘근대의 초극’ 논의를 검토하면서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초극의 재평가가 아닌 근대 일본의 ‘사상’의 형성과 관련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초극’은 일본 근대의 문제가 집중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 과 진정하게 부딪혀 보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결국 일본 ‘사상’ 전통 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자세 자체가 바로 일본 근대 의 가장 큰 폐단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근대의 초극’이란 부정적인 유산 속에서 ‘사상’의 계기를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것에서 그의 ‘화중취율(火中取栗)’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언어적 의미에서 ‘초극론자’ 또는 ‘반근대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다케우치가 ‘근대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의 ‘근대’에 대한 인식도 원칙적으로는 ‘근대주의’ 또는 ‘역사주의’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보면 그의 시각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이해하고, 서구 근대 발전론의 시각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선진과 후진을 대립시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 ‘근대주의자’다. 하지만 동양과 아시아주의를 말하고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또 ‘반근대주의자’다. 이와 관련해 사카이 나오키(酒井 直樹)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다케우치요시미는 근대를 긍정적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한 비판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 비판은 그의 이러한 저항관에 유래하고 있다.이 저항관이야말로 근대를 초극하는 가능성을 단순히 믿었던 자와 다케우치를 확실히 구별해주는 것이다. 근대주의에 깊이 침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대한 유효한 비판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다케우치가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루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이와 같이 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근대라는 말이 환기하는 불확실한 느낌은 이러한 저항이 점차 산종(散種)해가는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루쉰 속에서 보았던 것에 강하게 이끌려 대면했을 때 ‘유희(戯れ)’라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아시아와 관련된 글 중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침략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침략에는 연대감의 왜곡된 표현이라는 측면도 있다.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건전하기까지 하다’ ‘나는 무능한 사회주의자보다 유능한 파시스트를 유산으로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와 같은 구절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루아침에 변모했다.’ 라고 시작되는 대동아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과거도 있다. 이 구절들을 보면 그는 극우주의라고 여겨진다. 이에 당시 일본 사회는 그를 ‘우익적인 아시아주의가 표면에 흘러 넘친다.’고 표현했고, 함동주씨는 이를 ‘아시아주의를 연대 의식 위주로 고찰하여 긍정적인 면을 밝히는 데 집착한 결과 아시아주의에 내재된 침략 이데올로기로서의 면모를 축소 해석했다. ‘고 평가했다. 이에 반하여, 이것은 그의 사유방식에서 오는 오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쑨거는 그의 많은시국판단의 착오에 대해 ‘그가 자신의 입장이 정확한가에 대해 질문하고 그 잘못에 대한 반성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지식인과 달리 다케우치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역사로 진입하는가의 문제였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대동아전쟁에서 이를 옹호한 것은 대동아 전쟁을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하여 서방에 도전한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작품 목록

  • 아래 표는 수업과 연계된 다케우치 요시미의 대표작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목 특징 수업과의 연계
루쉰 1944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1948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근대적 초극 1959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1961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참고자료

1)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저
2) 서광덕. (2003). 타케우치 요시미(竹內好)가 지핀 ‘루쉰’(魯迅)이란 불. 진보평론, (16), 233-255.,
3) <근대의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 저

4) 류세종. 2004. 서평 :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3. 10, 크라운판, 220쪽.). 중국어문학, 44(0) : 607-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