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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학의 교습으로 있던 시기에 단옥재는 전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는 인물인 대진(戴震)<ref>대진(1723~1777)은 안휘성 휴녕현 사람으로 단옥재보다 12세 연상이었다. 젊어서부터 정밀한 고증 논문을 저술해, 건륭제가 방대한 도서를 집성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 )를 편찬할 때 만권 서적의 교정과 해제를 담당해 고전연구의 성과를 발휘했다. 또한, 고염무 이래의 고대음운학연구를 계승, 발전시켰다.</ref>을 만난다. 대진의 좌사 역시 단옥재와 같은 전여성이었다. 대진과 단옥재는 함께 전여성을 좌사로 떠받드는 동문의 관계였으므로, 왕래가 자연스러웠다. 이 때부터 단옥재는 대진을 스승으로 받을었는데, 그 관계는 대진이 세상을 뜨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빈번히 오갔는데, 이는 편지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웠다.
 
그리고 관학의 교습으로 있던 시기에 단옥재는 전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는 인물인 대진(戴震)<ref>대진(1723~1777)은 안휘성 휴녕현 사람으로 단옥재보다 12세 연상이었다. 젊어서부터 정밀한 고증 논문을 저술해, 건륭제가 방대한 도서를 집성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 )를 편찬할 때 만권 서적의 교정과 해제를 담당해 고전연구의 성과를 발휘했다. 또한, 고염무 이래의 고대음운학연구를 계승, 발전시켰다.</ref>을 만난다. 대진의 좌사 역시 단옥재와 같은 전여성이었다. 대진과 단옥재는 함께 전여성을 좌사로 떠받드는 동문의 관계였으므로, 왕래가 자연스러웠다. 이 때부터 단옥재는 대진을 스승으로 받을었는데, 그 관계는 대진이 세상을 뜨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빈번히 오갔는데, 이는 편지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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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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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공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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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공은 단옥재보다 16살 어린 학자로, 학문적 교류 외에도 단옥재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며 친분을 다졌다. 단옥재가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설문해자]]》 주석의 진행 상태를 알 수 있다. 단옥재의 편지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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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저의 손녀가 벌써 열여덟이나 됩니다만 아직 약혼자가 없습니다. 소주(단옥재의 거주지)의 여러분들이 추천하여 주시는 연담(혼담)은 상대가 너무 부자이거나 너무 가난하여, 어느 경우든 잘 부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소주의 풍습은 대단히 사치스럽기에 저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강(유태공의 거주지)에 학문도 잘 하고 그다지 가난하지도 않은 젊은이를 아신다면, 부디 한 사람 소개하여 주십시오. 장가드는 일의 준비에 대하여 저도 가능한대로 하겠습니다. 손녀는 성격도 온화하고 책도 읽고 문자도 압니다. 저도 대단히 예뻐하고 있는 아이이므로, 부디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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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단옥재라는 위대한 학자도 손녀의 결혼을 걱정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0년 12월 10일 (목) 23:39 판

출처 : https://zh.wikipedia.org/wiki/%E6%AE%B5%E7%8E%89%E8%A3%81

생애

개요

단옥재(段玉裁, 1735~1815) 중국 청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약응(若膺), 호는 무당(懋堂)이다. 강소성(江蔬省)에서 출생했다. 1760년의 거인(擧人, 중국에서 관리에 추천되거나 등용 시험에 응시하던 자. 또는 그 합격자.)으로 사천성(四川省) 무산(巫山)현의 지현(知縣, 청나라 때의 현의 으뜸 벼슬아치)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했다. 대진(戴震)을 만나 그 제자가 되었고, 소학(小學)과 음운(音韻)에 정통하였다. 저서로 《설문해자주》 외에 《고문상서찬이(古文尙書撰異)》, 《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 《시경소학(詩經小學》이 있다.

생가

단가(段家)는 본래 하남성에 살고 있었으나, 송나라가 북방 이민족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겨 갈 때 조정과 함께 이사가, 강소성(江蔬省)에 정착했다. 강소성 진강부 금단현[1]이 단옥재의 출생지이다. 이 곳은 양자강 하류지역으로, 기후가 온난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으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단가(段家)는 대대로 학문을 해 온 집안이었다. 단가의 사람들도 누구나 다 과거를 치러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자 했다. 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의 세 단계[2]로 나뉘는데 1단계인 향시를 치르려면 부(府)나 현(縣)에 있는 국립학교의 학생이라는 자격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현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통과해야하는데, 이를 통과하면 ‘생원’이라고 불린다. 단옥재의 증조부, 조부, 부친은 모두 생원이 되었으나, 세 사람 모두 결국 향시에 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출생과 소년시절

단옥재는 옹정(雍正) 13년(1735년), 26세의 단세속과 23세의 모친 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 이 때는, 청 왕조가 극성기를 맞이한 무렵으로 사회는 완전히 안정되어 있었고, 학문도 최성기를 맞았다.

단옥재는 당시의 관습대로 대여섯살부터 조부에게서 과거를 위해 《논어》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곱 살 때 조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뜨자, 부모의 상을 입기 위해 돌아온 단세속은 친히 단옥재에게 고전의 기초를 가르치다가, 다시 금단을 떠나 자신이 연 ‘비릉연강교관사’라는 서당으로 돌아간다. 건륭(乾隆) 12년(1747년), 13세가 된 단옥재는 동시(童試)[4]에 응시해, 놀라운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렇게 단옥재는 열세 살 때에 생원이 되었따. 그는 이미 ‘사서’와 ‘오경’을 암송할 수 있는 우수한 소년이었다.

대진(戴震)과의 만남

건륭 25년(1760년), 단옥재는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향시에 통과하면 거인(擧人)의 칭호와 회시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거인’은 이미 훌륭한 예비관료로, 그 자격만으로도 지방의 고관에 임명될 수 있었다. 향시에 통과해 ‘거인’이 된 단옥재는 얼마 뒤 수도 북경으로 가서, ‘좌사[5]’인 전여성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회시의 수험 준비를 시작했다. 이 때 단옥재는 고염무(顧炎武)[6]의 《음학오서(音學五書)》를 탐독하였다. 이를 계기로 단옥재는 고대음운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거인이 된 다음해, 27세의 단옥재는 북경에서 회시에 첫 도전하지만, 불합격한다. 회시는 3년에 1회 밖에 실시되지 않아, 단옥재는 다음 기회까지 북경에 살면서 ‘경산만선전 관학’의 교습, 즉 국립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관학의 교습으로 있던 시기에 단옥재는 전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는 인물인 대진(戴震)[7]을 만난다. 대진의 좌사 역시 단옥재와 같은 전여성이었다. 대진과 단옥재는 함께 전여성을 좌사로 떠받드는 동문의 관계였으므로, 왕래가 자연스러웠다. 이 때부터 단옥재는 대진을 스승으로 받을었는데, 그 관계는 대진이 세상을 뜨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빈번히 오갔는데, 이는 편지보다는 학술논문에 가까웠다.


여담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

유태공은 단옥재보다 16살 어린 학자로, 학문적 교류 외에도 단옥재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며 친분을 다졌다. 단옥재가 유태공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설문해자》 주석의 진행 상태를 알 수 있다. 단옥재의 편지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저의 손녀가 벌써 열여덟이나 됩니다만 아직 약혼자가 없습니다. 소주(단옥재의 거주지)의 여러분들이 추천하여 주시는 연담(혼담)은 상대가 너무 부자이거나 너무 가난하여, 어느 경우든 잘 부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소주의 풍습은 대단히 사치스럽기에 저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강(유태공의 거주지)에 학문도 잘 하고 그다지 가난하지도 않은 젊은이를 아신다면, 부디 한 사람 소개하여 주십시오. 장가드는 일의 준비에 대하여 저도 가능한대로 하겠습니다. 손녀는 성격도 온화하고 책도 읽고 문자도 압니다. 저도 대단히 예뻐하고 있는 아이이므로, 부디 잘 부탁합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단옥재라는 위대한 학자도 손녀의 결혼을 걱정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청나라 행정구획으로는 성(省)의 아래에 부(府)가 있고 府의 아래에 현(縣)이 있었다.
  2. 과거시험은 각 성(省)마다 시행하는 향시, 수도 북경에서 실시하는 회시, 마지막으로 황제가 임석하여 실시하는 전시의 세 단계로 나뉜다.
  3. 모친이 단옥재를 잉태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네 마리의 양을 낳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단세속은 “양이란 ‘상(, 상서로운 징조)’을 말한다. 분명히 사내아이 넷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해몽을 했다. 예언대로 그녀는 후에 단옥재를 장남으로,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4. 동시의 정식 명칭은 학교시(學校試)로, 이 시험은 본래 국립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이었다. 학교시도 현마다 실시하는 현시, 부에서 치르는 부시, 본 시험인 원시라는 3단계로 나뉘어 있는다. 원시까지 통과해야 비로소 생원이 된다.
  5. 향시의 실시 책임자
  6. 고염무(1613~1681)는 명말청초의 대학자로, 청조 학술의 발전에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 《음학오서(音學五書)》는 정밀한 고증을 기초로 고대음운학의 기초적 연구와 방법론을 서술한 명저이다.
  7. 대진(1723~1777)은 안휘성 휴녕현 사람으로 단옥재보다 12세 연상이었다. 젊어서부터 정밀한 고증 논문을 저술해, 건륭제가 방대한 도서를 집성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 )를 편찬할 때 만권 서적의 교정과 해제를 담당해 고전연구의 성과를 발휘했다. 또한, 고염무 이래의 고대음운학연구를 계승,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