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10번째 줄: 10번째 줄:
 
}}
 
}}
 
==개요==
 
==개요==
 +
달기(妲己)는 중국
  
 
==생애==
 
==생애==

2018년 6월 26일 (화) 18:05 판

달기(妲己)
배우자 제신(帝辛)
신분 제신왕후

개요

달기(妲己)는 중국

생애

이미 발견된 갑골문 중에서는 달기의 어떠한 기록도 모두 찾아 볼 수 없다. 상나라는 여권(女权)이 주나라와 한나라에 비해 높았고, 후비(后妃)의 정치참여는 결코 비난 받지 않았으나 "정치에 간섭하다(干政)", "빈계사신(牝鸡司晨)"으로 달기를 책망하여 주나라 이후 여권을 반대하는 가치관으로 변했다.《사기(史记)》로부터 시작하여 달기의 이미지는 비로소 점차 풍부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녀의 사연은 아마도 주나라 이후 "주왕의 방탄한 생활(商纣荒淫)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형상화해낸 인물이다.
《국어(国语)》、《사기(史记)》등의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달기는 유소씨(有苏氏) 제후의 딸이었는데 제신이 유소씨를 정벌한 후에 유소씨는 달기를 제신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후 달기는 그의 비가 되기 위하여 제신을 깊게 사랑하였고, 결국 왕후로 즉위하였다. 제신은 달기의 미색에 깊게 미혹되었고 국정을 망쳤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모두 따랐으며 ~
정사에 따르면, 달기는 미색을 가지고 제신의 총애를 얻었으며 그녀를 상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간주하였다. 제신은 달기에게 좋은 것을 줄 뿐만 아니라, 그녀를'신음의 소리, 북북극의 춤, 퇴폐적인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또 백성의 재화를 수탈하여 독대를 짓고 그 안에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쌓아두었다. 같은 시기에 "술지게미가 쌓여 언덕을 이루고, 술이 흘러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매달려 수풀을 이루며, 사람들이 발가벗은 채로 서로 한가롭게 쫓아다녔다" 라는 사자성어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또한 달기는 밤을 꼬박 새고 날이 밝았음에도 문을 닫고 불을 계속 켜서 다음 밤까지 술을 마시는 놀이인 '장야지음長夜之飮)을 개발했다.(
주지육림은 제신이 그녀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으로,매번 주연을 베푸는 사람마다 3천명이 넘었고, 남녀가 나체로 그 사이를 쫓아다녔다.
신하 비간은 제신의 면전에서 간하여 말하기를 "스승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부녀자의 말로는 화가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달기는 제신을 부추겼고, 비간은 충성을 다했지만 잔인하게 죽었다.
주무왕은 제신이 잔인무도하고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왔으며 백성들의 반발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주무왕은 제신을 이용하여 주력을 파견하여 야만족을 토벌할 때 제후들을 동원하여 조가(朝歌)를 습격했다.한 번에 상인들을 죽이고 제신은 녹대(鹿台)로 달아나 스스로 분사하였고, 달기는 포로로 잡혔다. 그후 형장으로 호송되었고 참수되어 백성들에게 보여졌다.

부정적인 의혹을 품다

후난 위성 TV는 하상주단대공정의 깊은 연구 발견을 정리했는데 《사기(史记)》에 기록된 비간의 죽음에 대한 드나드는 증거가 점점 늘고 있다. 현존하는 비간의 묘 가운데에 약간의 비문이 있었는데 주왕에 비해 죽는 데에 10여년이 더 걸렸고 아마도 이는 주왕에 의해 살해당한 게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비록 확실한 증거를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의문점은 형성되었고, 요컨대 비간의 간언으로 죽은 것은 춘추 시대에 이르러 기재되었다. 이미 멀리 떨어져 있고 많은 문헌은 뚜렷한 역사 추론에 따라 분명하게 밝혔는데 주왕의 기록은 갈수록 잔혹해졌고, 새로운 내용도 많아 후손들의 부정적인 묘사는 배제할 수 없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비간은 사실 물 속에 뛰어들어가 죽었다는 것는 굴원(屈原)의 의견도 있었다.
근대 역사학자인 고사강은 일찍이 고증에 제기한 적이 있는데 비간이 주왕의 숙부인 동시에 주무왕의 외숙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특수한 신분은 그가 교전상 주나라 양측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맡게 했다. 그러나 막판 조정에 실패하여 양측은 전쟁을 시작했고 비간은 난군 가운데에서 죽었다. 상나라를 멸망 시킨 후 큰 묘를 다시 만들었는데 이것은 전쟁 후 주무왕이 비간 묘의 기록을 썼다는 해석에 부합하다.

영향

달기는 팜므파탈의 대명사가 되었다. 공융은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상나라 부대가 조가에 진입한 이후 은나라 제신이 총애하는 비인 달기가 요염하고 아름다워서 주공이 기뻐하였고 이후 주공의 시첩이 되어,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융의 이 말은 근거도 없이 단지 조비(曹丕)가 조조(曹操)군의 성을 함락시킨 후 대적 원희(袁熙)의 첩인 견씨(甄氏)를 자기 것으로 삼은 것에 빗대어 조조의 부덕함을 풍자한 것이다.

문학작품

달기는 명대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义)》중의 인물이다. 책 속의 달기의 성은 소이고, 소호의 여자를 위해 제신의 궁에 들어가는 길에 헌원(轩辕) 무덤의 세 마리의 불길한 구미호에 빙의 되었다. 구미호는 여와의 명을 받아 제신을 미혹시켜 상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후에 그녀는 인간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탐하여 제신으로 하여금 잔인한 행위를 하게 했다. 한 번의 늦겨울이 있었는데, 제신과 달기는 한 무리의 사람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그 중 노인은 추위를 타지 않았지만 젊은이는 추위를 탔다. 제신은 곧 달기에게 이게 어찌된 일인지 물었고, 달기는 부모가 젊을 때 아이를 낳는다면 태어난 아이는 기맥이 충분하여 골수가 정강이를 꽉 채우지만 늘그막에 아들을 낳으면 태어난 아이는 맥이 쇠퇴해지고, 골수가 정강이를 꽉 채우지 않으며, 중년이 되지 않아도 추위에 떨게 된다고 답했다. 제신은 믿지 못하였고, 달기는 제신에게 그들의 뼈를 깎아서 보라고 하였다. 또 하나, 달기는 한 아낙네가 임신을 한 것을 보고 남녀를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신은 이를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다투며 제신은 뱃 속 아이가 남자라 하고, 달기는 여자라 하였고, 이에 제신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 뱃속을 보게 했다. 달기는 비록 성공을 위해 상나라를 멸망케했으나 여와는 그녀가 나쁜 짓을 수없이 하여 그녀를 강태공에게(姜子牙) 건네주었고 최후에 그녀는 목이 잘렸다.

형벌

달기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은주달기조'에 보면 달기가 '포락지형(炮烙之刑)'이란 형벌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포락지형은 중국 은나라 주왕(紂王) 때, 기름칠한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던 형벌로 약칭으로 '포락'이라고도 한다. 이 당시 은나라는 노예가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해야했고 이 과정에서 백성들을 군사로 징발했어야 했는데 이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포락지형은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질 때 그것을 억누르는 공포 통치정책이었다. 달기는 죄수들이 구리 기둥을 걷다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또한 달기는 죄수들이 있는 구덩이에 전갈과 독사를 접어넣는 돈분(躉盆)이란 형벌을 만들어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