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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정은 서주 초기의 청동기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청대(淸代) 도광년간(道光年間, 1821~50)에 주(周)를 건국한 부족이 본래 살았던 기산(岐山:섬서성 소재)의 기슭에서 발견된 정(鼎)인데, 높이 102.1cm, 상부의 구경 78.4cm, 무게 153.5kg인 웅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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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정은 서주 초기의 청동기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청대(淸代) 도광년간(道光年間, 1821~50)에 주(周)를 건국한 부족이 본래 살았던 기산(岐山:섬서성 소재)의 기슭에서 발견된 정([[]])인데, 높이 102.1cm, 상부의 구경 78.4cm, 무게 153.5kg인 웅장한 것이다.
 
현재 알려져 있는 주대(周代)의 정(鼎) 가운데에는 가장 큰 것인데, 중일전쟁으로 수많은 문물이 전화를 피해 골짜기로 옮겨졌을 때도 대우정은 너무 무거워 땅 속에 묻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파내었다는 일화가 있다.<ref>아츠지 데츠치, 『한자의 역사』, 학민사, p.78</ref>
 
현재 알려져 있는 주대(周代)의 정(鼎) 가운데에는 가장 큰 것인데, 중일전쟁으로 수많은 문물이 전화를 피해 골짜기로 옮겨졌을 때도 대우정은 너무 무거워 땅 속에 묻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파내었다는 일화가 있다.<ref>아츠지 데츠치, 『한자의 역사』, 학민사, p.78</ref>
  

2020년 12월 22일 (화) 02:51 판

대우정(大盂鼎)

대우정은 서주 초기의 청동기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청대(淸代) 도광년간(道光年間, 1821~50)에 주(周)를 건국한 부족이 본래 살았던 기산(岐山:섬서성 소재)의 기슭에서 발견된 정()인데, 높이 102.1cm, 상부의 구경 78.4cm, 무게 153.5kg인 웅장한 것이다. 현재 알려져 있는 주대(周代)의 정(鼎) 가운데에는 가장 큰 것인데, 중일전쟁으로 수많은 문물이 전화를 피해 골짜기로 옮겨졌을 때도 대우정은 너무 무거워 땅 속에 묻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파내었다는 일화가 있다.[1]

서주의 청동기

은(殷)이 망하고 세워진 주(周)나라는 본래 서쪽에서 유목과 농경에 종사하던 이들이었고, 문화정도도 높지 않았으므로 은(殷)을 섬긴 여러 부족들을 그대로 자기 백성으로 예속시키고 그들을 통해 문자사용과 청동기 제작 등 은의 높은 문화를 흡수하고 계승했다. 서주(西周) 시대의 청동기에는 정(鼎)이나 대(敦) 등 음식물을 담는 도구가 중심이 되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주대(周代)의 명문(銘文)

신성성(神聖性)의 상실

대우정(大盂鼎)의 명문(銘文)

제작 시기는 주(周)가 건국되고, 곧이어 싸움도 멎고 나라 힘이 가장 충실했던 강왕(康王) 시대(B.C 1000년 경)로 추정되며, 시대의 기풍을 반영했는지 그것은 정말 힘이 넘쳐흘러 보는 이를 압도하는 박력있는 정(鼎)이다.

대우정(大盂鼎)의 내벽에는 거침없는 필치로 쓴 19행, 모두 291자가 되는 긴 글이 새겨져 있으며, 강왕이 뛰어난 장군이었던 우(盂:사람 이름)에게 조상의 관직을 잇도록 명하고, 수레, 말, 옷가지 등과 함께 모두 1,700명이 넘는 백성을 준 기념으로 우(盂)가 이 정(鼎)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천명사상(天命思想)

이 명문(銘文)은 실제로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책명(策命:관직이나 토지를 주는 사령)을 그대로 실어놓은 것이므로 역사학적인 면에서는 서주(西周) 초기의 역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이 명문이 지닌 자료적인 가치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편으로는 중국사상사의 중요한 주제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이 나타난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사상사 연구에서도 값진 것이다.

  1. 아츠지 데츠치, 『한자의 역사』, 학민사,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