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의 한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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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arbfl0204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1일 (화) 22: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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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건국

몽골 왕조의 중국 통치 시점이 되는 창업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가장 이른 견해는 1260년 계승분쟁이 끝나고 쿠빌라이 칸이 몽골과 화북의 지배권을 획등한 때이다. 10여 년 후인 1271년 쿠빌라이는 "기원"을 의미하는 중국식 명칭 "원(元)"이라는 왕조를 창업하였다. 송의 마지막 황제가 죽은 것은 1279년이었다. 원왕조 통치의 시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몽골이 강남을 완벽하게 정복한 1276년이이다.

쿠빌라이 시대

강남을 정복한 직후 몽골은 다시 한 번 중국을 통치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야율초재는 이미 중국과 몽골의 통치상의 중대한 차이, 즉 조세와 관료 충원의 차이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일반적으로 도시를 함락시킨 후 전리품을 획득했기 때문에, 세율에 맞추어 매년 징수하는 중국의 방식이 그들에게는 낯설었다.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료를 충원하는 중국의 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몽골은 자식이 부친의 지위를 물려받는, 혈연에 기반하여 관리를 충원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또 몽골 인은 문맹이기 때문에 시험을 볼 수도 없었다. 정복전을 벌일 당시 몽골은 문자가 없었고, 따라서 언어는 문자로 기록될 수 없었다. 칭기즈 칸, 그의 아들 우구데이, 손자 뭉케 모두 읽고 쓸 줄을 몰랐다. 칭기즈 칸은 위구르 문자로부터 새로운 자모를 만들어 몽골족이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인구구분

쿠빌라이와 그의 신하들은 이원적 통치를 했던 거란의 전례에 따라서 몽골 통치하의 비중국인과 중국인 사회를 분리하여 다스리고자 하였다. 몽골은 중국 내의 인구를 몽골 인, 색목인, 북인(北人), 남인(南人)의 네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몽골은 네 개의 종족집단으로 인구를 구분함으로써 지방사회를 고정화시키고, 각 호구에 다양한 업무를 할당하였다. 대부분 농민으로 분류되었지만, 일부는 황제에게 바칠 물품을 생산하기 위한 전문적인 직업이 부과되었다. 중국인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몽골 인과 중국인 사이의 결혼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이 통혼하였다. 원대를 통해서 겨우 200만명밖에 되지 않았던 몽골 족은 관리로 일할 남성이 충분하지 않아서 색목인을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들은 고위직에 비한족과 한족을 두명씩 나란히 임명하였다.

쿠빌라이 사망 이후

1294년 쿠빌라이의 사망 이후 장기간의 정치적 불안정에도 전쟁이나 반란은 없었다. 선출제도의 유산으로 인해서 몽골 황실에는 후계자를 결정하는 안정된 수단이 없었다. 1294년에서 1333년까지 9명의 황제가 통치하였지만 오직 한 명의 황제, 즉 아유르바르와다(인종, 1313-1320 재위)만이 후계자를 지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의 통치기간은 후계자 다툼에서 잠시 동안의 휴식기였다. 1323년 그의 아들이 사망하자 다시 혼전이 시작되었다. 나머지 여덟 황제의 권력은 무력으로 전복되었고, 그 중 2명은 살해되었다. 9명의 황제 모두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들의 부족 전통에 따르면, 황제는 정기적으로 황실의 측근들에게 재물을 분배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평화로 인해서 부족민들에게 나누어줄 전리품이 없었다. 그 대신에 황제들은 장기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폐를 마구 찍어냈다. 송대에 발전된 시장경제는 몽골 통치하에서도 계속 성장했지만, 원왕조 말까지 가치가 하락한 지폐를 계속 찍어냄으로써 지폐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감은 약화되었고, 사람들은 거래할 때 다시 동전과 은을 사용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

아유르바르와다 황제는 소년 시절에 한족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중국의 전통 학문에 대한 애정을 그에게서 배웠다. 관리선발에 대해서 처음 내린 법령 중 하나가 과거시험을 다시 치르는 것이었다. 황제와 신하들은 시험과목을 논의하였다. 만약 그들이 금나라의 전례를 따른다면, 문학적 재능과 경전에 대한 후보자들의 지식을 시험해야 하였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학자집단은 경전에 대한 지식, 즉 주희가 주석을 단 사서『四書』만을 시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문학적인 문장을 없애자고 역살하였으며, 이들 신유학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