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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덩샤오핑의 정권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중국인민에게 번영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을 시기에 그가 했던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웨이징성 체포로 시작하여 그 후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정권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중국인민에게 번영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을 시기에 그가 했던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웨이징성 체포로 시작하여 그 후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모리스마이스너 지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이산, 2004
+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모리스 마이스너 <br>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모리스 마이스너 <br>『덩샤오핑 : 개혁개방의 총 설계자』, 박형기<br>『개혁과 개방』,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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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5일 (화) 22:01 판

덩샤오핑 (등소평)
(중국어 간체: 邓小平, 정체: 鄧小平)

출생 1904년 8월 22일
청나라 쓰촨 성 광안 시
사망 1997년 2월 19일 (92세)
임기 1981년 ~ 1989년 11월 7일
학력 중산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졸업
관련 활동 정치

생애 전반

덩샤오핑(중국어 간체: 邓小平, 정체: 鄧小平) , 1904년 8월 22일 ~ 1997년 2월 1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중국 공산당의 소위 2세대의 가장 주요한 인물이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국가원수직에 있었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생애 초,중반

덩샤오핑은 1904년 청나라 쓰촨 성 광안의 한 마을에서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1920년에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가서 공부한다. 유학생 시기에 덩샤오핑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며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이 때 저우언라이를 만난다. 1926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소련 유학시절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재정 부장·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실각과 복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실권파의 제2인자"로 낙인찍혔고,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장시(江西) 성의 트랙터 공장에 노동자로 파견되었다. 1973년 저우언라이의 보호 아래, 그리고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은 후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고위직에 즉시 복귀했다. 머지않아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지만, 저우언라이 사후 1976년 4월의 천안문사건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그러나 1976년 9월 마오쩌둥의 죽음과 10월 '사인방의 몰락'이 발생하면서 덩샤오핑이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후 1977년 당 원로들의 요구로 인해 실각 이전의 자리로 공식 복귀하였다.

집권 시기

덩샤오핑은 1978년 말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정권을 잡은 후에 남아있던 범시파는 대부분 1980년대 2월에 개최된 11기 5중전회에서 숙청하는 것으로 권력을 잡기 위한 숙청을 시작한다. 이들 중에는 사인방을 체포한 부대의 사령관인 왕둥싱, 천용구이가 있다. 또한 화궈펑을 정치적으로 매장하였다. 그 방식은 예의를 갖추었으나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료되었다. 실권이 덩샤오핑에게 넘어간 뒤에도 화궈펑은 공식 직책을 유지했지만 덩샤오핑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격시킨 자오쯔양을 위해 국무원 총리직을 사임해야했다. 또한 1980년 덩샤오핑이 당의 지도기관으로서 당 중앙 서기를 부활시켰을 때 화궈펑의 공산당 주석직은 완전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1981년 6월 화궈펑은 유명무실한 당 주석직에서 사퇴한다.

시행 정책

덩샤오핑은 1978년 말 사회주의 민주를 수호한다는 깃발을 들고 권좌에 오른다. 이로 인해 1958년 제8차 당대회에서 제출되었으나 마오에 의해 무시받았던 덩샤오핑의 이론은 부활한다. 이는 신속한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적 목표에 그 외의 모든 사회적 이해관계를 조속시키고 자본주의적 시장을 비롯한 효과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으로 1980년대에 사회주의 초급단계 이론으로 정리된다. 덩샤오핑의 경제개혁계획은 시장조절과 계획조절을 결합하라는 제11기 3중전회의 모호한 권고의 형식으로 정식 승인되어 1979년에 시작되었다. 이 후에 개방정책을 활발히 진행한다. 그로인해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의 재통일의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 대내 개혁
    • 인민공사 폐지: 공동생산 공동분배로 이루어지는 인민공사 하에서는 생산력이 올라갈 수 없었다. 따라서 덩샤오핑은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일부 유휴지를 개인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산된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도록 했다.
    • 농업생산 책임제 실시: 덩샤오핑은 각 농가에 토지를 할당해 준 뒤 농업생산 책임제를 실시했다. 농민들은 국가와 개별 계약을 통해 국가에 곡식을 팔았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 개인의 이윤 동기를 자극한 이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인민공사 폐지 이후 중국의 농업생산량은 급증했다. 1953~1978년 농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3.2%에 불과했으나 1979~1985년에는 9.4%로 증가했다. 식량생산 증가율 또한 1978년 이전 기간에는 2.4%였으나 이후 7년동안 4.9% 상승하며 1984년에는 식량 수출국 대열에 올랐다.
    • 향진기업 제도 도입: 향진기업은 농촌은 농업을, 도시는 공업을 담당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한 것으로 농촌의 부업을 장려함으로써 농가의 소득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향진기업 발달은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을 억제하고 농촌의 현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 개체호: 도시에는 개체호(個體戶) 개념을 도입했다. 개체호는 중국의 도시지역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7명 미만의 자영업자들을 말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본주의의 찌꺼기'로 비판의 대상이었으나 개체호는 개혁개방과 함께 부활했으며, 정부의 시장경제 활성화 정책에 따라 그 수가 급증했다. 국영기업에서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물품의 제조와 판매업, 서비스업, 요식업 등이 중심업종을 이룬다. 개체호의 출현은 개인의 자본과 노동력을 토대로 벌어들인 소득을 본인이 직접 지배하는 경제형식으로서, 개혁개방 초기에 중국이 달려 나갈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도였다. 개체호는 개혁개방 이후 20여 년이 지난 1999년에 3160만개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으나 최근에는 기업들이 집단화하면서 그 수가 약간 줄고 있다.


  • 대외 개방
    • 덩샤오핑은 미국과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수교를 맺었다. 1978년 한때 중일전쟁을 벌인 일본과 중일 우호조약을 맺었고, 1979년 미국을 방문해 미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28일부터 2월 5일까지 미국을 방문해 국교정상화에 서명하고, 미국에게서 관세최혜국 지위를 얻어냈다.
    • 특구 설치: 중국의 특구 설치는 점개방-선개방-면개방-전방위개방 단계로 진행됐다. 덩샤오핑은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남연해 지역부터 단계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해 내륙 서부까지 완전히 개방하는 방법을 썼다. 점개방 단계는 1979~1983년 시기로,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와 푸지엔성의 샤먼에 이른바 4대 경제특구가 설치됐다. 덩샤오핑은 1984년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이들 특구를 순시했다. 남방순시에서 돌아온 덩샤오핑은 경제특구 확대를 촉구했다. 이후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진행된 선개방 단계에서 공산당은 14개 연해지역의 주요 항만도시를 개방도시로 지정했고, 양자강삼각주, 주강삼각주를 개방지역으로 지정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계속된 면개방 단계에서 산동반도 요동반도 및 환발해만권을 개방지역으로 지정했으며, 중국 최남단 섬인 하이난(海南)도를 성으로 승격해 다섯 번째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전방위개방은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서부 내류기역도 개방한 것으로, 이로써 중국 대륙은 완전히 개방됐다.


  • 4개 현대화
저우언라이가 창시한 개념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의 상징이자 경제성장의 초석이 된 정책이다.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당시 공식적인 중국 주요 경제 정책이 되었다.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의 개혁파들은 회의에서 '대규모 대중적 계급투쟁'의 종결을 선언함으로써 계급투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마오쩌둥 시대의 노선과의 결별을 명확히 하고 4개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새 시대의 총체적 과업으로 규정했다.


  • 3보주: 三步走(산바오조우)는 덩샤오핑이 1987년 밝힌 3단계 중국경제 발전론으로, 溫飽(원바오)-小康(샤오캉)-大同(다퉁)로 나아가는 발전단계를 말한다.
    • 溫飽(원바오):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는 뜻으로 인민의 먹고 입는 문제 해결, 즉 초보적인 단계부터 해결한다는 뜻이다. 20세기 말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4배로 끌어올려 1000달러를 넘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
    • 小康(샤오캉): "생활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생활 수준을 중류 정도로 이끌어 올리고자 했다. 공산당 창건 100주년인 2021년까지 국민소득을 다시 2배로 끌어올려 중진국에 진입하고자 했다. [2]
    • 大同(다퉁): "크게 발전하여 모두가 잘 사는 사회"라는 뜻으로 중국의 현대화를 이룩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하고자 했다.


  • 1개의 중심, 2개의 기본점
14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은 국가의 목표로 하나의 중심, 두개의 기본점으로 설정하였다. 하나의 중심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원리로 한 경제개발이고, 두개의 기본점은 '개혁개방의 지속'과 맑스레닌주의,모택동 사상의 견지, 인민민주독재, 공산당의 영도, 사회주의 노선이라는 4개 기본원칙의 견지를 말한다. 이러한 기본 원칙은 보수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개혁파들 역시 개혁개방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충격을 수반하기에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도력과 정치 사회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던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실사구시 원칙에 입각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의 주장은 끊임없는 현상의 변화 가능성으로 인하여 많은 반발을 일으켰고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에 4항 기본원칙을 지정하여 개혁 개방의 한계선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

이러한 덩샤오핑의 정권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중국인민에게 번영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을 시기에 그가 했던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웨이징성 체포로 시작하여 그 후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참고자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모리스 마이스너
『덩샤오핑 : 개혁개방의 총 설계자』, 박형기
『개혁과 개방』, 조영남

  1. 원바오 단계는 80년대 말 완료했다.
  2. 2002년 11월 열린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는 '정치보고'를 통해 지속적인 개혁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 정책 추진으로 중국이 샤오캉 사회에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당시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를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