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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사람으로 신도(信都) 광천(廣川)(지금의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경현景縣) 출신이다.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공부했고 [[한나라 경제]](景帝) 때 박사가 되었다.[[한 무제]](武帝)는 즉위 초에 전국의 현량과 문학의 선비들을 천거하고 이들과 시무를 논하였는데 이때 동중서도 현량으로서 의견을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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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董仲舒)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사람으로 신도(信都) 광천(廣川)(지금의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경현景縣) 출신이다.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공부했고 [[한나라 경제]](景帝) 때 박사가 되었다.[[한 무제]](武帝)는 즉위 초에 전국의 현량과 문학의 선비들을 천거하고 이들과 시무를 논하였는데 이때 동중서도 현량으로서 의견을 진술했다.  
 
<br>동중서는 현량대책(賢良對策)으로 백가(百家)를 몰아내고 유교에 의한 사상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에 무제가 의견을 채용함으로써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이로써 유가가 2천 년 넘게 중국 사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br>동중서는 현량대책(賢良對策)으로 백가(百家)를 몰아내고 유교에 의한 사상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에 무제가 의견을 채용함으로써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이로써 유가가 2천 년 넘게 중국 사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무제에게 인정을 받은 동중서는 일찍이 강도왕(江都王)과 교서왕(膠西王) 아래 상(相) 대신을 지냈으며 후에 병을 핑계로 퇴직하여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큰 일이 생기면 늘 정위(廷尉:사법장관)인 장탕(張湯)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상의했다고 한다.  
 
무제에게 인정을 받은 동중서는 일찍이 강도왕(江都王)과 교서왕(膠西王) 아래 상(相) 대신을 지냈으며 후에 병을 핑계로 퇴직하여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큰 일이 생기면 늘 정위(廷尉:사법장관)인 장탕(張湯)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상의했다고 한다.  
 
<br>저서에《동자문집(董子文集)》과《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
 
<br>저서에《동자문집(董子文集)》과《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

2016년 5월 11일 (수) 22:50 판

동중서(董仲舒)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사람으로 신도(信都) 광천(廣川)(지금의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경현景縣) 출신이다.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공부했고 한나라 경제(景帝) 때 박사가 되었다.한 무제(武帝)는 즉위 초에 전국의 현량과 문학의 선비들을 천거하고 이들과 시무를 논하였는데 이때 동중서도 현량으로서 의견을 진술했다.
동중서는 현량대책(賢良對策)으로 백가(百家)를 몰아내고 유교에 의한 사상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에 무제가 의견을 채용함으로써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이로써 유가가 2천 년 넘게 중국 사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무제에게 인정을 받은 동중서는 일찍이 강도왕(江都王)과 교서왕(膠西王) 아래 상(相) 대신을 지냈으며 후에 병을 핑계로 퇴직하여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큰 일이 생기면 늘 정위(廷尉:사법장관)인 장탕(張湯)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상의했다고 한다.
저서에《동자문집(董子文集)》과《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