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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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을 건국한 낭야왕 사마예(317)

8왕의 난이 한창이던 혜제 영흥(永興) 원년(304)에 당시 황태제(皇太弟)로 있던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은 동안왕(東安王) 사마요(司馬繇)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회의에서 그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동안왕의 조카였던 29세의 젊은 좌장군(左將軍)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는 자신도 위험에 처할까 매우 불안했다. 당시 낭야왕은 혜제를 따라 업(鄴)에 있었다. 낭야왕의 측근이던 참군(參軍) 왕도(王道)도 낭야왕에게 귀국하라고 권했다. 왕도(王道)는 낭야 지방의 이름난 호족 왕씨의 일족으로 낭야왕보다 아홉살 많았다. 왕도(王道)의 설득으로 낭야왕은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업(鄴)을 탈출해 낙양에서 어머니를 만나 함께 산동의 낭야로 돌아갔다. 8왕의 난영가의 난을 치르면서 진(晉)나라의 황족은 거의 다 죽었다. 동쪽의 낭야로 돌아가 다시 서주(徐州), 양주(揚州)의 군사를 감독하고 왕도(王道)의 의견에 따라 건업(建鄴, 낙양)을 본거지로 정한 낭야왕만 건재했다. 낙양과 장안이 함락되자 낭야왕 사마예는 주위로부터 제위에 오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서진이 멸망한 후 포로가 된 민제 사마업(司馬鄴)이 평양으로 끌려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겨우 ‘진왕(晉王)’이라 칭하는 것만 승낙했다. 민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진왕 사마예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라 연호를 태흥(太興)이라 고치고 남경의 땅을 건강(健康)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