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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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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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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는 허난 성의 궁이 시에서 태어났다. 두보는 원래 정치에 발을 들이려 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755년에 발생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안사의 난 이전에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을 즐기며 관리로서의 준비를 했다.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방한 부친을 따라 산둥에 가서 이백, 고적(高適) 등과 함께 시를 읊고 자연을 즐기며 친교를 돈독히 했다. [[안사의 난]]일어나기 전까지 두보는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안사의 난]] 발발 이후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768년에 악양에 적을 옮긴 이후 그의 삶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악양과 담주(潭州)사이를 전전하다 뱃길에서 770년 58세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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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는 <공낭>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엉터리라, 나의 길은 더욱 험난하였다.’ 두보는 때를 잘못 타고났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기의 뛰어난 학문과 높은 덕성을 다 바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와 백성을 안녕케 해줄 입공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가난 속에 시달리며 전란에 쇠락하고 도탄에 빠진 국가와 백성을 위해 피눈물나는 노래만을 읊는 우수시인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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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의 자는 자미(子美)다. 당 현종 선천 원년(712) 하남성 공현에서 출생했다. 그의 13세조 두예는 서진의 명장이었고, <좌전>에 정통햇다. 증조부 두의예는 공현의 영을 지냈으며, 조부 두심언은 초당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두보는 ‘우리 조상은 시로써 옛날에 으뜸이시었다, 시는 우리 가문의 일’ 이라고 했다. 두보의 부친 두한은 연주의 사마를 지냈고 봉천현령으로 끝맺었다. 두보의 생애를 대략 네 시기로 나누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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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서와 유력(71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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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보의 탄생으로부터 35세까지로 나라도 창성했고 두보 자신도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와 유럭을 했던 때다. 두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시문에 뛰어난 천품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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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에 이미 생각이 컸고 입을 열어 봉황을 읊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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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에 큰 글자를 썼고 작품이 한 부대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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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두보가 만년에 지은 <장유>라는 시에서 회상한 것이다. 다시 그는 소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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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열네댓 살 때에 문단에 나가 어울렸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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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상이나 위계심 같은 분이 나를 반고나 양웅 닮았다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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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이나 위계심은 당시 문단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큰 중진이었다. 그들이 두보를 보고 한 대의 반고나 양웅과 같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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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천성만으로는 크게 성공할 수가 없었다. 두보는 어려서부터 성실했고 또 노력했다. ‘만권의 책을 독파하자 붓을 대고 글을 지으니 마치 신들린 듯하더라,’ ‘파破’라고 한 뜻은 꿰뚫었다, 즉 연찬고심하고 각고노력했음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두보가 천진난만한 소년의 기질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만년에 지은 <백우행집>에서 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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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상하면 15세 때 마음은 아직도 어렸고 송아지같이 세차게 뛰어다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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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에는 뜰 앞 대추나무에 하루에 천번이나 기어올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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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의 총명과 성실한 노력은 두보의 학문과 시를 대성시키는 바탕이었다면, 그의 천진난만한 성품은 악을 미워하고 약한 백성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의 흐름이었다. 개원 19년(731) 두보는 20세가 되자 오와 월을 향해 유람길에 나섰고 10년 이상 전후 세 차례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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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유쾌한 여행과 장한 놀이를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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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23년(735) 24세 때, 그는 낙양에 돌아와 진사 시험에 응했으나 낙방하고 다시 제로 여행을 하며 많은 문인들과 친교를 맺고 호탕하게 술마시며 놀았다. <장유>에서 ‘제, 조 사이로 방탕하고 경구비마로 마냥 즐겼노라’ 고 했다. 이때 두보는 활을 소아 손수 들짐승이나 날새를 잡기도 했다. 두보의 시에는 매나 말을 읊은 것이 유난히 많고 매우 생기있게 묘사되었는데 그 유래를 알만하다. 개원 29년(741) 두보는 30세로 낙양에 돌아왔고 그 3년이 지나 천보 3년에 낙양에서 11세 연장인 이백과 만났다. 당시 이백은 장안에서 쫒겨났으나 시명이 높았다. 두 사람은 한눈에 의기투합 했으며 짧은 시일의 교유였으나 마침내는 불후의 우정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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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안의 곤고(746~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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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두보의 나이 35세부터 44세까지 약 10년간이며, 당나라가 점차로 쇠퇴하고 통치계급의 부패와 무능이 노정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파괴되었고 두보 자신도 차츰 삶의 고난 속으로 빠져들게 되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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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 5년(746) 두보는 35세에 장안으로 왔다. 원래 두보는 충군애민의 정치이상과 참여정신이 높았다. ‘임금을 보좌하여 요, 순 이상으로 높이고, 나라의 기풍을 순박하게 바로잡자’ 는 열렬한 정치 포부를 지녔던 두보는 이듬해(747)에 과거에 응했다가 다시 낙방하고 두 번째의 고배를 맛보고 참여의 길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당시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했고 당나라 조정은 간악한 이임보와 고력사의 흉계에 놀아났다. 이때에도 학자를 미워하던 이임보가 과거 응시자를 전부 낙방시킴으로써 두보도 그의 음흉한 술책에 휩쓸려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의 씁쓸한 심정과 정의의 울분을 두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에서 털어놓은 바 있다. 동시에 두보는 임금과 백성들 중간에서 햇빛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같은 이들 간신배들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무고하게 고생하며 생명이나 재산을 잃고 있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당시 두보는 너무나 궁핍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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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 귀족의 말을 뒤쫓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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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꺼기 술잔이나 고기를 얻어먹으며 사방에서 슬프고 신맛만 보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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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으로 세도가나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다시피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너무나 실망한 두보는 술취해 ‘유학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공자나 도척이 다같이 흙이 되었는데’ 라고 했고, 또 ‘유학자는 모두가 처신을 잘 못한다’ ‘유학자가 굶어죽을 걱정을 한다’ ‘어찌 굶어 죽어 구렁텅이에 묻히리?’ 하며 신세타령을 했다. 그의 푸념은 엄살이 아니었다. 그의 자식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실제로 죽었다. ‘내 집 문에 들어가니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며 어린 자식이 굶어 죽었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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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난 속에서 두보는 더욱 사회의 부조리와 통치계급의 타락과 백성의 고충을 냉철하게 내다 보았다. <여인행>에서 귀족들의 타락을 폭로했고, <병거행> <전, 후출새> 에서는 위정자의 지나친 변경확대 야욕에 제물이 되고 잇는 무고한 전사들의 슬픔을 대변했고 <추우탄>에서는 백성들의 가난한 생활을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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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안녹산의 반란(756~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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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부패와 타락만을 일삼던 당나라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에 현종은 촉으로 피난했고, 가는 길에 마외파에서 양귀비와 양국충 일당을 처형했다. 그러자 이듬해 태자 형이 영무에서 자리에 올라 숙종이라 칭했고 연호도 지덕으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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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에 두보는 가족을 봉선에서 백수를 지나 다시 부주로 피난시켰다. 그리고는 혼자서 숙종이 있는 영무로 가고자 역적들의 점령지를 빠져나오다가 도리어 붙들려 장안으로 호송되어 돌아와 장안에 연금상태로 유폐되었었다. 그는 <애강두>에서 ‘소릉의 낡은 야인이 소리죽여 통곡하며 봄날에 곡강 모퉁이를 남몰래 거닐도다’ 라고 읊었다. 이때 두보는 오직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역적토벌의 정의감에 넘치고 있었다. <비진도> 나 <비청판>에서 그는 역적을 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전사들에게 ‘의군’이라는 칭호를 주며 그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하루 속히 역적을 괴멸하기를 안타깝게 고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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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지덕 2년(757) 안녹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 일파에 의해 살해되고 적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차츰 힘과 질서를 되찾은 당나라의 현종은 봉상으로 옮아왔다. 이에 두보ᅟᅳᆫ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도중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봉상에 와서 숙종에게 알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5월 16일 두보는 임금에게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좌습유의 벼슬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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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숙원을 달성한 두보의 감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보는 기질상으로 능란한 행정가나 정치인 내지는 관료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재상 방관을 변명하는 상소문을 숙종에게 올렸다가 도리어 숙종의 역린에 걸려 8월에는 부주에 있는 가족에게 가 있으라는 명을 받고 장안을 떠나야 했다. 말하자면 점잖고 조용하게 두보는 대궐에서 쫓겨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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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당나라 관군이 위구르의 도움으로 장안을 수복했고 10월 19일 숙종이 장안으로 환궁했다. 이에 두보도 11월에는 장안으로 돌아와 다시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고, 가지, 잠참, 왕유와 같이 궁중에서 서로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건원 원년(758) 6월 두보는 방관이 빈주자사로 좌천됨에 따라 화주의 사공참군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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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4년 전후의 짧은 시기였으나 이때는 두보에게 있어 가장 다양했고 또 그의 시도 가장 고양되었던 때였다. <술회> <옥화궁> <강촌> <북정> <팽아행> <곡강> 등의 대작과 걸작이 수없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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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만년의 표량(759~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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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에 화주로 쫓겨난 두보는 그 후 약 10년 동안 각지로 떠돌며 심한 궁핍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59세에 서거했다. 동시에 이때는 당나라가 계속 쇠락했고, 겹치는 가뭄과 전란에 백성들은 더욱 도탄 속에 빠져들었다. 이에 두보는 자기의 간난을 백성들의 그것으로 일치시키고 인도주의 가 넘치는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더욱 완성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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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주는 섬서성 화산 기슭에 있는 촌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더위와 잡무에 시달려 짜증을 내던 두보는 마침내 그 해(759) 가을 벼슬을 버리고 진주를 거쳐 동곡으로 갔고, 다시 겨울에는 촉의 험난한 길을 타고 성도로 깊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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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두보의 창작생활에서 가장 주목할 때라 하겠다. 화주를 중심한 혹심한 고난 속에서 그는 ‘심리 삼별’ 의 사회성이 짙은 작품을 썻고, <진주잡시> 20수를 위시하여 처절한 생활고를 그린 시와 아울어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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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 도착한 두보는 상원 원년(760), 두제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원조를 얻어 환화계에 초당을 지었고 또 뜰에는 복숭아 들의 과일나무까지 심었다. 모진 고생과 방랑을 겪은 두보는 피로한 가족과 더불어 오래간만에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고 안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시에는 제법 안도감이 내보이기도 했다. 더욱이 <모옥위추풍소파가>에서 ‘천만간의 큰 집을 지어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을 다같이 즐겁게 해주고자’ 희망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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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도에서의 소강상태도 오래가지 못했다. 762년 현종과 숙종이 죽고 대종이 자리에 올랐다. 한편 두보의 뒤를 봐주던 엄무가 장안으로 가자 지방의 군벌 서지도가 반란하여 성도 일대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두보는 다시 가족을 거느리고 재주 낭주 등지로 헤매어야 했다. 한편 광덕 원년(763) 정월, 북쪽에서는 역적의 두목 사조의가 죽고 약 8년을 끌던 안사의 난이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위구르나 토번들의 횡포로 사회적 불안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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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엄무가 다시 성도윤 겸 검남동서천절도사가 되어 성도로 돌아오자 두보도 다시 완화계의 초당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이때가 764년 두보의 나이 53세 때였다. 그리고 두보는 엄무의 추천으로 절도참모, 검교공부원외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때 두보는 폐병과 중풍에 쇠잔하여 공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의 고고한 성품은 속인들 틈에서 어물쩡하고 타협이나 하는 막부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듬해(765) 봄에 직을 사퇴하고 다시 완화계로 돌아왔다. 그러자 뜻밖에 엄무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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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견자를 잃은 두보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방랑의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갔다. 가주, 융주, 유주, 충주를 지나 운안까지 왔다. 이곳에서 신병이 더욱 심해져 두보는 해를 넘기고 이듬해(766) 늦봄에 기주로 향했다. 기주는 사천성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 부근에 있다. 이곳에서 두보는 대력 원년(766) 늦봄에서 대력 3년(768) 봄까지 약 2년간을 지냈다. 원두막같은 초라한 집에서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던 두보의 생활은 물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기주생활에서 그는 430수의 시를 지었다. 이 수는 그의 전집에 남아있는 약 2/10이 넘는 양이다. 특히 인생이나 사회나 국가의 모든 차원에서 간고를 몸소 체험한 두보가 죽기 수년전에 지은 이 시들은 낙조의 정밀과 장엄이 엿보인다. 그들 시에서는 전같이 노골적인 사회적 비판이나 분개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깊은 우수와 비애속에 선의와 애정이 감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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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두보는 외롭기만 했다. 이백도, 고적도, 엄무도, 그리고 많은 벗이나 지기들이 다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와 옉사람을 읊은 시가 두드러지게 많은 것도 말하자면 죽음을 수년 앞둔 인생의 총 결산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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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력 3년(768) 57세 정월에 기주를 떠난 두보는 강릉에 잠시 머물렀고, 세모에는 악주로, 이듬해에는 동정호에 들고, 여름에는 담주에 가서 대력 5년(770) 봄을 맞았다. 그러자 4월에는 지방 군벌의 난이 일어나 그는 다시 형주로 피했다가 다시 침주로 가려다가 도중 뇌양까지 왔다가 홍수에 길이 막혀서 다시 담주로 되돌아갔고, 겨울에 다시 배를 타고 나섰다가 담주, 악주 사이에서 그는 고난의 일생을 끝맺고 말았다.
  
 
==작품==
 
==작품==

2018년 6월 24일 (일) 14:10 판

두보
국적 당나라
별칭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별명(別名)은 시성
직업 시 (문학)
주요 작품 병거행(兵車行), 절구 강벽(江碧), 북정(北征) 등

두보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고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하며, 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주제로 시를 쓴 민중시인이다.

생애

두보는 <공낭>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엉터리라, 나의 길은 더욱 험난하였다.’ 두보는 때를 잘못 타고났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기의 뛰어난 학문과 높은 덕성을 다 바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와 백성을 안녕케 해줄 입공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가난 속에 시달리며 전란에 쇠락하고 도탄에 빠진 국가와 백성을 위해 피눈물나는 노래만을 읊는 우수시인으로 끝나고 말았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다. 당 현종 선천 원년(712) 하남성 공현에서 출생했다. 그의 13세조 두예는 서진의 명장이었고, <좌전>에 정통햇다. 증조부 두의예는 공현의 영을 지냈으며, 조부 두심언은 초당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두보는 ‘우리 조상은 시로써 옛날에 으뜸이시었다, 시는 우리 가문의 일’ 이라고 했다. 두보의 부친 두한은 연주의 사마를 지냈고 봉천현령으로 끝맺었다. 두보의 생애를 대략 네 시기로 나누어 보겠다.

(1) 독서와 유력(712~746)

 두보의 탄생으로부터 35세까지로 나라도 창성했고 두보 자신도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와 유럭을 했던 때다. 두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시문에 뛰어난 천품을 발휘했다.
일곱 살에 이미 생각이 컸고 입을 열어 봉황을 읊었노라
아홉 살에 큰 글자를 썼고 작품이 한 부대로 가득찼다.
이것은 두보가 만년에 지은 <장유>라는 시에서 회상한 것이다. 다시 그는 소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자랑했다.
 옛날 열네댓 살 때에 문단에 나가 어울렸거늘
 최상이나 위계심 같은 분이 나를 반고나 양웅 닮았다 했네
최상이나 위계심은 당시 문단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큰 중진이었다. 그들이 두보를 보고 한 대의 반고나 양웅과 같다고 했던 것이다.
타고난 천성만으로는 크게 성공할 수가 없었다. 두보는 어려서부터 성실했고 또 노력했다. ‘만권의 책을 독파하자 붓을 대고 글을 지으니 마치 신들린 듯하더라,’ ‘파破’라고 한 뜻은 꿰뚫었다, 즉 연찬고심하고 각고노력했음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두보가 천진난만한 소년의 기질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만년에 지은 <백우행집>에서 술회하고 있다.
 회상하면 15세 때 마음은 아직도 어렸고 송아지같이 세차게 뛰어다녔으며
 8월에는 뜰 앞 대추나무에 하루에 천번이나 기어올랐지
천성의 총명과 성실한 노력은 두보의 학문과 시를 대성시키는 바탕이었다면, 그의 천진난만한 성품은 악을 미워하고 약한 백성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의 흐름이었다. 개원 19년(731) 두보는 20세가 되자 오와 월을 향해 유람길에 나섰고 10년 이상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제법 유쾌한 여행과 장한 놀이를 거듭했다. 
개원 23년(735) 24세 때, 그는 낙양에 돌아와 진사 시험에 응했으나 낙방하고 다시 제로 여행을 하며 많은 문인들과 친교를 맺고 호탕하게 술마시며 놀았다. <장유>에서 ‘제, 조 사이로 방탕하고 경구비마로 마냥 즐겼노라’ 고 했다. 이때 두보는 활을 소아 손수 들짐승이나 날새를 잡기도 했다. 두보의 시에는 매나 말을 읊은 것이 유난히 많고 매우 생기있게 묘사되었는데 그 유래를 알만하다. 개원 29년(741) 두보는 30세로 낙양에 돌아왔고 그 후 3년이 지나 천보 3년에 낙양에서 11세 연장인 이백과 만났다. 당시 이백은 장안에서 쫒겨났으나 시명이 높았다. 두 사람은 한눈에 의기투합 했으며 짧은 시일의 교유였으나 마침내는 불후의 우정을 수립했다. 

(2)장안의 곤고(746~755)

이 시기는 두보의 나이 35세부터 44세까지 약 10년간이며, 당나라가 점차로 쇠퇴하고 통치계급의 부패와 무능이 노정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파괴되었고 두보 자신도 차츰 삶의 고난 속으로 빠져들게 되던 때다. 
천보 5년(746) 두보는 35세에 장안으로 왔다. 원래 두보는 충군애민의 정치이상과 참여정신이 높았다. ‘임금을 보좌하여 요, 순 이상으로 높이고, 나라의 기풍을 순박하게 바로잡자’ 는 열렬한 정치 포부를 지녔던 두보는 이듬해(747)에 과거에 응했다가 다시 낙방하고 두 번째의 고배를 맛보고 참여의 길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당시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했고 당나라 조정은 간악한 이임보와 고력사의 흉계에 놀아났다. 이때에도 학자를 미워하던 이임보가 과거 응시자를 전부 낙방시킴으로써 두보도 그의 음흉한 술책에 휩쓸려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의 씁쓸한 심정과 정의의 울분을 두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에서 털어놓은 바 있다. 동시에 두보는 임금과 백성들 중간에서 햇빛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같은 이들 간신배들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무고하게 고생하며 생명이나 재산을 잃고 있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당시 두보는 너무나 궁핍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읊었다.
아침에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 귀족의 말을 뒤쫓아가
찌꺼기 술잔이나 고기를 얻어먹으며 사방에서 슬프고 신맛만 보았노라
조석으로 세도가나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다시피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너무나 실망한 두보는 술취해 ‘유학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공자나 도척이 다같이 흙이 되었는데’ 라고 했고, 또 ‘유학자는 모두가 처신을 잘 못한다’ ‘유학자가 굶어죽을 걱정을 한다’ ‘어찌 굶어 죽어 구렁텅이에 묻히리?’ 하며 신세타령을 했다. 그의 푸념은 엄살이 아니었다. 그의 자식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실제로 죽었다. ‘내 집 문에 들어가니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며 어린 자식이 굶어 죽었다고 하네’ 
이러한 고난 속에서 두보는 더욱 사회의 부조리와 통치계급의 타락과 백성의 고충을 냉철하게 내다 보았다. <여인행>에서 귀족들의 타락을 폭로했고, <병거행> <전, 후출새> 에서는 위정자의 지나친 변경확대 야욕에 제물이 되고 잇는 무고한 전사들의 슬픔을 대변했고 <추우탄>에서는 백성들의 가난한 생활을 걱정했다.

(3) 안녹산의 반란(756~759)

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부패와 타락만을 일삼던 당나라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에 현종은 촉으로 피난했고, 가는 길에 마외파에서 양귀비와 양국충 일당을 처형했다. 그러자 이듬해 태자 형이 영무에서 자리에 올라 숙종이라 칭했고 연호도 지덕으로 개칭했다.
이통에 두보는 가족을 봉선에서 백수를 지나 다시 부주로 피난시켰다. 그리고는 혼자서 숙종이 있는 영무로 가고자 역적들의 점령지를 빠져나오다가 도리어 붙들려 장안으로 호송되어 돌아와 장안에 연금상태로 유폐되었었다. 그는 <애강두>에서 ‘소릉의 낡은 야인이 소리죽여 통곡하며 봄날에 곡강 모퉁이를 남몰래 거닐도다’ 라고 읊었다. 이때 두보는 오직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역적토벌의 정의감에 넘치고 있었다. <비진도> 나 <비청판>에서 그는 역적을 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전사들에게 ‘의군’이라는 칭호를 주며 그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하루 속히 역적을 괴멸하기를 안타깝게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지덕 2년(757) 안녹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 일파에 의해 살해되고 적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차츰 힘과 질서를 되찾은 당나라의 현종은 봉상으로 옮아왔다. 이에 두보ᅟᅳᆫ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도중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봉상에 와서 숙종에게 알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5월 16일 두보는 임금에게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좌습유의 벼슬을 받게 되었다. 
오랜 숙원을 달성한 두보의 감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보는 기질상으로 능란한 행정가나 정치인 내지는 관료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재상 방관을 변명하는 상소문을 숙종에게 올렸다가 도리어 숙종의 역린에 걸려 8월에는 부주에 있는 가족에게 가 있으라는 명을 받고 장안을 떠나야 했다. 말하자면 점잖고 조용하게 두보는 대궐에서 쫓겨난 셈이었다.
그러자 당나라 관군이 위구르의 도움으로 장안을 수복했고 10월 19일 숙종이 장안으로 환궁했다. 이에 두보도 11월에는 장안으로 돌아와 다시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고, 가지, 잠참, 왕유와 같이 궁중에서 서로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건원 원년(758) 6월 두보는 방관이 빈주자사로 좌천됨에 따라 화주의 사공참군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오직 4년 전후의 짧은 시기였으나 이때는 두보에게 있어 가장 다양했고 또 그의 시도 가장 고양되었던 때였다. <술회> <옥화궁> <강촌> <북정> <팽아행> <곡강> 등의 대작과 걸작이 수없이 나왔다. 

(4) 만년의 표량(759~770)

48세에 화주로 쫓겨난 두보는 그 후 약 10년 동안 각지로 떠돌며 심한 궁핍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59세에 서거했다. 동시에 이때는 당나라가 계속 쇠락했고, 겹치는 가뭄과 전란에 백성들은 더욱 도탄 속에 빠져들었다. 이에 두보는 자기의 간난을 백성들의 그것으로 일치시키고 인도주의 가 넘치는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더욱 완성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화주는 섬서성 화산 기슭에 있는 촌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더위와 잡무에 시달려 짜증을 내던 두보는 마침내 그 해(759) 가을 벼슬을 버리고 진주를 거쳐 동곡으로 갔고, 다시 겨울에는 촉의 험난한 길을 타고 성도로 깊이 들어갔다.
이 1년이 두보의 창작생활에서 가장 주목할 때라 하겠다. 화주를 중심한 혹심한 고난 속에서 그는 ‘심리 삼별’ 의 사회성이 짙은 작품을 썻고, <진주잡시> 20수를 위시하여 처절한 생활고를 그린 시와 아울어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성도에 도착한 두보는 상원 원년(760), 두제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원조를 얻어 환화계에 초당을 지었고 또 뜰에는 복숭아 들의 과일나무까지 심었다. 모진 고생과 방랑을 겪은 두보는 피로한 가족과 더불어 오래간만에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고 안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시에는 제법 안도감이 내보이기도 했다. 더욱이 <모옥위추풍소파가>에서 ‘천만간의 큰 집을 지어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을 다같이 즐겁게 해주고자’ 희망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성도에서의 소강상태도 오래가지 못했다. 762년 현종과 숙종이 죽고 대종이 자리에 올랐다. 한편 두보의 뒤를 봐주던 엄무가 장안으로 가자 지방의 군벌 서지도가 반란하여 성도 일대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두보는 다시 가족을 거느리고 재주 낭주 등지로 헤매어야 했다. 한편 광덕 원년(763) 정월, 북쪽에서는 역적의 두목 사조의가 죽고 약 8년을 끌던 안사의 난이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위구르나 토번들의 횡포로 사회적 불안은 여전했다. 
마침 엄무가 다시 성도윤 겸 검남동서천절도사가 되어 성도로 돌아오자 두보도 다시 완화계의 초당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이때가 764년 두보의 나이 53세 때였다. 그리고 두보는 엄무의 추천으로 절도참모, 검교공부원외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때 두보는 폐병과 중풍에 쇠잔하여 공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의 고고한 성품은 속인들 틈에서 어물쩡하고 타협이나 하는 막부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듬해(765) 봄에 직을 사퇴하고 다시 완화계로 돌아왔다. 그러자 뜻밖에 엄무가 세상을 떠났다.
후견자를 잃은 두보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방랑의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갔다. 가주, 융주, 유주, 충주를 지나 운안까지 왔다. 이곳에서 신병이 더욱 심해져 두보는 해를 넘기고 이듬해(766) 늦봄에 기주로 향했다. 기주는 사천성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 부근에 있다. 이곳에서 두보는 대력 원년(766) 늦봄에서 대력 3년(768) 봄까지 약 2년간을 지냈다. 원두막같은 초라한 집에서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던 두보의 생활은 물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기주생활에서 그는 430수의 시를 지었다. 이 수는 그의 전집에 남아있는 약 2/10이 넘는 양이다. 특히 인생이나 사회나 국가의 모든 차원에서 간고를 몸소 체험한 두보가 죽기 수년전에 지은 이 시들은 낙조의 정밀과 장엄이 엿보인다. 그들 시에서는 전같이 노골적인 사회적 비판이나 분개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깊은 우수와 비애속에 선의와 애정이 감돌고 있다.
이제 두보는 외롭기만 했다. 이백도, 고적도, 엄무도, 그리고 많은 벗이나 지기들이 다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와 옉사람을 읊은 시가 두드러지게 많은 것도 말하자면 죽음을 수년 앞둔 인생의 총 결산이었다고나 할까?
대력 3년(768) 57세 정월에 기주를 떠난 두보는 강릉에 잠시 머물렀고, 세모에는 악주로, 이듬해에는 동정호에 들고, 여름에는 담주에 가서 대력 5년(770) 봄을 맞았다. 그러자 4월에는 지방 군벌의 난이 일어나 그는 다시 형주로 피했다가 다시 침주로 가려다가 도중 뇌양까지 왔다가 홍수에 길이 막혀서 다시 담주로 되돌아갔고, 겨울에 다시 배를 타고 나섰다가 담주, 악주 사이에서 그는 고난의 일생을 끝맺고 말았다.

작품

대표적으로 병거행(兵車行)이 있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심각하게 묘사한 시들이 많으며 시로 엮은 역사라는 뜻에서 '시사'라고 일컫는다.

참고문헌

  • <<이백(영원한 대자연인)>>, 안치, 신하윤 외 옮김, 이끌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