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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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국적 당나라
별칭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별명(別名)은 시성
직업 시 (문학)
주요 작품 병거행(兵車行), 절구 강벽(江碧), 북정(北征) 등

 두보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고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하며, 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주제로 시를 쓴 민중시인이다.


생애

 두보는 <공낭>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엉터리라, 나의 길은 더욱 험난하였다.’ 두보는 때를 잘못 타고났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기의 뛰어난 학문과 높은 덕성을 다 바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와 백성을 안녕케 해줄 입공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가난 속에 시달리며 전란에 쇠락하고 도탄에 빠진 국가와 백성을 위해 피눈물나는 노래만을 읊는 우수시인으로 끝나고 말았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다. 당 현종 선천 원년(712) 하남성 공현에서 출생했다. 그의 13세조 두예는 서진의 명장이었고, <좌전>에 정통햇다. 증조부 두의예는 공현의 영을 지냈으며, 조부 두심언은 초당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두보는 ‘우리 조상은 시로써 옛날에 으뜸이시었다, 시는 우리 가문의 일’ 이라고 했다. 두보의 부친 두한은 연주의 사마를 지냈고 봉천현령으로 끝맺었다. 두보의 생애를 대략 네 시기로 나누어 보겠다.


(1) 독서와 유력(712~746)

 두보의 탄생으로부터 35세까지로 나라도 창성했고 두보 자신도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와 유럭을 했던 때다. 두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시문에 뛰어난 천품을 발휘했다. 일곱 살에 이미 생각이 컸고 입을 열어 봉황을 읊었노라 아홉 살에 큰 글자를 썼고 작품이 한 부대로 가득찼다. 이것은 두보가 만년에 지은 <장유>라는 시에서 회상한 것이다. 다시 그는 소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자랑했다.

 옛날 열네댓 살 때에 문단에 나가 어울렸거늘
 최상이나 위계심 같은 분이 나를 반고나 양웅 닮았다 했네

 최상이나 위계심은 당시 문단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큰 중진이었다. 그들이 두보를 보고 한 대의 반고나 양웅과 같다고 했던 것이다.  타고난 천성만으로는 크게 성공할 수가 없었다. 두보는 어려서부터 성실했고 또 노력했다. ‘만권의 책을 독파하자 붓을 대고 글을 지으니 마치 신들린 듯하더라,’ ‘파破’라고 한 뜻은 꿰뚫었다, 즉 연찬고심하고 각고노력했음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두보가 천진난만한 소년의 기질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만년에 지은 <백우행집>에서 술회하고 있다.

 회상하면 15세 때 마음은 아직도 어렸고 송아지같이 세차게 뛰어다녔으며
 8월에는 뜰 앞 대추나무에 하루에 천번이나 기어올랐지

 천성의 총명과 성실한 노력은 두보의 학문과 시를 대성시키는 바탕이었다면, 그의 천진난만한 성품은 악을 미워하고 약한 백성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의 흐름이었다. 개원 19년(731) 두보는 20세가 되자 오와 월을 향해 유람길에 나섰고 10년 이상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제법 유쾌한 여행과 장한 놀이를 거듭했다. 개원 23년(735) 24세 때, 그는 낙양에 돌아와 진사 시험에 응했으나 낙방하고 다시 제로 여행을 하며 많은 문인들과 친교를 맺고 호탕하게 술마시며 놀았다. <장유>에서 ‘제, 조 사이로 방탕하고 경구비마로 마냥 즐겼노라’ 고 했다. 이때 두보는 활을 소아 손수 들짐승이나 날새를 잡기도 했다. 두보의 시에는 매나 말을 읊은 것이 유난히 많고 매우 생기있게 묘사되었는데 그 유래를 알만하다. 개원 29년(741) 두보는 30세로 낙양에 돌아왔고 그 후 3년이 지나 천보 3년에 낙양에서 11세 연장인 이백과 만났다. 당시 이백은 장안에서 쫒겨났으나 시명이 높았다. 두 사람은 한눈에 의기투합 했으며 짧은 시일의 교유였으나 마침내는 불후의 우정을 수립했다.

(2) 장안의 곤고(746~755)

 이 시기는 두보의 나이 35세부터 44세까지 약 10년간이며, 당나라가 점차로 쇠퇴하고 통치계급의 부패와 무능이 노정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파괴되었고 두보 자신도 차츰 삶의 고난 속으로 빠져들게 되던 때다. 천보 5년(746) 두보는 35세에 장안으로 왔다. 원래 두보는 충군애민의 정치이상과 참여정신이 높았다. ‘임금을 보좌하여 요, 순 이상으로 높이고, 나라의 기풍을 순박하게 바로잡자’ 는 열렬한 정치 포부를 지녔던 두보는 이듬해(747)에 과거에 응했다가 다시 낙방하고 두 번째의 고배를 맛보고 참여의 길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당시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했고 당나라 조정은 간악한 이임보와 고력사의 흉계에 놀아났다. 이때에도 학자를 미워하던 이임보가 과거 응시자를 전부 낙방시킴으로써 두보도 그의 음흉한 술책에 휩쓸려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의 씁쓸한 심정과 정의의 울분을 두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에서 털어놓은 바 있다. 동시에 두보는 임금과 백성들 중간에서 햇빛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같은 이들 간신배들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무고하게 고생하며 생명이나 재산을 잃고 있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당시 두보는 너무나 궁핍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읊었다.

 아침에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 귀족의 말을 뒤쫓아가 
 찌꺼기 술잔이나 고기를 얻어먹으며 사방에서 슬프고 신맛만 보았노라

 조석으로 세도가나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다시피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너무나 실망한 두보는 술취해 유학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공자나 도척이 다같이 흙이 되었는데’ 라고 했고, 또 ‘유학자는 모두가 처신을 잘 못한다’ ‘유학자가 굶어죽을 걱정을 한다’ ‘어찌 굶어 죽어 구렁텅이에 묻히리?’ 하며 신세타령을 했다. 그의 푸념은 엄살이 아니었다. 그의 자식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실제로 죽었다. ‘내 집 문에 들어가니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며 어린 자식이 굶어 죽었다고 하네’ 이러한 고난 속에서 두보는 더욱 사회의 부조리와 통치계급의 타락과 백성의 고충을 냉철하게 내다 보았다. <여인행>에서 귀족들의 타락을 폭로했고, <병거행> <전, 후출새> 에서는 위정자의 지나친 변경확대 야욕에 제물이 되고 잇는 무고한 전사들의 슬픔을 대변했고 <추우탄>에서는 백성들의 가난한 생활을 걱정했다.

(3) 안녹산의 반란(756~759)

 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부패와 타락만을 일삼던 당나라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에 현종은 촉으로 피난했고, 가는 길에 마외파에서 양귀비와 양국충 일당을 처형했다. 그러자 이듬해 태자 형이 영무에서 자리에 올라 숙종이라 칭했고 연호도 지덕으로 개칭했다. 이통에 두보는 가족을 봉선에서 백수를 지나 다시 부주로 피난시켰다. 그리고는 혼자서 숙종이 있는 영무로 가고자 역적들의 점령지를 빠져나오다가 도리어 붙들려 장안으로 호송되어 돌아와 장안에 연금상태로 유폐되었었다. 그는 <애강두>에서 ‘소릉의 낡은 야인이 소리죽여 통곡하며 봄날에 곡강 모퉁이를 남몰래 거닐도다’ 라고 읊었다. 이때 두보는 오직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역적토벌의 정의감에 넘치고 있었다. <비진도> 나 <비청판>에서 그는 역적을 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전사들에게 ‘의군’이라는 칭호를 주며 그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하루 속히 역적을 괴멸하기를 안타깝게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지덕 2년(757) 안녹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 일파에 의해 살해되고 적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차츰 힘과 질서를 되찾은 당나라의 현종은 봉상으로 옮아왔다. 이에 두보ᅟᅳᆫ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도중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봉상에 와서 숙종에게 알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5월 16일 두보는 임금에게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좌습유의 벼슬을 받게 되었다. 오랜 숙원을 달성한 두보의 감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보는 기질상으로 능란한 행정가나 정치인 내지는 관료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재상 방관을 변명하는 상소문을 숙종에게 올렸다가 도리어 숙종의 역린에 걸려 8월에는 부주에 있는 가족에게 가 있으라는 명을 받고 장안을 떠나야 했다. 말하자면 점잖고 조용하게 두보는 대궐에서 쫓겨난 셈이었다. 그러자 당나라 관군이 위구르의 도움으로 장안을 수복했고 10월 19일 숙종이 장안으로 환궁했다. 이에 두보도 11월에는 장안으로 돌아와 다시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고, 가지, 잠참, 왕유와 같이 궁중에서 서로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건원 원년(758) 6월 두보는 방관이 빈주자사로 좌천됨에 따라 화주의 사공참군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오직 4년 전후의 짧은 시기였으나 이때는 두보에게 있어 가장 다양했고 또 그의 시도 가장 고양되었던 때였다. <술회> <옥화궁> <강촌> <북정> <팽아행> <곡강> 등의 대작과 걸작이 수없이 나왔다.

(4) 만년의 표량(759~770)

 48세에 화주로 쫓겨난 두보는 그 후 약 10년 동안 각지로 떠돌며 심한 궁핍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59세에 서거했다. 동시에 이때는 당나라가 계속 쇠락했고, 겹치는 가뭄과 전란에 백성들은 더욱 도탄 속에 빠져들었다. 이에 두보는 자기의 간난을 백성들의 그것으로 일치시키고 인도주의 가 넘치는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더욱 완성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화주는 섬서성 화산 기슭에 있는 촌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더위와 잡무에 시달려 짜증을 내던 두보는 마침내 그 해(759) 가을 벼슬을 버리고 진주를 거쳐 동곡으로 갔고, 다시 겨울에는 촉의 험난한 길을 타고 성도로 깊이 들어갔다. 이 1년이 두보의 창작생활에서 가장 주목할 때라 하겠다. 화주를 중심한 혹심한 고난 속에서 그는 ‘심리 삼별’ 의 사회성이 짙은 작품을 썻고, <진주잡시> 20수를 위시하여 처절한 생활고를 그린 시와 아울어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성도에 도착한 두보는 상원 원년(760), 두제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원조를 얻어 환화계에 초당을 지었고 또 뜰에는 복숭아 들의 과일나무까지 심었다. 모진 고생과 방랑을 겪은 두보는 피로한 가족과 더불어 오래간만에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고 안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시에는 제법 안도감이 내보이기도 했다. 더욱이 <모옥위추풍소파가>에서 ‘천만간의 큰 집을 지어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을 다같이 즐겁게 해주고자’ 희망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성도에서의 소강상태도 오래가지 못했다. 762년 현종과 숙종이 죽고 대종이 자리에 올랐다. 한편 두보의 뒤를 봐주던 엄무가 장안으로 가자 지방의 군벌 서지도가 반란하여 성도 일대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두보는 다시 가족을 거느리고 재주 낭주 등지로 헤매어야 했다. 한편 광덕 원년(763) 정월, 북쪽에서는 역적의 두목 사조의가 죽고 약 8년을 끌던 안사의 난이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위구르나 토번들의 횡포로 사회적 불안은 여전했다. 마침 엄무가 다시 성도윤 겸 검남동서천절도사가 되어 성도로 돌아오자 두보도 다시 완화계의 초당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이때가 764년 두보의 나이 53세 때였다. 그리고 두보는 엄무의 추천으로 절도참모, 검교공부원외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때 두보는 폐병과 중풍에 쇠잔하여 공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의 고고한 성품은 속인들 틈에서 어물쩡하고 타협이나 하는 막부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듬해(765) 봄에 직을 사퇴하고 다시 완화계로 돌아왔다. 그러자 뜻밖에 엄무가 세상을 떠났다. 후견자를 잃은 두보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방랑의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갔다. 가주, 융주, 유주, 충주를 지나 운안까지 왔다. 이곳에서 신병이 더욱 심해져 두보는 해를 넘기고 이듬해(766) 늦봄에 기주로 향했다. 기주는 사천성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 부근에 있다. 이곳에서 두보는 대력 원년(766) 늦봄에서 대력 3년(768) 봄까지 약 2년간을 지냈다. 원두막같은 초라한 집에서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던 두보의 생활은 물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기주생활에서 그는 430수의 시를 지었다. 이 수는 그의 전집에 남아있는 약 2/10이 넘는 양이다. 특히 인생이나 사회나 국가의 모든 차원에서 간고를 몸소 체험한 두보가 죽기 수년전에 지은 이 시들은 낙조의 정밀과 장엄이 엿보인다. 그들 시에서는 전같이 노골적인 사회적 비판이나 분개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깊은 우수와 비애속에 선의와 애정이 감돌고 있다. 이제 두보는 외롭기만 했다. 이백도, 고적도, 엄무도, 그리고 많은 벗이나 지기들이 다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와 옉사람을 읊은 시가 두드러지게 많은 것도 말하자면 죽음을 수년 앞둔 인생의 총 결산이었다고나 할까? 대력 3년(768) 57세 정월에 기주를 떠난 두보는 강릉에 잠시 머물렀고, 세모에는 악주로, 이듬해에는 동정호에 들고, 여름에는 담주에 가서 대력 5년(770) 봄을 맞았다. 그러자 4월에는 지방 군벌의 난이 일어나 그는 다시 형주로 피했다가 다시 침주로 가려다가 도중 뇌양까지 왔다가 홍수에 길이 막혀서 다시 담주로 되돌아갔고, 겨울에 다시 배를 타고 나섰다가 담주, 악주 사이에서 그는 고난의 일생을 끝맺고 말았다.

두보의 인간과 그의 시

 두보(杜甫 712~770)를 시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을 통한 성인이란 뜻이다.그는 과연 위대한 문학가이자 최고의 시인이다.그는 냉철한 리얼리스트이자 위대한 휴머니스트이며 ,또 열렬히 충군애민하는 애국자이자 동시에 인자하고 성실한 가장이기도 했다. 두보는 철두철미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애인의 시인이었다.그는 스스로 뛰어난 유학자인 두예의 가계를 이어받았고 동시에 탁월한 시재를 발휘한 구심언의 후손임을 자부했다.따라서 그는 사상면에서나 시의 기교면에서나 우수한 유산을 물려받고 태어난 천품의 시인이었다. 동양적 휴머니즘의 결정인 유가의 살신성인 하겠다는 인애정신과 수기치인의 군자도를 성실히 지킨 두보는 시의 표현이나 기교에 있어서도 진지하고 기발하고 또 참신했다.'남을 감탄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편치 못하겠다' 던 그였다. 그는 한 자 한구절을 신중히 다졌고 또한 성운의 묘를 다했다.따라서 그의 시는 형식적 표현면에서도 최고의 일품이다. 육조대의 문학의 정화를 총집설한 《문선》을 깊이 연구하여 그 광채와 전통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든 그는 시에 있어서 자기만의 빛나고 새로운 경지의 창작을 이룩했던 것이다. 위대한 내용과 사상,탁왈한 표현과 기교가 조화된 두보의 작품은 동시에 전통이란 깊운 뿌리에서 자란 참신하고도 화사한 창조의 미를 마냥 자유롭게 피어나게 한 꽃같이 자연스럽고 신묘한 걸작이라 하겠다.

시대적 배경

 작품은 사람이 창조하는 것이다.그러나 작가와 더불어 작품은 역시 장소와 때와 민족성의 영향을지대하게 받게 마련이다.더욱이 두보 같은 리얼리스트의 작품은 시대와 사회를 충실히 그린 것으로, 바로 그때, 그 사회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특히 두보가 처했던 시기는 당제국이 최전성기에서 안사의 난을 계기로 급전직하 걷잡을 수 없이 쇠락하던 전환기로 ,급격한 사회변천과 온갖 모순이 두드러지게 노출되기 시작했던 때였다. 전란의 죽음과 이별, 곤궁과 기아를 동반한다. 이에 가장 고생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은 역시 일반 민중들이다.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던 두보는 이들은 끝없는 휴머니즘으로 옹호했고 반면 전란의 장본인인 역적들에게 끝없는 분노를 터뜨렸다.두보가 처했던 시대를 대략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겠다 .

(1) 전기(712~755)-안녹산의 난 이전

 두보가 출생하던 선천 원년 8월에 예종이 자리를 태자 융기에게 물림으로써 당나라는 현종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현종은 연호를 개원이라 고쳤고 개원 29년을 지나 이듬해 741년에는 다시 천보라고 개호했다.그 후 천보14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의 당나라는 가장 번성했던 시기라 하겠다. 당 현종은 원래가 영명한 성품을 타고났다.그는 등극하자 요숭(姚崇),송경(宋璟),장구령(张九龄)등의 명신을 등용하여 정사에 정려했으므로 당나라는 정치,경제, 군사,문화등 모든 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두보는 <억석>이란 시에서 회상한 바 있었다. 한편 당나라는 국토 확장전쟁에서도 거듭 승리를 거두었다. 원래부터 침략전쟁을 반대하던 두보는 <견회>에서 변경확대전쟁을 비판했다. 무력에 의한확장 정책은 독무다. 무력의 남용은 결국 천하를 난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다. 두보가 예리하게 비판한 대로다. ‘변경 확장의 무력정책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평화의 기운은 외지에서 떠나 뒤이어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 하지만 안녹산의 난이 있기 전까지 당나라는 이른바 성당의 문화적 전성기를 마냥 자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백과 두보를 정점으로 한 성당문학을 비롯하여 학술 사상은 물론 기타 서·화·음악 등 모든 예술이 발랄하고 자유롭게 발전하여 당시 모든 지식인은 마냥 자아를 뻗어나게 했다. 그러나 정점은 하락으로의 전환점이다. 치솟는 당나라의 국세는 그런대로 내부의 여러 모순을 점차로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개원 24년(736) 학자풍의 명재상 장구령이 실각하고 ‘입에는 꿀, 뱃속에는 칼을 품은’ 이임보가 실권을 잡게 되자, 당나라 조정은 날로 황폐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노경에 접어들면서 혼용해진 현종이 자기의 아들 수왕의 비였던 양태진을 맞아 양귀비라 높이고 그녀에게 빠져 일야 유연만을 일삼고 모든 대소의 정사를 이임보에게 맡김으로써 사회의 기강마저 혼탁하게 흐려지게 되었다. 천보 6년(747)에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할 목적으로 과거를 시행했다. 그러나 교활한 이임보는 한 사람의 합격자도 내지 않고 ‘야에는 슬기로운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현종을 기만했다. 이때에 두보도 과거에 응시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크게 분통했다. 이렇게 하여 당나라 조정은 악당들 손아귀에 놀아났고 차츰 모든 선비나 학자 및 지식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한편 국민과 유리된 당나라 조정은 부패와 방탕, 안일과 무능, 어둠과 실망 속에 급속도로 하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의 폭발이 바로 안녹산의 반란이였다.

(2) 후기(755~770)-안녹산의 난 이후

 천보 13년 11월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는 바야흐로 쇠망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보가 죽던 대종 대력 5년(770)까지의 약 15년간을 후반기로 보며, 당나라의 모순과 불평이 사실로서 노출되어 사회와 나라가 전란과 쇠퇴에 빠졌던 시기였다. 최고로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당나라가 일조에 암흑과 혼란 속으로 떨어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통치계급의 실책이라 하겠다. 두보는 다음과 같이 그의 시에서 비판했다.

  귀족들의 붉은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썩어 냄새를 피우고 있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딩굴고 있다.
  이렇듯 영화와 빈한이 지척을 두고 갈라지고 있으니
  그 처량한 느낌을 미루 다 말할 수가 없구나

 특히 두보는 여인행에서 당나라 통치계급의 무절제한 유락을 풍자했다. 백성들과 유리되고 안일과 부패에 젖은 그들은 마침내 끝장을 보게 되었다. 안녹산이 서북쪽의 1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불과 한 달도 못되어 낙양이 함락되었고 이어 반년도 못되어 수도 장안마저 적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현종은 촉으로 피난갔고, 양귀비마저 죽었는데다가 당나라의 위세가 땅에 떨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숙종이 자리에 올랐으나, 그도 별 수가 없었다. 위구르족의 힘을 빌어 적과 싸워야 했고, 따라서 숙종은 당나라의 인민과 재물을 위구르에게 적잖게 넘겨주기도 했다. <자치통감>에는 ‘성을 찾는 날 땅과 선비들은 당나라에 돌아왔으나, 금이나 비단 및 여자들은 위구르족에게 돌아갔다’ 고 있다. 약 7년 이상 소용돌이치던 안사의 난이 대종 광덕 원년(763)에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는 토번이 한바탕 장안에 쳐들어와 다시 난리를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두보의 후반기는 당나라의 쇠락과 사회적 혼란기였다. 이에 백성들과 더불어 두보는 고향을 버리고 객지로 유량하며 전란에 시달리는 한편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위대한 휴머니스트 두보는 그 모든 고난을 불후의 걸작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는 바로 절정에서 직하하는 당나라와 백성들의 고난의 결정이었다. 이상 두보의 시대를 훑어보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전기에 두보는 문학가로서의 폭넓고 다양한 바탕을 마련했고, 아울러 호매하고 활달한한 기백을 배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애국애민하는 휴머니스트 두보는 민족적 자존심과 도반에 빠진 백성에 대한 동포애를 시로써 발휘했고 아울러 무능과 부패에 젖은 통치계급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과 고발을 했던 것이다.

두보의 사상

 시대와 생활은 한 인간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절정으로 치솟아오르던 당나라가 안녹산의 반란을 계기로 급전 낙하하는 전환기에서 두보는 사회적으로 통치계급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전란의 비참과 역적의 포악으로 빚어진 암흑 난세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난을 목도했고, 개인적으로 자신이 바로 간난을 뼈저리게 맛보았던 것이다. 이에 천성이 선하고 성실한 두보는 그러한 암흑, 부조리, 악덕, 고난을 성실한 리얼리즘과 인간애가 넘치는 휴머니즘의 문학으로 승화 결정지었던 것이다. 두보의 사상의 바탕은 유가의 인애다. 두보는 스스로 유가임을 자첳ㅆ다. 비록 현실사회에 실망하여 스스로 ‘부유’니 ‘노유’니 하기도 했으나, 그는 평생을 두고 임금을 보좌하여 백성을 안락하게 해줄 수 있는 정치참여를 갈망했다. 이는 바로 수기치인과 충군애민의 유가정신이였다. 동시에 두보는 ‘절용애민’에 투철하여 위정계급의 부패, 무능, 낭비와 역적들의 포악, 난동을 격렬하게 미워했으며, 동시에 무절제한 변경확대정책에 의한 국민생활의 경제적 파탄과 생명 및 가정의 위협을 에누리없이 고발했다. 즉 두보의 인애사상은 철저한 평화와 ‘민위방본’ 과 ‘민위귀’의 사상이기도 했다. 특히 불의를 규탄하고 사회악을 고발하는 데 과감한 두보는 유가의 소극적인 면 ‘명철보신’이나 ‘궁즉독선기신’하고자 움츠러 들지 않고 끝까지 그의 휴머니즘의 정신을 발휘했다. 그가 좌습유로 있으면서 방관을 옹호하다가 숙종으로부터 쫓겨난 사실도 그가 신념의 사나이임을 충분히 증명하리라. 같은 난세를 산 왕유는 한적한 시를 산뜻하게 쓰며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두보는 추위와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고 살 집조차 없이 함난한 산길이나 시골길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땀범벅이 되면서도 끝내 현실의 비참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사랑의 피눈물로서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의 시를 섯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시성이라고 부른다. 두보는 성실한 인도주의자였다. 나의 고생을 초월하여 모든 동포의 고생을 구제하기를 제일의적으로 염원했다. 착하고 약하고 죄없는 모든 사람의 아픔이나 고난을 내것 이상으로 아프게 동정하고 공감했다. 그러나 반면에 강권자, 고식한 위정자들을 격렬하게 미워했다. ‘창자에 사무치도록 악을 미워한’ 두보였다. 비록 늙어서는 ‘나라 걱정에 눈물 흘리고 외로이 옷이나 수건 적시나’, 젊어서는 말타고 사냥도 했고, 또 역적들에게 잡혓다가 도망쳐 봉상으로 가서 숙종을 알현하기도 했다. 두보의 애국애민은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상의 성실성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성실성은 그의 시를 형식적으로도 대성시킨 정성과 노력의 연장이며, 선의의 결정이라 하겠다.

두보의 시

 작품의 사상성과 예술미가 최고로 조화를 이룬 것이 바로 두보의 시다. 위대한 사상이 치밀한 형식미에 일치한 것이다. 우선 두보는 시를 불후의 성사로 삼았다. ‘문장은 천고의 일’ 이라고도 했고, 특히 자식에게도 ‘시는 우리 집안의 일’ 이라고도 했다. 뿐만 아니라 두보는 삶 자체를 바로 시로 간주했던 것이다. ‘시를 읊으며 늙음을 보낸다’ ‘성령을 도야하는데는 다른 것이 없다. 오직 시를 창작하고 길게 읊조리면 된다’고 했다. 유가의 전통은 시악을 예교 덕치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시로써 인간성을 도야 순화하여 덕치의 바탕으로 삼고자한 것이다. 따라서 두보가 시를 높이고 평생의 대업으로 삼은 것도 말하지면 요순지치를 이상으로 하는 그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시를 평생의 일로 삼은 두보는 그를 배우고 짓기에 진지했다. ‘본성이 좋은 시를 짓고자 했으며, 시의 표현이 남을 감탄시키지 못하면 안심하고 죽을 수가 없노라’ 고 했다. 이백은 일기가성, 하늘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오듯 후련하게 시를 지었다. 그러나 두보는 세심하고 치밀하게 한 자 한 자 다졌다. 그렇다고 잘고 좁다는 뜻이 아니라, 형식이나 표현에 그만큼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고 기왕의 모든 유산을 충분히 섭취하되, 오직 자기만의 독창과 신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넓고, 심각하고 또한 심각하면서도 새롭고 기발했다. 그러기에 두보는 특히 형식미의 최고를 자랑하는 율시에 있어서는 중국 문학의 대표적 걸작을 무수히 지어냈던 것이다. 두보의 시를 종합적으로 평하면, 위대한 휴머니즘 사상을 적절한 형식으로 적응시킨 진지한 사실주의의 시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묘사는 냉철한 객관성을 지녔고, 언어는 정련되었고, 운율은 엄정하다.

참고문헌

  • <<이백(영원한 대자연인)>>, 안치, 신하윤 외 옮김, 이끌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