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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소년시절(1929~8.15광복 이전))
(청년시절(8.15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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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가을 강원도 건봉산 전투에 참전하고 있을 때, 동생 명희가 막노동을 하던 중에 맹장이 터진 채 일을 계속하다가 치료를 받지 못하여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동생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한 리영희에게 명희의 죽음은 군대에서 겪은 갖가지 부패상과 함께 그의 생애에 [[정신적으로 큰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1951년 가을 강원도 건봉산 전투에 참전하고 있을 때, 동생 명희가 막노동을 하던 중에 맹장이 터진 채 일을 계속하다가 치료를 받지 못하여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동생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한 리영희에게 명희의 죽음은 군대에서 겪은 갖가지 부패상과 함께 그의 생애에 [[정신적으로 큰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1951년 2월에 벌어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리영희가 몸담고 있었던 보병 제9연대가 저질렀다. 그는 이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리영희는 "처절한 전쟁의 비인간성‧반인간성‧반생명성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같은 집단적인 광기를 통해 목격하고 알게 된 나의 내면에는 전쟁과 군대, 그런 잔인무도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군대라는 이름의 인간집단들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증오심과 혐오가 나의 본성처럼 자리를 잡아갔어요."라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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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에 벌어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리영희가 몸담고 있었던 보병 제9연대가 저질렀다. 그는 이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리영희는 "처절한 전쟁의 비인간성‧반인간성‧반생명성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같은 집단적인 광기를 통해 목격하고 알게 된 나의 내면에는 전쟁과 군대, 그런 잔인무도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군대라는 이름의 인간집단들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증오심과 혐오가 나의 본성처럼 자리를 잡아갔어요."라고 회상한다.
  
 
리영희는 최전방에서 3년 반을 지내면서 제20연대에 배속되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리영희는 다른 장교들이 군수품을 빼내어 치부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에도 쉬는 시간이면 꾸준히 독서를 했다. 미국인 고문관들이 6개월마다 한 번씩 일본에 휴가를 다녀오는 편으로 목록을 주어 책을 사오도록 하여, 영어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이와나미 문고판 세계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으며, 착실하게 지식을 늘리고 세계관을 넓혀갔다.  
 
리영희는 최전방에서 3년 반을 지내면서 제20연대에 배속되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리영희는 다른 장교들이 군수품을 빼내어 치부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에도 쉬는 시간이면 꾸준히 독서를 했다. 미국인 고문관들이 6개월마다 한 번씩 일본에 휴가를 다녀오는 편으로 목록을 주어 책을 사오도록 하여, 영어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이와나미 문고판 세계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으며, 착실하게 지식을 늘리고 세계관을 넓혀갔다.  

2016년 12월 12일 (월) 21:32 판


리영희(李泳禧)
출생 1929.12.2
북한(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사망 2010.12.5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출생과 소년시절(1929~8.15광복 이전)

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근국은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 최희저는 지주의 딸이었다. 리영희가 태어난 1929년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20년에 이르는 암담한 때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평북 운산이나 삭주는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늘 소외되어 왔는데,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는 어느 지역 못지않게 혹심한 수탈을 당했다.

리영희가 5세부터 14세까지 10년 동안 살면서 유치원과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닌, 사실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삭주군 대관은 리영희의 '마음의 고향'이다. 리영희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은 지리적으로는 첩첩산중이었지만 문명개화는 남쪽 지역보다 훨씬 앞섰다. 중국을 통해 선교사가 드나들면서 기독교가 일찍부터 터를 잡았고, 그로 인해 서양문물이 비교적 일찍 수입되었다. 그 때문에 평등의식이 강했다.

리영희가 자란 1930년대 조선의 상황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참담한 시대였다. 그런 속에서도 평안도 산골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자라고 식민지 교육이나마 교육은 이루어졌다. 안정된 가정에서 태어난 리영희는 당시로서는 드문 유치원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면장을 지낸 할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개명한 유지였고, 어머니는 벽동군의 거부로 알려진 천석꾼의 딸이었으며, 구한말 신식 교육제도에 따라 아버지는 의주에 설립된 농림학교를 나와 평북 영림서의 공무원으로 근무하여, 지역에서는 상류 계층이 되어 리영희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심성이 고운 편이었고, 반대로 어머니는 성격이 괄괄한 여장부였다.

리영희는 당시 일제의 창씨개명으로 인하여 평강호강(平江豪康)이 되었다.

리영희는 머리가 꽤 뛰어난 편이었는지, 소학생(초등학생) 시절에 늘 전교 1,2등을 다투었다. 그러나 대관면의 수재로 소문 난 그도 급장은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리영희는 이를 본인의 성격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교만해졌으며, '모'가 있었던 인간적 결점 때문이 아닌지 회상하고 있다. 리영희는 스스로 가족의 '민중사'라고 평가한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이 두 사건은 그의 성장기 의식에 큰 영향을 주고, 비판과 저항의 정신을 갖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머슴 문학빈 사건외삼촌 최인모 사건이다.

리영희는 어머니에게서 이 두 가지 한 맺힌 가족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리영희의 어머니는 자기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은 물론 아버지의 목숨까지 머슴(독립군 문학빈)에게 빼앗긴 데 대한 증오와 친정오라버니의 정신 나간 행동에 대한 원망을 평생 안고 살았다. 리영희는 친척을 통틀어 존경할 만한 인물이 별로 없는데, 오직 이 외삼촌만을 평생 존경해 왔고, "나의 생애에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됐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 자신의 내부에 외가의 불행에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정신적 '내면의 원시시대'에서 '무의식의 근거'가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회상한다.

1944년 봄, 소학교를 졸업한 리영희는 신의주 사범대학과 경성공립학교 두 군데 모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와 6학년 담임 일본인 교사의 뜻으로 경성공립학교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취업을 위해 경성공립학교 전기과를 택했을 터였고, 서울 대방동에 소재한 이 학교는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교과체계로, 졸업하면 3종 전기사 자격증을 주기 때문에 취업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리영희의 서울 유학생활은 고달팠다. 2학년 때까지 흑석동에서 하숙을 하며 십 리나 걸어 학교에 다녔다. 일제 말기여서 식량은 배급제로 하루 세 끼 밥을 먹기 어려웠다. 만주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한때는 을지로 청계천가로 하숙을 옮겨 전차로 통학하기도 했다.

학업은 3학년을 끝으로 일절 중단되고 4학년부터는 전시동원체제에 따라 노동에 동원되었다. 리영희는 아무리 전쟁 막바지의 전시체제라고 하지만 아직 솜털도 다 벗지 못한 소년학생들의 공부를 아예 작파시키고 노동에만 동원하는 일본 군국주의에 하염없는 분노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리영희는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서, 집에 오면 하숙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일밖에 없었다. 리영희는 당시 본인이 대담함‧적극성‧모험심 같은 것이 없는 소년이었고, 흔히 말하는 '공부벌레'의 전형이었다고 회상한다.

리영희는 일본인 학생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일본어를 익혀 일본문학은 물론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의 명저들을 읽을 수 있었고, 한문 교육이 강했던 덕으로 당시(唐詩)를 비롯한 중국 고전을 제법 독파하게 되었다.


청년시절(8.15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며)

리영희는 고향에서 광복을 맞았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근로동원과 배고픔으로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을 탈피하고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 8월 10일 몇 차례 기차를 바꿔 타고 10시간이 걸려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관계로 창성군 청산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리영희는 이 마을에서 8월 16일에야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리영희는 17세였다.

리영희는 날마다 소학교 교정에서 열리는 해방 축하모임에 참석하여 면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애국가를 불렀다. 하지만 민족해방이나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거대한 가치보다는 굶주리지 않고 실컷 먹을 수 있고, 근로동원이 아닌 공부하는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리영희는 학교들이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광복되던 해 11월경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6년제가 된 고등학교 5학년에 편입하고 이듬해 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미군정 체제가 수립되면서 학교가 미국식으로 편제되었다. 1946년에 들어 북쪽에서는 토지개혁이 시작되고 일제에 협력했던 지주‧기독교신자들이 속속 이남으로 도피하였다. 날마다 군중집회와 소련군의 환영행사가 열렸다.

리영희는 청산면의 중학교 학생모임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의 사명과 역할 등에 관한 토론과 집회를 열었다. 또 한글 야학을 시작하고 루소의 『에밀』, 스미스의『자유론』등을 읽었다. 그 무렵 중학교 재학 이상의 학력자는 청산면 전체를 통틀어 10여 명에 불과했고,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자는 리영희와 강영훈 둘뿐이었다.

어느 날 리영희는 학생 6명과 함께 군(郡) 트럭에 실려 경찰서에 끌려갔다. 닷새 만에 풀어주면서 앞으로 토론회 같은 것을 하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다. 리영희가 겪은 첫 유치장 신세였다.

리영희의 아버지는 영림서의 공무원이었는데도 쫓겨나지 않고 2년이나 더 현직에서 근무하였다. 리영희의 부모는 2년 뒤에야 막내아들 명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5학년에 편입된 리영희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역사와 그동안 폐지되었던 한국어를 다시 배우게 되었지만 혼란 속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광복이 되었지만 이 시기 해방정국은 엉망진창이었다. 친일파뿐 아니라 기회주의자‧간상배‧폭력배들까지 날뛰면서 미군정이 접수한 해방정국은 무질서와 혼미상태 그대로였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그나마 생필품이 부족하였다. 해방을 맞아 해외동포들이 속속 귀환하고, 이북에서 수백만 명이 서울로 밀려오면서 서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리영희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형편없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좌절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학교를 다니고 먹고 살기 위해 모진 세파에 몸을 맡겼다.

남대문시장에서 사제담배나 성냥을 팔아 그날그날 생계를 유지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로 화폐가치가 폭락한 탓에 집에서 올 때 가져온 돈은 금세 동이 나고, 고향에서의 송금도 끊겼다. 그래서 가장 손쉽게 택한 것이 사제담배와 성냥팔이였다. 사제담배를 장에서 팔다 경찰에 쫓기거나 붙잡혀 압수당하기도 했다.

리영희는 매우 궁핍한 삶으로 책을 살 여유가 없었다. 이 시기 충무로 3,4가에 자리잡기 시작한 책방에서 'THE USE OF LIFE'(당시 리영희 학교 영어 교과서)라는 책을 훔쳤는데, 이 사건은 두고두고 리영희의 마음을 괴롭혔다.

어린 나이에 너무도 살벌하고 궁핍한 서울생활을 하던 1946년 어느 날, 리영희는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국립해양대학 창설 신입생 모집공고를 보게 되고, 지원하여 입학하였다. 새로 창설된 국립해양대학은 제1기생으로 항해과 50명, 기관과 50명을 뽑았는데, 리영희는 항해과에 지원하였다. 어엿한 4년제 대학이었지만 변변한 교사 하나 없이 가건물에서 수업을 해야 했으며, 교수진 또한 지극히 빈약했다. 전공학과를 제외한 교양학과는 대부분 서울의 다른 대학 강사들에 의존하였다. 처음 일 년 동안의 인천생활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일 년 뒤에 내려간 군산의 실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호남지역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는 항구로 번창한 도시였지만, 해방 뒤에는 여느 항구도시처럼 황량한 모습이었다. 교과내용이나 교육환경도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생활고에 몰린 리영희가 해양대학에 몸담고 있는 동안 해방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어수선해졌다. 1947년 봄이 되면서 찬탁과 반탁은 전국적인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는데, 리영희는 반탁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훗날 리영희는 "'신탁통치 찬성 = 공산당' 이라는 당시 정치투쟁의 단순논리 의미를 내가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몰랐다."라며 신탁통치 반대에 관해 생각이 바뀌었다.

리영희는 해양대학 시절 학교 수업에 열중하여 천문항법과 기상‧선박의 운용실무, 출입항 사무 등을 익혔다. 그리고 전공과는 다른 취미에서 영문 소설작품에 심취했다.

리영희는 해양대학 재학시절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우연히 개입하게 되었는데, 그는 훗날 "뜻하지도 않게 인생에서 첫 실전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제주4.3사건 시기였는데, 제주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리영희는, 부산에서 석탄을 싣고 인천으로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고 시행 중에 부산으로 회항하여 중무장한 국군 1개 대대를 싣고 여수항으로 항해했다. 배가 신시가지 쪽으로 접근하자 육지에서 반란군이 총격을 가했다. 배에 탄 부대가 박격포탄을 퍼부으며 반격하자 반란군이 퇴각했다. 선내의 부대가 상륙하여 추격하자 그들은 기관차를 타고 퇴각했다. 리영희는 다른 선원들과 시내로 올라가 이런 전투 장면을 지켜봤다.

혼탁한 시대 중, 백범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평소 김구를 매우 존경하고 사랑했던 리영희는 충격을 받았으며, 국민장에 맞추어서 열린 군산시의 추모식에 참석하여 추모가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리영희는 1950년 3월에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하였다. 적성이 맞지 않아서였는지 성적은 학급에서 중간쯤이었다. 당시 21세였다. 대학을 졸업한 리영희는 앞길을 궁리하던 중 친구 부친이 교장으로 있는 경북 안동 소재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하였다. 그동안 연마해온 영어 실력이 좋아 교사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친구 부친인 교장의 배려로 기와집 사택이 주어져 당분간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으나, 3개월 뒤 6.25전쟁이 터지고 리영희는 군에 지원 입대하였다.

당시 전황은 팔공산전투가 한창일만큼 인민군은 한반도를 거의 점령하고 대구지역에서 총공세를 펴는 상황이었다. 리영희는 전란을 맞아 학교가 문을 닫고, 가족과 함께 안동을 떠나 대구에 도착하여 교육구청에 들렀는데, 여기서 '유엔군 연락장교단 모집' 공고문을 보고 지원하였다. 특히 영어교사를 우대한다는 공고가 있었고, 미군 상대 통역장교가 된다는 것은 당시 입대를 앞둔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이었기에, 리영희는 모집에 지원하여 입대하였다.

국군의 반격으로 전선이 북상하는 중에 임관된 리영희는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에 배속되었다. 전투부대 배속과 함께 지리산‧속리산 일대의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리영희는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부대에 배치되었지만, 당시 통역장교는 반은 민간인 반은 군인 꼴의 기묘한 신분이었다. 정식명칭은 '유엔군연락장교'였지만, 유엔군에도 미군에도 속하지 않았다. 계급장은 장교였지만, 당번병도 없었고 군에서 서자 취급을 받았다.

리영희는 전쟁을 겪으면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비인간적 행위, 휴머니즘을 말살하는 폭력, 사병에 대한 장교의 횡포, 민간인에 대한 군대 및 군인의 거드럭거림 등을 겪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늘 반대하고 항의했다. 그는 "휴머니즘에는 인종이나 민족, 국가의 차별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동족끼리 싸우고 죽이는 비참한 전쟁에 분노와 처연함을 느끼던 전쟁 무렵,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리영희는 군고위층의 부패와 타락에 분노했다.

1951년 가을 강원도 건봉산 전투에 참전하고 있을 때, 동생 명희가 막노동을 하던 중에 맹장이 터진 채 일을 계속하다가 치료를 받지 못하여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동생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한 리영희에게 명희의 죽음은 군대에서 겪은 갖가지 부패상과 함께 그의 생애에 정신적으로 큰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1951년 2월에 벌어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리영희가 몸담고 있었던 보병 제9연대가 저질렀다. 그는 이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리영희는 "처절한 전쟁의 비인간성‧반인간성‧반생명성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같은 집단적인 광기를 통해 목격하고 알게 된 나의 내면에는 전쟁과 군대, 그런 잔인무도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군대라는 이름의 인간집단들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증오심과 혐오가 나의 본성처럼 자리를 잡아갔어요."라고 회상한다.

리영희는 최전방에서 3년 반을 지내면서 제20연대에 배속되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리영희는 다른 장교들이 군수품을 빼내어 치부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에도 쉬는 시간이면 꾸준히 독서를 했다. 미국인 고문관들이 6개월마다 한 번씩 일본에 휴가를 다녀오는 편으로 목록을 주어 책을 사오도록 하여, 영어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이와나미 문고판 세계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으며, 착실하게 지식을 늘리고 세계관을 넓혀갔다.

리영희의 영어회화 능력은 꾸준한 노력으로 더욱 유창해졌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이 대구 이남과 부산지역을 시찰할 때에는 수많은 통역장교들 가운데 그가 선발되어 통역을 맡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로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 휴전 후 육군 장교는 대체로 3~4년이면 제대하였으나, 통역장교는 휴전 뒤에도 3년 반을 더 복무해야 했다.

리영희는 제11단장에게서 공로은성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훈장은 전란의 부실한 병사관리 때문이었는지 군 경력부에서 삭제되었다.

리영희는 후방 근무처로 내려왔고, 이후 제2군사령부에 이어 제5관구사령부, 육군군의학교, 육군인쇄공창 등으로 옮겨 다녔다.

당시 일반적으로 장교가 제대하는 방법으로 국회의원 출마와 외국 유학 그리고 고등고시 합격의 길이 있었다. 리영희는 본인 처지에 가장 현실적인 고등고시를 준비하였다. 외무고시를 준비하였는데, 군 업무 중에 틈틈이 시험공부를 했지만, 얼마 뒤 예편이 되어서 시험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1955년, 국립해양대학 재학 시절 묵었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한 처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가 바로 평생을 함께 하게 된 아내 윤영자이다. 두 사람은 1956년 군산에서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윤영자는 전통적인 현모양처 상이었다.

리영희는 입대한 지 만 7년이 되는 날, 예편과 함께 소령으로 진급되어 제대하였다. 29세, 갓 결혼한 아내와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는 가장의 몸이었다. 그는 예편 1개월 전에 합동통신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리영희는 드디어 기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