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몽씨 일가)
잔글 (일가의 몰락)
5번째 줄: 5번째 줄:
  
 
===일가의 몰락===
 
===일가의 몰락===
황제의 총애를 받던 몽씨 일가의 몰락은 시황제의 죽음과 환관 조고(趙高, zhào gāo)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거부령의 지위를 지닌 조나라 왕족 조씨의 먼 일족인 조고라는 인물이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에 대한 충성보다는 몰래 공자 호해(胡亥, hú hài)를 섬기는 인물이였으며, 호해에게 죄를 판결하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조고가 큰 죄를 지었을 때, 진시황은 몽의에게 법대로 처리할 것을 명하였고 그에 따라 몽의는 조고에게 사형을 판결한다. 하지만 진시황은 조고의 능력을 높이 사 관직과 직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시황제 37년, 황제가 전국을 순행하던 도중 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고, 몽의에게 수도로 돌아가 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안타깝게도 몽의가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제는 사구(沙丘)에서 이미 붕어하였다. 측근에서 보좌하던 승상 이사, 막내아들 호해, 중거부령 조고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조고는 호해와 모의하여 맏아들 부소를 대신하여 호해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전에 자신을 법에 따라 사형에 판결한 몽의를 죽이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호해가 태자에 즉위한 후, 사자를 보내 부소와 몽염에게 죄를 물어 죽음을 내렸다. 부소는 이를 받아들여 자살했으나, 몽염을 의심을 품고 다시 한 번 명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관리는 몽염을 관리에게 넘겨 투옥시켰고, 부소의 죽음을 전해들은 호해는 몽염을 풀어주려 하였으나 몽씨 일가 권력의 회복을 두려워한 조고는 호해에게 충성하는 척하며 몽씨 형제를 죽일 계책을 세운다. 조고는 이전 호해를 태자로 세우는데 있어 반대한 몽의의 과거를 비난하며 몽의를 죽일 것을 청하였고, 호해는 몽의 또한 투옥하였다. 시황제의 장례가 끝난 후, 태자 호해는 즉위하여 2세 황제가 되었다. 자영(子嬰)이 간언하며 몽씨 일가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조고에 의해 그들의 죄와 허물을 밤낮으로 들어온 호해는 이를 거절하였다. 호해는 투옥되어있는 몽의에게 사자를 보내 이전 자신의 황제 즉위에 대해 비난한 행동을 근거로 불충을 물어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몽의는 태자 부소의 즉위는 선제의 뜻이였을 뿐이며, 정당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사자는 호해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몽의를 사살하였다. 이어서 호해는 몽염에게도 사자를 보내는데, 몽의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연좌를 들먹이며 몽염에게 죽음을 명하였다. 몽염은 죽음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시황제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간언을 전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사자는 거절하며 형을 집행하였다. 죽음에 대해 다소 억울함을 느낀 몽염이였지만, 만리장성 축조를 통해 지맥을 끊어 놓은 것을 죄라 생각하며 몽염은 죽음을 맞이한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서 진의 천하통일 후 전쟁의 상처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평화를 도모하는데 간언하지 않고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만리장성 축조에 노역을 부과한 몽염, 몽의 형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평하였다.
+
황제의 총애를 받던 몽씨 일가의 몰락은 시황제의 죽음과 환관 조고(趙高, zhào gāo)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거부령의 지위를 지닌 조나라 왕족 조씨의 먼 일족인 조고라는 인물이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에 대한 충성보다는 몰래 공자 호해(胡亥, hú hài)를 섬기는 인물이였으며, 호해에게 죄를 판결하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조고가 큰 죄를 지었을 때, 진시황은 몽의에게 법대로 처리할 것을 명하였고 그에 따라 몽의는 조고에게 사형을 판결한다. 하지만 진시황은 조고의 능력을 높이 사 관직과 직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시황제 37년, 황제가 전국을 순행하던 도중 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고, 몽의에게 수도로 돌아가 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안타깝게도 몽의가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제는 사구(沙丘)에서 이미 붕어하였다. 측근에서 보좌하던 승상 이사, 막내아들 호해, 중거부령 조고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조고는 호해와 모의하여 맏아들 부소를 대신하여 호해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전에 자신을 법에 따라 사형에 판결한 몽의를 죽이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호해가 태자에 즉위한 후, 사자를 보내 부소와 몽염에게 죄를 물어 죽음을 내렸다. 부소는 이를 받아들여 자살했으나, 몽염은 의심을 품고 다시 한 번 명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관리는 몽염을 관리에게 넘겨 투옥시켰고, 부소의 죽음을 전해들은 호해는 몽염을 풀어주려 하였으나 몽씨 일가 권력의 회복을 두려워한 조고는 호해에게 충성하는 척하며 몽씨 형제를 죽일 계책을 세운다. 조고는 이전 호해를 태자로 세우는데 있어 반대한 몽의의 과거를 비난하며 몽의를 죽일 것을 청하였고, 호해는 몽의 또한 투옥하였다. 시황제의 장례가 끝난 후, 태자 호해는 즉위하여 2세 황제가 되었다. 자영(子嬰)이 간언하며 몽씨 일가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조고에 의해 그들의 죄와 허물을 밤낮으로 들어온 호해는 이를 거절하였다. 호해는 투옥되어있는 몽의에게 사자를 보내 이전 자신의 황제 즉위에 대해 비난한 행동을 근거로 불충을 물어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몽의는 태자 부소의 즉위는 선제의 뜻이였을 뿐이며, 정당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사자는 호해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몽의를 사살하였다. 이어서 호해는 몽염에게도 사자를 보내는데, 몽의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연좌를 들먹이며 몽염에게 죽음을 명하였다. 몽염은 죽음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시황제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간언을 전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사자는 거절하며 형을 집행하였다. 죽음에 대해 다소 억울함을 느낀 몽염이였지만, 만리장성 축조를 통해 지맥을 끊어 놓은 것을 죄라 생각하며 몽염은 죽음을 맞이한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서 진의 천하통일 후 전쟁의 상처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평화를 도모하는데 간언하지 않고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만리장성 축조에 노역을 부과한 몽염, 몽의 형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평하였다.

2018년 6월 16일 (토) 16:40 판

몽염(蒙恬, méng tián)

몽씨 일가

몽모 - 몽무 - 몽염, 몽의에 이르기까지 몽씨 일족은 3대에 걸쳐 진나라를 보좌한 일가이다. 몽모(蒙驁)는 본래 제나라 사람으로서, 진나라 소왕을 섬기면서 상경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몽모의 아들 몽무(蒙武) 또한 시황제 24년 진나라 부장군으로서 초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몽염은 어렸을 적부터 형벌과 법률을 배워 소송 문건을 처리하는 일을 하였으나, 시황제 26년 몽염은 가문 대대로 장군을 지내온 관계로 장수로 즉위하게 된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 한 후에 몽염에게 30만 군사를 데리고 북쪽으로가서 융적을 쫓아내고 하남을 차지하여 장성을 쌓게하였다.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건축된 요새인 장성은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그 거리가 1만여 리가 되었다. 몽염은 장성 건축을 위해 십년 가까이 군대를 국경 밖에서 관리하였고 상군(上郡)을 근거지로 주둔하였다. 시황제는 몽씨 일족을 매우 존중하였고 남달리 아끼며 신임하였는데, 몽염의 남동생 몽의(蒙毅) 또한 시황제의 총애를 받아 시황제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조부인 몽무와 같은 상경의 벼슬을 하였다. 몽염이 궁궐 바깥의 일을 처리하였다면 몽의는 궁궐 내부의 정책 수립과 같은 일들을 맡았다. 시황제에게 충신의 평을 받고 있었기에, 여러 장수와 대신들도 그들과 적대관계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일가의 몰락

황제의 총애를 받던 몽씨 일가의 몰락은 시황제의 죽음과 환관 조고(趙高, zhào gāo)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거부령의 지위를 지닌 조나라 왕족 조씨의 먼 일족인 조고라는 인물이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에 대한 충성보다는 몰래 공자 호해(胡亥, hú hài)를 섬기는 인물이였으며, 호해에게 죄를 판결하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조고가 큰 죄를 지었을 때, 진시황은 몽의에게 법대로 처리할 것을 명하였고 그에 따라 몽의는 조고에게 사형을 판결한다. 하지만 진시황은 조고의 능력을 높이 사 관직과 직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시황제 37년, 황제가 전국을 순행하던 도중 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고, 몽의에게 수도로 돌아가 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안타깝게도 몽의가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제는 사구(沙丘)에서 이미 붕어하였다. 측근에서 보좌하던 승상 이사, 막내아들 호해, 중거부령 조고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조고는 호해와 모의하여 맏아들 부소를 대신하여 호해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전에 자신을 법에 따라 사형에 판결한 몽의를 죽이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호해가 태자에 즉위한 후, 사자를 보내 부소와 몽염에게 죄를 물어 죽음을 내렸다. 부소는 이를 받아들여 자살했으나, 몽염은 의심을 품고 다시 한 번 명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관리는 몽염을 관리에게 넘겨 투옥시켰고, 부소의 죽음을 전해들은 호해는 몽염을 풀어주려 하였으나 몽씨 일가 권력의 회복을 두려워한 조고는 호해에게 충성하는 척하며 몽씨 형제를 죽일 계책을 세운다. 조고는 이전 호해를 태자로 세우는데 있어 반대한 몽의의 과거를 비난하며 몽의를 죽일 것을 청하였고, 호해는 몽의 또한 투옥하였다. 시황제의 장례가 끝난 후, 태자 호해는 즉위하여 2세 황제가 되었다. 자영(子嬰)이 간언하며 몽씨 일가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조고에 의해 그들의 죄와 허물을 밤낮으로 들어온 호해는 이를 거절하였다. 호해는 투옥되어있는 몽의에게 사자를 보내 이전 자신의 황제 즉위에 대해 비난한 행동을 근거로 불충을 물어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몽의는 태자 부소의 즉위는 선제의 뜻이였을 뿐이며, 정당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사자는 호해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몽의를 사살하였다. 이어서 호해는 몽염에게도 사자를 보내는데, 몽의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연좌를 들먹이며 몽염에게 죽음을 명하였다. 몽염은 죽음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시황제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간언을 전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사자는 거절하며 형을 집행하였다. 죽음에 대해 다소 억울함을 느낀 몽염이였지만, 만리장성 축조를 통해 지맥을 끊어 놓은 것을 죄라 생각하며 몽염은 죽음을 맞이한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서 진의 천하통일 후 전쟁의 상처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평화를 도모하는데 간언하지 않고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만리장성 축조에 노역을 부과한 몽염, 몽의 형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