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의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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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는 귀족들을 억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당이 북주 이후 이어온 8주국 중심의 귀족정치에서 벗어나 문인 중심의 관료체제로 발전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서, 측천무후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의 치라고 불리며, 과거제 정비 등을 통해 중국을 문인 출신의 관료 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꾸어 당의 전성기인 개원의 치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주 이후 당 초기까지 오늘날의 산시성과 간쑤성 지역인 관중과 농서 일대를 중심으로 한 관롱귀족 집단이 최상위 지배층을 이루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비록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강했지만, 신분에 관계 없이 능력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정치를 약화시키고 행정적 통일성과 효율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닌다. 그에 따라 무후의 통치기에는 과거 출신자가 대거 등용되었는데, 요숭, 송경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또한 현종 시대의 개원의 치를 이끈 인물들이기도 하다.

무측천은 전시 제도를 도입하는 등 과거제를 정비하였으며, 서적을 간행하여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675년 무측천은 문인과 학사를 소집하여 《현람》, 《고금내범》, 《백료신계》, 《신궤》, 《유성전)》, 《효자전》, 《내범요략》, 《악서요록》 등의 서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편찬하였다. 그리고 이들 학자들을 정사에 참여시켜 재상의 권한을 견제했다. 무측천의 통치기에는 과거 응시자가 크게 늘었으며, 서적의 보급은 문화 발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측천무후는 적인걸, 장간지, 환언범, 경휘 등 유능한 관리들을 중용하여 정치 개혁을 실시해 경제와 문화 발달을 이끌었다. 무후는 667년 건의십이사를 고종에게 건의하였는데, 이는 개혁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무후는 관리들의 감찰을 엄격히 하여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여 정부의 기강을 바로세우려 하였다. 또한 농업을 권장하여 농서를 편찬하여 보급하였다. 또한, 무후는 대외 정책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66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백제에 군대를 파견하여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96년에는 거란의 족장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를 점령하자 군대를 보내 697년 이를 물리쳤다. 또한 스스로 노자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도교를 장려하던 당 황실과는 달리 무 측천은 불교를 중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