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주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화민국에서의 민권주의)
(중화민국에서의 민권주의)
54번째 줄: 54번째 줄:
 
해제되고 정당활동과 보도,집회의 자유가 부분적이나마 허용되게 되고 1996년 첫 총통 직선제 선거가 열리고 <br>
 
해제되고 정당활동과 보도,집회의 자유가 부분적이나마 허용되게 되고 1996년 첫 총통 직선제 선거가 열리고 <br>
 
2000년에 두번째 직선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br>
 
2000년에 두번째 직선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br>
결론적으로 중국은 많은 인구, 정치의식이 희박한 절대다수의 농민, 교통문제 등의 이유로 인민의 참정권을 <br>
 
제한하고 공산당 절
 
 
 
  
 +
결론적으로 양안 모두 쑨원의 삼민주의를 자신들이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br>
 +
중국은 많은 인구, 정치의식이 희박한 절대다수의 농민, 교통문제 등의 이유를 핑계로 인민의 <br>
 +
권리를 제한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실시해오고 있으며 대만 국민당은 반공 등 안보상의 이유를 <br>
 +
핑계로 폭압적인 군사독재 정권을 이어오다 국민들의 저항에 의해 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민권<br>
 +
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참조==
 
==참조==

2016년 12월 22일 (목) 00:14 판

개요

민권주의

본래 유럽과 미국의 민주공화국에서 실현된 “주권재민”에 따라 쓰여진 개념이나 일반적으로 쑨원이 창조한 정치 이상인 “삼민주의” 가운데
한 가지를 가리킨다. 민권주의는 쑨원이 제출한 삼민주의 가운데 핵심으로, 정치혁명으로써 민국창립을 위해 봉건군주제도의 타파, 자산계
급의 민주공화제 실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안은 당시 혁명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핵심적 이론이
되었다. 또한 단지 선거권만이 아닌 모든 인민 누구나 다 같이 공유하는 민권의 개념으로써 파면권과 창제권, 복결권까지 모두 인민의 권리
로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서구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던 진일보한 개념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제1의 민권으로써 선거권
과 제2의 민권인 파면권으로 인민이 정부를 밀고 당기는 양방향 조정이 가능하다고 하였고, 제3의 민권인 창제권과 제 4의 민권인 복결권으로
법률의 유지 및 폐지, 개정등의 권한이 인민에게 있음을 선언하였다.

손문은 이 네 가지 민권이 갖추어져야 완벽한 직접민권이며, 전민정치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일반 인민들이 선거에 참여하고 그 이후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을 때의 민권은 간접민권이며, 대의정이라고 하였다. 이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 실망하고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며 직접민권주의를 추구하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선거권, 파면권, 창제권, 복결권 이 네 가지 민권이 곧 “정권”이며, 정부는 이 일을 처리하는 “공권”을 가지며 공권은 곧 행정권,입법권,사법권,
고시권, 감찰권의 분리된 5권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주요내용

혁명가 쑨원 (孫文Sun Wen)
출생-사망
1866년 11월 12일- 1925년 3월 12일
수상 :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경력 :
중화혁명당 창설
1912.01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1894 흥중회 조직

민권시대
주권재민
민권정체
전민정치
혁명정서론
정당정치론
권능구분론
지방자치론
오권헌법론
민권정치조직

민권주의 영향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민권주의

마오쩌뚱은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신민주주의 이론과 삼민주의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로, 민권주의는 무산계급의 인민민주 독재로, 민생주의는 「토지는 경작자에게」라는 내용으로 바뀌어 신민주주의 기본이념으로 그대로 쓰여졌다. 그러나 현실은 전국인민대표는 오로지 공산당원들만 만 투표에 참여하며 일반 인민은 기본적인 참정권조차 없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 지방선거에 제한적으로 참정권이 주어졌다.

중화민국에서의 민권주의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령 기록을 세운 나라다.
1949년 부터 1987년 까지 무려 38년 간 전시에 준하는 계엄령 상태였다.
참정권과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장개석은 1975년 죽을때까지 사실상 대만의 황제였다.[1]


부총통이 남은 잔여 임기를 채운 후에 그의 아들 장경국이 그 뒤를 이어 받았다.
강압적인 무력 통치 사회가 이완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건 한국과 마찬가지로 최고 지도자의 사망이었고
한국의 5.18과 비슷한 민주화 운동이었던 "메이리따오"사건 등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고 정당활동과 보도,집회의 자유가 부분적이나마 허용되게 되고 1996년 첫 총통 직선제 선거가 열리고
2000년에 두번째 직선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양안 모두 쑨원의 삼민주의를 자신들이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중국은 많은 인구, 정치의식이 희박한 절대다수의 농민, 교통문제 등의 이유를 핑계로 인민의
권리를 제한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실시해오고 있으며 대만 국민당은 반공 등 안보상의 이유를
핑계로 폭압적인 군사독재 정권을 이어오다 국민들의 저항에 의해 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민권
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참조

『삼민주의』쑨원지음/김승일(외)옮김,범우사,2000년
『청년쑨원』펄S.벅/은하랑옮김,길산,2011년

『모택동선집1,2』김승일 옮김,범우사,1991

  1. 장개석이 죽었을때 대만정부는 공식적으로 붕조(崩殂)라고 하였고 장개석 기념관 남북으로 있는 거대한 전각의 기와는 황제만이 쓸수있다는 황색 기와로 도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