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파투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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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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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 14일 중공 중앙, 「당외 인사들의 당정 각 부문 사업에 대한 비판을 보도하는 것에 관한 지시」 발표. "당외 인사들의 잘못된 비판에 대해, 특히 우경분자의 의견에 대해 지금 당장은 반박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하도록 놔두어라. 우리의 각 지역 신문은 꾸밈없이 지속적으로 당외 인사의 의견을 보도해야 한다. 특히 우경분자와 반공분자들의 언론을 말이다. 반드시 원래대로, 가감없이 보도해서 대중들에게 그들의 진면목을 알려야 한다. 이는 대중을 교육하고 중간분자들을 교육하는 데 아주 좋을 것이다." 이 발표에서 정풍운동 이래 처음으로 '우경분자', '반공분자'라는 개념이 출현함.  
 
*1957년 5월 14일 중공 중앙, 「당외 인사들의 당정 각 부문 사업에 대한 비판을 보도하는 것에 관한 지시」 발표. "당외 인사들의 잘못된 비판에 대해, 특히 우경분자의 의견에 대해 지금 당장은 반박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하도록 놔두어라. 우리의 각 지역 신문은 꾸밈없이 지속적으로 당외 인사의 의견을 보도해야 한다. 특히 우경분자와 반공분자들의 언론을 말이다. 반드시 원래대로, 가감없이 보도해서 대중들에게 그들의 진면목을 알려야 한다. 이는 대중을 교육하고 중간분자들을 교육하는 데 아주 좋을 것이다." 이 발표에서 정풍운동 이래 처음으로 '우경분자', '반공분자'라는 개념이 출현함.  
 
*1957년 5월 19일 베이징대학 학생들 '민주의 벽', '5·19 민주운동'
 
*1957년 5월 19일 베이징대학 학생들 '민주의 벽', '5·19 민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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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 27일을 전후로 베이징대학, 칭화대학에서 '하이드공원 식 자유토론' 제창. 반혁명분자 숙청이라는 주제와 함께 정치보도원 취소, 민주학교 건설, 형식만 따르는 졸업설계 반대, 촌뜨기 지도자 파면, 당위원회를 교학관리에서 제외 등의 주제를 놓고 토론.
 
*1957년 6월 8일 마오쩌둥, 『인민일보』에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설 발표. 「우파분자의 광분한 진공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역량에 관한 지시」
 
*1957년 6월 8일 마오쩌둥, 『인민일보』에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설 발표. 「우파분자의 광분한 진공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역량에 관한 지시」
  

2018년 8월 21일 (화) 20:26 판

연표

  • 1953년 제1차 5개년 계획 착수
  • 1955년 7월 마오쩌둥,「농업합작화에 관한 문제」연설
  • 1956년 1월 저우언라이, 「지식인 문제에 관한 보고」 발표. "지식인들은 이미 개조를 거쳐 노동자의 일부가 되었으며, 사회주의 발전을 위해서 지식인이 필요하다. 당원들이 지식인을 대할 때 나타나는 종파주의를 주의하며 지식인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대표대회 비밀보고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 비판.
  • 1956년 5월 26일 루딩이, 2천 명의 과학 문예 간부와 고급지식인을 상대로 「백화제방 백가쟁명」 발표
  • 1956년 10월 헝가리 혁명
  • 1957년 2월 17일 마오쩌둥, 최고국무회의에서「인민 내부의 모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발표.
  • 1957년 5월 1일 『인민일보』에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정풍운동에 대한 지시」 발표
  • 1957년 5월 7일~8일 마오쩌둥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의 첫 번째 교정원고에서 "군중 소요를 특수 상황 하에서 간부와 대중을 교육하는 수단으로 봐야한다."고 언급. 원고에서 소요를 처리하는 네 가지 원칙 [①관료주의를 극복해서 소요가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②소요가 일어나면, 일어나게 둔다. ③마음껏 소요를 피우게 놔둔다. ④소요의 주모자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둠. 세 번째 교정원고에서도 여전히 "공산당의 역량은 거대하다. 무관심이 두렵지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두렵지 않다. 중국은 혼란스러울 수가 없다"며, "놓아주는 것(放)"의 원칙을 고수함.
  • 1957년 5월 10일 마오쩌둥, 상하이 『해방일보』에 「대담하게 모순을 폭로하고 당내 정풍을 돕자」에서 "당을 정풍하지 않으면 파멸할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다"라고 발표. 같은 날 저녁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 주최. 이 회의는 5월 16일 저녁9시부터 다음날 1시 20분까지 또 주최됨.
  • 1957년 5월 14일 중공 중앙, 「당외 인사들의 당정 각 부문 사업에 대한 비판을 보도하는 것에 관한 지시」 발표. "당외 인사들의 잘못된 비판에 대해, 특히 우경분자의 의견에 대해 지금 당장은 반박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하도록 놔두어라. 우리의 각 지역 신문은 꾸밈없이 지속적으로 당외 인사의 의견을 보도해야 한다. 특히 우경분자와 반공분자들의 언론을 말이다. 반드시 원래대로, 가감없이 보도해서 대중들에게 그들의 진면목을 알려야 한다. 이는 대중을 교육하고 중간분자들을 교육하는 데 아주 좋을 것이다." 이 발표에서 정풍운동 이래 처음으로 '우경분자', '반공분자'라는 개념이 출현함.
  • 1957년 5월 19일 베이징대학 학생들 '민주의 벽', '5·19 민주운동'
  • 1957년 5월 27일을 전후로 베이징대학, 칭화대학에서 '하이드공원 식 자유토론' 제창. 반혁명분자 숙청이라는 주제와 함께 정치보도원 취소, 민주학교 건설, 형식만 따르는 졸업설계 반대, 촌뜨기 지도자 파면, 당위원회를 교학관리에서 제외 등의 주제를 놓고 토론.
  • 1957년 6월 8일 마오쩌둥, 『인민일보』에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설 발표. 「우파분자의 광분한 진공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역량에 관한 지시」

배경

1953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위시하여 착수한 농업합작화와 일괄 수매는 농민을 수탈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은 식민지를 뺏거나, 농민을 수탈하여 공업과 농업의 가격차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농민을 수탈하였다. 일단 농민의 입장에서 농업합작화는 토지를 이제서야 막 분배 받았는데 다시 집체화가 되어 뺏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1954년에는 전후 한국 지원과 공업화를 위해 또다시 178억 근(890만 톤)을 농촌으로부터 초과 징수했다. 아주 많은 곳에서 소를 잡아먹고, 양을 죽이고, 나무를 베는 현상이 발생했고, 대중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량수밍은 최고국무회의 석상에서 모택동에 대해 "농민을 버렸다", "노동자는 구천 위에 있고, 농민은 구천 아래에 있다"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량수밍은 "노동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농민은 농회가 없으므로 내가 대신 이야기 해야겠다"고 했다고 한다. 1953년~1955년 사이에 농업합작화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대표대회에서 흐루쇼프의 비밀특별보고회의에서의 스탈린주의 비판, 그리고 폴란드·헝가리 사건(소련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으로 인해 중국의 마오쩌둥, 공산당, 민주당파, 지식인 및 청년 학생들은 제각기 "사회주의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이때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국제 공산주의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라 판단했고, 중국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발전의 길을 가야한다는 문제를 제기하며 "백화제방 백가쟁명"(쌍백방침)을 내세우며 '반관료주의, 반종파주의, 반주관주의'를 강조하는 정풍운동을 전개시켜서 민주당파와 각 지식인들의 공산당에 대한 정풍을 허용하였다.

전개

1957년 마오쩌둥은 먼저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을 통해 당내 관료에 타격을 입히고, 그 후 다시 반우파투쟁을 통해 당내 관료를 연합시켜 민주당파와 지식인, 청년학생 가운데에서 "우파"를 타도했다. 1958년 초에는 다시 반우파투쟁의 여세를 몰아 "당내 우경보수세력"을 타격했다.

결과

반우파투쟁은 "언자무죄(言者無罪:말하는 자는 죄가 없다)"는 쌍백운동 초기의 모토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쌍백운동 시기에 우파를 포함하여, 심지어 사회주의 민주를 요구하고 특권계급을 반대했던 집단들조차 중국공산당 영도를 거부하여 일당전제체제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우파" 혹은 "반당·반사회주의"로 낙인찍혀 진압당했다. 사회주의 변혁 요구를 제기한 민주인사, 지식인,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고 심지어 총살도 당했으며, 이들에 동조한 일반 농민·노동자들도 그 정도에 따라 "중간 우파", "우파 분자", "우파", "반사회주의분자" 등으로 분류되어 제각기 다른 정도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1980년대 관방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7년에 "우파"로 낙인찍힌 사람은 55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우파와 60만 명의 반사회주의분자, '우파 언론'이 만들어 낸 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분자'들을 합하여" 18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마오쩌둥은 결과적으로 절대 권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당내의 반대파와 민주당파 및 우파지식인들을 타도함은 물론 중국공산당의 절대적 영도 지위까지 공고히 하였다. 많은 우파가 탄압되었고,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의 권력이 공고화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쌍백운동 역시 본래부터 반우파투쟁을 전개하려는 계획 아래에 있었다는, 마오쩌둥 본인이 당내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 하에 함정을 판 것이나 다름 없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반우파투쟁이 마오쩌둥의 권력 욕구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정치적 음모였다고만 해석하는 것은 협애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1956년 당시 어째서 많은 지식인들이 그토록 큰 목소리를 내며 "소요"를 일으켰는지, 즉 공업화와 농업합작화에 따른 당시 사회상의 변화를 포착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상까지 함께 고려하려면, 중국 공산당 제1차 5개년 계획과 1957년 마오쩌둥이 발표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연설을 동시에 참고해야 한다.

참고자료

첸리췬, 『망각을 거부하라』, 그린비
첸리췬,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上』, 한울 아카데미
이선옥, 「건국 초 지식인 상황에 대한 소고」,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