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파투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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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파투쟁은 "언자무죄(言者無罪:말하는 자는 죄가 없다)"는 쌍백운동 초기의 모토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쌍백운동 시기에 우파를 포함하여, 심지어 사회주의 민주를 요구하고 특권계급을 반대했던 집단들조차 중국공산당 영도를 거부하여 일당전제체제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우파" 혹은 "반당·반사회주의"로 낙인찍혀 진압당했다. 사회주의 변혁 요구를 제기한 민주인사, 지식인,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고 심지어 총살도 당했으며, 이들에 동조한 일반 농민·노동자들도 그 정도에 따라 "중간 우파", "우파 분자", "우파", "반사회주의분자" 등으로 분류되어 제각기 다른 정도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1980년대 관방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7년에 "우파"로 낙인찍힌 사람은 55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우파와 60만 명의 반사회주의분자, '우파 언론'이 만들어 낸 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분자'들을 합하여" 18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반우파투쟁은 "언자무죄(言者無罪:말하는 자는 죄가 없다)"는 쌍백운동 초기의 모토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쌍백운동 시기에 우파를 포함하여, 심지어 사회주의 민주를 요구하고 특권계급을 반대했던 집단들조차 중국공산당 영도를 거부하여 일당전제체제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우파" 혹은 "반당·반사회주의"로 낙인찍혀 진압당했다. 사회주의 변혁 요구를 제기한 민주인사, 지식인,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고 심지어 총살도 당했으며, 이들에 동조한 일반 농민·노동자들도 그 정도에 따라 "중간 우파", "우파 분자", "우파", "반사회주의분자" 등으로 분류되어 제각기 다른 정도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1980년대 관방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7년에 "우파"로 낙인찍힌 사람은 55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우파와 60만 명의 반사회주의분자, '우파 언론'이 만들어 낸 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분자'들을 합하여" 18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br><br>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모토와 반우파투쟁 사이에는 워낙 급격한 반전이 이뤄졌기 때문에, 반우파투쟁이 추진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해석은 ①쌍백운동 자체가 애초부터 반우파투쟁을 위해 설계된, 공산당 권력 강화를 위한 덫이었다. ②쌍백운동은 대중이 당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허용하여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발양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으나, 일부 부르주아 우파분자들이 기회를 틈타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공산당 영도를 대체하려 하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반우파투쟁은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우파투쟁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잘못 낙인 찍힌 인사들이 있는데, 이것은 불행이다. ③마오쩌둥이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사람들마저 모두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우파"로 오인하였다. ④마오쩌둥이 쌍백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면적 민주화'와 '일당독재체제' 사이의 모순이 두드러졌고, 이에 마오쩌둥이 '일당독재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등이 있다. 이 해석들은 모두 쌍백운동 시기와 반우파투쟁 시기에 마오쩌둥이 아예 다른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다.<br><br> 하지만, 마오쩌둥의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의 2월 연설본과 6월 출판본 사이의, 마오쩌둥의 상황 인식에 발생한 주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굳이 '반우파투쟁을 지지하는 또다른 문건'으로 출판하지 않고 쌍백운동을 지지하는 2월 연설본에 반우파투쟁을 지지하는 내용이 추가된 6월 출판본의 형태, 즉 내용 상 충돌하는 측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일된 하나의 문건으로 출판된 까닭은 무엇인가에 착안하여 적어도 '정풍의 단계론'적 관점에서는 마오쩌둥의 논리적 일관성이 부여되고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정풍의 단계론'은 1957년 5월 중순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추가된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쌍백운동과 반우파투쟁을 동시에 관통하는 논리적인 일관성 자체는 있다는 말이다. 마오쩌둥의 정풍의 단계론이란 4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1957년 7월에 마오쩌둥은 ⓐ대명대방 단계, ⓑ우파에 대한 반격 단계, ⓒ집중 개조 단계, ⓓ계속 제고 단계를 소개하였으며, 이는 10월이 되면 놓아주고(放), 반격하고(反), 개조하고(改), 학습하는(學) 네 개의 단계로 다시 요약된다. 이 '정풍 4단계론'에 앞서 1957년 5월에 마오쩌둥은 공산당에 대한 정풍이 완료되면, 공산당이 당외 인사들에 대한 정풍을 진행할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렇듯 1957년 상반기에서 하반기로 이행할수록 마오에게 있어 정풍의 개념은 구체화되어 갔는데, 하반기에 이르면 정풍의 주요한 주체는 바로 '군중' 혹은 '대중'이며 그 형식으로서는 '대중투쟁'이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쌍백방침과 반우파투쟁이 추진되는 1956년과 1957년을 거치며 마오쩌둥의 정풍 개념 역시 구체화되어 갔으며, 최종적으로는 마오의 정풍에 대한 인식이 "공산당도, 당외인사도 모두 대중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라는 지점과 맞닿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쌍백운동은 공산당에 대한 당외인사들과 대중들의 정풍 운동으로, 반우파투쟁은 당외인사들 중 "우파"에 대한 공산당과 대중의 정풍 운동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br><br> 마오는 "우파"에 대해서도 우파의 사상을 개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러한 개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파 사상을 고수하고 위법 사항이 있을 경우에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의 발언들을 하였다. 물론 마오쩌둥의 이런 발언들을 순진하게 100%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마오의 이 발언들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치부할만한 근거도 없다. 하지만 만약 마오쩌둥의 이 발언들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반우파투쟁이 실제로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지식인들을 우파로 낙인찍고 탄압하는 비극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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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모토와 반우파투쟁 사이에는 워낙 급격한 반전이 이뤄졌기 때문에, 반우파투쟁이 추진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해석은 ①쌍백운동 자체가 애초부터 반우파투쟁을 위해 설계된, 공산당 권력 강화를 위한 덫이었다. ②쌍백운동은 대중이 당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허용하여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발양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으나, 일부 부르주아 우파분자들이 기회를 틈타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공산당 영도를 대체하려 하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반우파투쟁은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우파투쟁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잘못 낙인 찍힌 인사들이 있는데, 이것은 불행이다. ③마오쩌둥이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사람들마저 모두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우파"로 오인하였다. ④마오쩌둥이 쌍백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면적 민주화'와 '일당독재체제' 사이의 모순이 두드러졌고, 이에 마오쩌둥이 '전면적 민주화' 대신 '일당독재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등이 있다. 이 해석들은 모두 쌍백운동 시기와 반우파투쟁 시기에 마오쩌둥이 아예 다른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다.<br><br> 하지만, 마오쩌둥의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의 2월 연설본과 6월 출판본 사이의, 마오쩌둥의 상황 인식에 발생한 주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굳이 '반우파투쟁을 지지하는 또다른 문건'으로 출판하지 않고 쌍백운동을 지지하는 2월 연설본에 반우파투쟁을 지지하는 내용이 추가된 6월 출판본의 형태, 즉 내용 상 충돌하는 측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일된 하나의 문건으로 출판된 까닭은 무엇인가에 착안하여 적어도 '정풍의 단계론'적 관점에서는 마오쩌둥의 논리적 일관성이 부여되고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정풍의 단계론'은 1957년 5월 중순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추가된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쌍백운동과 반우파투쟁을 동시에 관통하는 논리적인 일관성 자체는 있다는 말이다. 마오쩌둥의 정풍의 단계론이란 4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1957년 7월에 마오쩌둥은 ⓐ대명대방 단계, ⓑ우파에 대한 반격 단계, ⓒ집중 개조 단계, ⓓ계속 제고 단계를 소개하였으며, 이는 10월이 되면 놓아주고(放), 반격하고(反), 개조하고(改), 학습하는(學) 네 개의 단계로 다시 요약된다. 이 '정풍 4단계론'에 앞서 1957년 5월에 마오쩌둥은 공산당에 대한 정풍이 완료되면, 공산당이 당외 인사들에 대한 정풍을 진행할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렇듯 1957년 상반기에서 하반기로 이행할수록 마오에게 있어 정풍의 개념은 구체화되어 갔는데, 하반기에 이르면 정풍의 주요한 주체는 바로 '군중' 혹은 '대중'이며 그 형식으로서는 '대중투쟁'이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쌍백방침과 반우파투쟁이 추진되는 1956년과 1957년을 거치며 마오쩌둥의 정풍 개념 역시 구체화되어 갔으며, 최종적으로는 마오의 정풍에 대한 인식이 "공산당도, 당외인사도 모두 대중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라는 지점과 맞닿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쌍백운동은 공산당에 대한 당외인사들과 대중들의 정풍 운동으로, 반우파투쟁은 당외인사들 중 "우파"에 대한 공산당과 대중의 정풍 운동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br><br> 마오는 "우파"에 대해서도 우파의 사상을 개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러한 개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파 사상을 고수하고 위법 사항이 있을 경우에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의 발언들을 하였다. 물론 마오쩌둥의 이런 발언들을 순진하게 100%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마오의 이 발언들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치부할만한 근거도 없다. 하지만 만약 마오쩌둥의 이 발언들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반우파투쟁이 실제로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지식인들을 우파로 낙인찍고 탄압하는 비극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2018년 8월 21일 (화) 23:27 기준 최신판

배경

1953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위시하여 착수한 농업합작화와 일괄 수매는 농민을 수탈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은 식민지를 뺏거나, 농민을 수탈하여 공업과 농업의 가격차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농민을 수탈하였다. 일단 농민의 입장에서 농업합작화는 토지를 이제서야 막 분배 받았는데 다시 집체화가 되어 뺏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1954년에는 전후 한국 지원과 공업화를 위해 또다시 178억 근(890만 톤)을 농촌으로부터 초과 징수했다. 아주 많은 곳에서 소를 잡아먹고, 양을 죽이고, 나무를 베는 현상이 발생했고, 대중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량수밍은 최고국무회의 석상에서 모택동에 대해 "농민을 버렸다", "노동자는 구천 위에 있고, 농민은 구천 아래에 있다"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량수밍은 "노동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농민은 농회가 없으므로 내가 대신 이야기 해야겠다"고 했다고 한다. 1953년~1955년 사이에 농업합작화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전개

  • 1953년 제1차 5개년 계획 착수
  • 1955년 7월 마오쩌둥,「농업합작화에 관한 문제」연설
  • 1956년 1월 저우언라이, 「지식인 문제에 관한 보고」 발표. "지식인들은 이미 개조를 거쳐 노동자의 일부가 되었으며, 사회주의 발전을 위해서 지식인이 필요하다. 당원들이 지식인을 대할 때 나타나는 종파주의를 주의하며 지식인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대표대회 비밀보고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 비판.
  • 1956년 5월 26일 루딩이, 2천 명의 과학 문예 간부와 고급지식인을 상대로 「백화제방 백가쟁명」 발표
  • 1956년 9월 제8차 당대회에서 제2차 5개년 계획 승인 및 '모택동사상'을 당장(黨章)에서 삭제하기로 결정
  • 1956년 10월 헝가리 혁명
  • 1956년 11월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제8차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의 연설」에서 "우리는 내년에 정풍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세 가지를 정돈해야 하는데, 첫째가 주관주의, 둘째가 종파주의, 셋째가 관료주의이다.", "정풍은 미리 예고하고 때가 되었을 때 진행해야 한다", "병은 고치고 사람은 살려야 한다", "정풍은 인민 내부의 일, 당내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해결해야지 무력으로 해결해선 안된다" 발언.
  • 1957년 2월 27일 마오쩌둥, 최고국무회의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구두 발표, 6월 19일에 『인민일보』를 통하여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 정식 출판.
  • 1957년 3월 마오쩌둥, 「힘든 투쟁을 계속하여 대중과 긴밀하게 연계하자」 에서 "우리 당은 지금 1차 정풍운동을 전개하려고 한다. 정풍은 비판과 자아비판의 방법으로 당내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당과 인민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번의 정풍은 세 가지를 정돈하는 것으로서, 관료주의, 종파주의, 주관주의가 그것이다."라고 말함.
  • 1957년 5월 1일 『인민일보』에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정풍운동에 대한 지시」 발표
  • 1957년 5월 7일~8일 마오쩌둥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의 첫 번째 교정원고에서 "군중 소요를 특수 상황 하에서 간부와 대중을 교육하는 수단으로 봐야한다."고 언급. 원고에서 소요를 처리하는 네 가지 원칙 [①관료주의를 극복해서 소요가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②소요가 일어나면, 일어나게 둔다. ③마음껏 소요를 피우게 놔둔다. ④소요의 주모자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둠. 세 번째 교정원고에서도 여전히 "공산당의 역량은 거대하다. 무관심이 두렵지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두렵지 않다. 중국은 혼란스러울 수가 없다"며, "놓아주는 것(放)"의 원칙을 고수함.
  • 1957년 5월 10일 마오쩌둥, 상하이 『해방일보』에 「대담하게 모순을 폭로하고 당내 정풍을 돕자」에서 "당을 정풍하지 않으면 파멸할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다"라고 발표.
  • 1957년 5월 10일~16일 : 첸리췬은 민주당파나 당에 소속되지 않은 민주인사들의 좌담회에서 11일까지는 비교적 온건하고 건설적인 발언들이 이뤄졌으나 13일 좌담회에서는 공산당과 민주당파의 진정한 평등을 요구하는 등 "공산당과 권력을 돌아가면서 잡자"는 발언, 즉 공산당에 대해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발언이 이뤄졌다고 추측함. 그리고 이 발언들이 14일과 16일 저녁9시부터 새벽1시까지 이뤄졌던 두 차례의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함. 이 두 차례의 회의 내용은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첸리췬은 리웨이한의 발언과 2006년 홍콩 『쟁명』 제1기에 발표된 뤄빙의 「반우파운동의 기밀해제」를 근거로 하여 당시 상황을 추측하였음. 「반우파운동의 기밀해제」에는 "5월 2일에서 5월 12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28,520여 차례가 넘는 회의가 열렸다. 당 중앙 각급 당조직 당원간부들에게 372,345가지 의견과 건의가 제기되었다." "마오쩌둥은 「상황 총 모음」에서 다음과 같은 서면지시를 한다. '한 번 놓아주니, 각 계급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고, 원래의 모습도 완전히 폭로되었다. 공산당 집권은 아직 8년도 안 되었는데, 30만 가지가 넘는 불만과 잘못, 죄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공산당이 하야해야 하는가? 그럼 나 마오는 징강산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5월 13일부터 14일까지 중앙정치국 토론 상황은 의견이 분분했지만, '올바르게 지도하고 다시 일정기간 관찰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고 써져있다.
  • 1957년 5월 14일 중공 중앙, 「당외 인사들의 당정 각 부문 사업에 대한 비판을 보도하는 것에 관한 지시」 발표. "당외 인사들의 잘못된 비판에 대해, 특히 우경분자의 의견에 대해 지금 당장은 반박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하도록 놔두어라. 우리의 각 지역 신문은 꾸밈없이 지속적으로 당외 인사의 의견을 보도해야 한다. 특히 우경분자와 반공분자들의 언론을 말이다. 반드시 원래대로, 가감없이 보도해서 대중들에게 그들의 진면목을 알려야 한다. 이는 대중을 교육하고 중간분자들을 교육하는 데 아주 좋을 것이다." 이 발표에서 정풍운동 이래 처음으로 '우경분자', '반공분자'라는 개념이 출현함.
  • 1957년 5월 15일 마오쩌둥, 「상황에 변화가 일고 있다」 작성. 이 문건의 원래 제목은 「반면을 향하여」로, 서명자는 '본 신문 평론위원'이었다. 첸리췬은 원본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려다가 나중에 제목을 바꾼 듯하다고 추측한다. 몇 번의 교정을 거쳐 반우파운동이 시작된 후 6월 12일에 당 내부에 나누어졌다. "신문에 싣지 말고, 신문기자들이 모르게 하며, 당내에서도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주지 말고 대략 반년이나 혹은 일 년 이후에 중국 신문에 발표하기를 바란다"는 주석이 달려있었다. 한편 이 문건에서 "공산당에 대한 정풍이 일단락되고 나면, 우리는 민주당파와 사회 각계가 정풍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지금은 당외 인사가 우리의 정풍을 돕고 있지만, 얼마 후면 우리가 당외 인사의 정풍을 도울 것이다" 라고 하였다.
  • 1957년 5월 16일 중공 중앙 「당외 인사의 비판에 대한 대응 지시」 초안 작성. 「상황에 변화가 일고 있다」와 「당외 인사의 비판에 대한 대응 지시」두 문건에서, 마오쩌둥은 처음으로 '우파'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마오쩌둥은 '우파'가 당외 지식인 가운데 대략 1%, 3%, 5%에서 10%를 차지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예측을 했다. 또, "당외 인사들의 비판이 격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진지하고 정확하다. 그들의 비판 90% 이상은 당의 정풍에 결점과 오류를 수정해 주니 큰 도움이 된다. 폭로되어 나온 사실들을 보니 당외 인사들에게 부정확하게, 심지어는 아주 불합리하게 불호령을 내렸고 아예 그들을 믿지 않고 존중하지도 않아서 깊은 골과 높은 벽을 만들었으며, 진심을 말하지 않고 교류도 적어져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것이다. 또 당원에게는 등급과 급료를 평가하고 발탁 등용하는 데 특권이 있고, 그들은 한 등급 높게, 당외 인사들은 한 등급 낮게 평가되었다고 했다. 당원은 아주 오만스러웠고, 비당원은 늘 모욕을 당했으며, 학교의 당 간부 교원이나 조교·강사·교수가 경력도 부족하면서, 경력이 풍부하고 학문이 높은 교원이나 교수들에게 성실히 배우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거드름을 피운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이런 잘못된 방향은 반드시 되돌려야 하는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고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오쩌둥은 문건 속에서 "우리 당은 새로운 지식인 당원이 많은데, 그 중 일부는 정말 심각한 수정주의 사상을 가졌다", "그들은 우익 지식인들과 서로 호응하고 한통속이 되어 형제처럼 친하다", "몇 개월 동안 사람들은 교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수정주의는 오히려 방치해 두었는데", "지금부터는 수정주의를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 그들(민주당파와 지식인)은 많은 대학생들이 지주·부농·부르주아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이들이 우파에 호응할 군중이라 여겼고", "신문계의 우파에게는 노동자·농민 군중에게 정부를 반대하자고 호소하는 조짐이 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몇 번의 교정을 거치고 6월 12일 발표된 문건에서는 "지금 우파의 진공이 아직 정점에 이르지 않았으니까", "적을 한꺼번에 섬멸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일정 기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적었다. 마오쩌둥은 6월 8일 이미 우파의 진공에 반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1957년 5월 19일 베이징대학 학생들 '민주의 벽', '5·19 민주운동'
  • 1957년 5월 27일을 전후로 베이징대학, 칭화대학에서 '하이드공원 식 자유토론' 제창. 반혁명분자 숙청이라는 주제와 함께 정치보도원 취소, 민주학교 건설, 형식만 따르는 졸업설계 반대, 촌뜨기 지도자 파면, 당위원회를 교학관리에서 제외 등의 주제를 놓고 토론.
  • 1957년 6월 8일 마오쩌둥, 『인민일보』에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설 발표. 「우파분자의 광분한 진공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역량에 관한 지시」
  • 1957년 7월 마오쩌둥, 「1957년 여름의 형세」에서 정풍의 4단계(대명대방, 우파에 대한 반격, 집중 개조, 계속 제고) 소개, 「부르주아 우파의 진격을 격퇴하자」 연설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는 방법은 대중노선임을 말함.
  • 1957년 10월 13일 마오쩌둥, 「군중의 대다수를 꿋꿋하게 믿는다」 에서 정풍의 4단계를 放, 反, 改, 學으로 말하고 정풍의 1단계인 '대명대방'의 형식을 '대중투쟁'으로 제시.

결과

반우파투쟁은 "언자무죄(言者無罪:말하는 자는 죄가 없다)"는 쌍백운동 초기의 모토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쌍백운동 시기에 우파를 포함하여, 심지어 사회주의 민주를 요구하고 특권계급을 반대했던 집단들조차 중국공산당 영도를 거부하여 일당전제체제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우파" 혹은 "반당·반사회주의"로 낙인찍혀 진압당했다. 사회주의 변혁 요구를 제기한 민주인사, 지식인,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고 심지어 총살도 당했으며, 이들에 동조한 일반 농민·노동자들도 그 정도에 따라 "중간 우파", "우파 분자", "우파", "반사회주의분자" 등으로 분류되어 제각기 다른 정도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1980년대 관방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7년에 "우파"로 낙인찍힌 사람은 55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우파와 60만 명의 반사회주의분자, '우파 언론'이 만들어 낸 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분자'들을 합하여" 18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모토와 반우파투쟁 사이에는 워낙 급격한 반전이 이뤄졌기 때문에, 반우파투쟁이 추진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해석은 ①쌍백운동 자체가 애초부터 반우파투쟁을 위해 설계된, 공산당 권력 강화를 위한 덫이었다. ②쌍백운동은 대중이 당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허용하여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발양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으나, 일부 부르주아 우파분자들이 기회를 틈타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공산당 영도를 대체하려 하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반우파투쟁은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우파투쟁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잘못 낙인 찍힌 인사들이 있는데, 이것은 불행이다. ③마오쩌둥이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사람들마저 모두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우파"로 오인하였다. ④마오쩌둥이 쌍백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면적 민주화'와 '일당독재체제' 사이의 모순이 두드러졌고, 이에 마오쩌둥이 '전면적 민주화' 대신 '일당독재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등이 있다. 이 해석들은 모두 쌍백운동 시기와 반우파투쟁 시기에 마오쩌둥이 아예 다른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의 2월 연설본과 6월 출판본 사이의, 마오쩌둥의 상황 인식에 발생한 주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굳이 '반우파투쟁을 지지하는 또다른 문건'으로 출판하지 않고 쌍백운동을 지지하는 2월 연설본에 반우파투쟁을 지지하는 내용이 추가된 6월 출판본의 형태, 즉 내용 상 충돌하는 측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일된 하나의 문건으로 출판된 까닭은 무엇인가에 착안하여 적어도 '정풍의 단계론'적 관점에서는 마오쩌둥의 논리적 일관성이 부여되고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정풍의 단계론'은 1957년 5월 중순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추가된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쌍백운동과 반우파투쟁을 동시에 관통하는 논리적인 일관성 자체는 있다는 말이다. 마오쩌둥의 정풍의 단계론이란 4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1957년 7월에 마오쩌둥은 ⓐ대명대방 단계, ⓑ우파에 대한 반격 단계, ⓒ집중 개조 단계, ⓓ계속 제고 단계를 소개하였으며, 이는 10월이 되면 놓아주고(放), 반격하고(反), 개조하고(改), 학습하는(學) 네 개의 단계로 다시 요약된다. 이 '정풍 4단계론'에 앞서 1957년 5월에 마오쩌둥은 공산당에 대한 정풍이 완료되면, 공산당이 당외 인사들에 대한 정풍을 진행할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렇듯 1957년 상반기에서 하반기로 이행할수록 마오에게 있어 정풍의 개념은 구체화되어 갔는데, 하반기에 이르면 정풍의 주요한 주체는 바로 '군중' 혹은 '대중'이며 그 형식으로서는 '대중투쟁'이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쌍백방침과 반우파투쟁이 추진되는 1956년과 1957년을 거치며 마오쩌둥의 정풍 개념 역시 구체화되어 갔으며, 최종적으로는 마오의 정풍에 대한 인식이 "공산당도, 당외인사도 모두 대중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라는 지점과 맞닿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쌍백운동은 공산당에 대한 당외인사들과 대중들의 정풍 운동으로, 반우파투쟁은 당외인사들 중 "우파"에 대한 공산당과 대중의 정풍 운동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마오는 "우파"에 대해서도 우파의 사상을 개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러한 개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파 사상을 고수하고 위법 사항이 있을 경우에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의 발언들을 하였다. 물론 마오쩌둥의 이런 발언들을 순진하게 100%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마오의 이 발언들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치부할만한 근거도 없다. 하지만 만약 마오쩌둥의 이 발언들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반우파투쟁이 실제로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지식인들을 우파로 낙인찍고 탄압하는 비극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참고자료

첸리췬, 『망각을 거부하라』, 그린비
첸리췬,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上』, 한울 아카데미
이선옥, 「건국 초 지식인 상황에 대한 소고」,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김소현, 「희망과 좌절의 기록, 1957년 『詩刊』 연구」, 중국문화연구 제31집
이현정, 「쌍백방침에서 반우파투쟁으로의 전환에 대한 마오쩌둥의 인식 -마오쩌둥의 주요 문건을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