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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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白起]

출생 미상
사망 BC.257년.
생존시기 전국시대

인물소개

백기(??? - 257년전)는 중국 전국시대 진니라의 유명한 장군 중 한명이다. 전국책(戰國策)에서는 백기가 아니라 공손기(公孫起)로 기록되어 있다. 백기는 현재의 섬서성(陝西省)출신으로 위나라, 조나라를 상대로 전투를 할 때마다 대승을 거두었으며, 나라와 나라, 조나라, (楚)나라 등의 70여개 성을 탈취하는 공적을 세웠다. 특히 40만명을 생매장했다고 기록이 전해진 장평대전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70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필승불패의 장군이다.

생애

일생의 전투기록들

미현(郿县)에서 태어난 백기는 진나라 소양왕을 섬기며 기원전 294년 좌서장(左庶長)에 임명되고 소왕 13년 한나라 신성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듬해 좌경의 자리에 올라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해 '이궐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적장인 한나라의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사로 잡았고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에서부터 동쪽으로 간하에 이르러 나라를 두개로 갈라버리게 만든다. 또한, 기원전 278년 무안군(武安君)의 작위를 받았다. 소양왕 15년에는 무안군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영토에 있는 61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초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완성을 함락시켰다. 이 뿐만 아니라 소양왕 27년에 조나라를 침략하여 광랑성을 함락시키고 다음해인 28년에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과 등을 빼았는다. 소양왕 29년엔 초나라 영을 공략하여 화양을 함락, 망묘를 패주시키고 삼진의 장수를 포로로 잡고 위나라군 13만명을 몰살시킨다.그리고 조나라 장수 가언과의 전투를 통해 그 휘하 수나라군 병졸 약 2만명을 수장시킨다. 소양왕 47년째 되는 해에는 백기가 장평에서 조나라군에 대승을 거두며 조나라군 40만명을 생매장 시킨다.

몰락의 시작

장평대전이 끝난 무렵, 진나라 본국의 재상인 범수가 조나라의 사신에게 들은 백기에 대한 이간질에 넘어가 백기의 뛰어난 활약으로 인해 그가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오를 것으로 판단하고 조나라와 화친을 맺어 조나라의 수도 한단까지 진입하게 되는 진나라의 병력을 돌려 세우고 백기를 부른다. 결국 범수는 진나라의 왕에게 백기를 모함하고 좌천당하게 한다. 기원전 259년 진나라가 다시 조의 수도 한단을 공격했지만 좌천되어 없어진 백기가 아닌 왕릉(王陵)과 왕흘(王齕)의 군대는 조나라를 구하러 온 초의 춘신군과 위의 신릉군의 도움에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이에 진왕은 다시 승기를 잡기위해 백기를 부르지만 이미 범수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끼고 실망을 가진 핑계를 둘러대고 왕의 명을 간접적으로 거절하게 된다. 결국 소양왕에게 자결의 명을 받은 백기는 기원전 257년 11월에 두우(杜邮)에서 자결한다. 이때 백기는 자결하기 전에,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에서 수십만이나 되는 조나라 젊은이들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외치며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와 억울함을 스스로 정당화 시키면서 분노와 후회를 동시에 느끼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전국 각지에선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제사가 열렸다.

장평 대전(長平大戰)

기원전 260년 음력 9월, 조나라 장평에서 일어난 대규모 전투이다. 백기와 왕흘 그리고 사마근이 지휘하던 진의 군대는 약 50만명이었으며, 조나라 조괄의 군대는 40만명이었다. 진의 군대는 절반의 소모가 있었고 조의 방어병력이 전멸될 정도로 한 쪽으로 치우친 결과가 나온 대전투였다. 이후 진은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반대로 조는 쇠락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장평대전의 시작

진이 완벽한 기세를 잡고 '합종연횡책'으로 6국과 대치를 벌이던 과정에서 소양왕에 의해 범수가 진나라의 승상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승상이 된 범수는 멀리있는 적과 친교를 하고 가까이 있는 적부터 공격한다는 '원교근공책'을 내세워 한나라와 위나라를 위주로 공격을 감행하고 비교적 멀리 떨어진 제나라에 대한 공략은 시도하지 않는다. 진의 공격을 받던 한나라는 영토가 남북의 고립상황에 처하자 급히 조나라에게 항복을 하고만다. 이로써 대결구도는 진나라와 조나라의 싸움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대전의 과정

백기가 한나라를 공격해 상당지역을 빼앗으려하자 상당태수가 진나라에게 땅을 넘기느니 동맹국인 조나라에게 땅을 넘기는 의도로 항복을 하게되는데, 당시의 조나라는 무령왕의 지속적인 개혁과 함께 인상여, 조사, 염파 등의 걸출한 인재들의 활약으로 최대강국인 진과 대등한 전쟁을 할 정도의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나라 효성왕은 한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염파에게 약 20만의 병력을 붙여 한의 상당을 접수하도록 명한다. 이때 진왕도 마찬가지로 왕흘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상당을 정복하라고 명하였다. 먼저 상당의 땅을 밟은 염파의 군대는 뒤이어 온 왕흘의 군대와 장평에서 2년이란 시간동안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것은 장기전으로 이끌고가 왕흘군대의 보급로가 길었던 점을 이용해 진이 보급문제로 인해 말라죽기를 기다리는 염파의 작전이었다. 당시 6국과 대결구도를 펼치던 진나라로써는 장기적인 전쟁에서 타국의 도움을 받지못하는 것이 매우 불리한 것으로 작용했고, 심지어는 초나라가 그 사이에 진을 공격한다는 첩보도 들려왔던 것이다. 이에 진나라은 곽개라는 간신에게 뇌물을 주어 염파가 진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이에 평소 진나라에게 공격만 당하고 줄곧 방어만 하는 염파를 못마땅히 여기던 효성왕은 소문을 듣고 염파를 끌어내리고 다시 조괄에게 20만의 군대를 주어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진의 승상 범수는 비밀리에 왕홀을 부장군으로 임명하고 백기에게 전권을 임명해 장평대전을 지휘하게 한다. 결국 40만이라는 조의 군대와 진의 20만 군대는 숫적으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조괄은 당연히 이길 것이라 생각하였다. 조괄은 계속해서 후퇴하는 진의 군대를 뒤쫓았지만 결국 진의 포위망에 잡히고 만다. 46일이라는 기간동안 장평에 있는 진의 포위망에 갇힌 조괄의 군대는 결국 보급의 문제로 인해 패배하였고 병법에 능했다는 조괄은 병법대로만 군대를 지휘하다가 백기에게 목숨마저 빼았기고 만다. (이에 거론되는 사자성어가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는 지상담병이다.) 조괄이 죽은 조의 군대는 항복하게 되었는데 그 숫자가 모두 30만이 넘었다고 한다. 이에 백기는 30만이나 되는 포로를 진의 식량사정이 여의치 않아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돌려보내기엔 위, 조, 한 연합군에게 30만이나 넘는 군대를 돌려주는 것은 좋지않다고 판단해 그들을 모두 생매장시키는 결단을 내린다.

결과

2년이라는 대규모 장기전에서 패한 조나라는 이후 최약체국이 되버린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칠웅 중 최약체라고 평가받아왔던 연나라한테마저 침공을 당할정도로 약해보이는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조나라는 30년동안 방어를 통해 버티다가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장평에서 수많은 유골들이 발굴되어 장평대전이라는 역사를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유골들은 발굴작업 중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발굴 작업 중 이에 관련해 나온 논란이 있다. 먼저 발굴된 시체를 통해 당시에 생매장된 30만이라는 수가 과장되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들이 생매장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은 체로 묻혔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생매장된 시체가 10만정도 밖에 되지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이와 관련해 대다수의 유골에서 큰 상흔이 발견되지 않아 생매장으로 추정되는 의견이 주류이다.

백기의 사후 평가

전설에 따르면, 수백년 뒤의 당나라 때 소가 벼락에 맞아 죽었는데, 살펴보니 '백기'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백기가 30만을 생매장한 일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 죄값을 모두 치루지 못하여 수백년이 지난 뒤에도 가축으로 태어나 벼락을 맞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30만을 생매장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혀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사기에서는 백기의 전투 능력과 전술에 대해선 극찬을 하며 유능하고 빼어난 장수로 평가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크나큰 결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현대에 와서 백기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뉜다. 단지 30만이 넘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대량학살한 극악무도한 사람인 것인가 아니면 관련된 정보가 죄다 점령, 학살로 이루어진 전국시대 최고의 장수인가. 하지만 대량학살이라는 것이 그에게 중국사내에서 최고의 명장중 한명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줄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비윤리적인, 대량학살자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영향을 미치는 양날의 검이다.

참고 자료

-사마천, 사기 <백기왕전열전>

-춘추전국이야기9 원교근공, 대학살의 시대 공원국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