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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과 한반도를 품고 있는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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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과 한반도를 품고 있는 백두산==
 
==만주 벌판과 한반도를 품고 있는 백두산==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은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다.<br>그리고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길고 긴 역사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라 일컫고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상징되어 왔다. 이는 백두산의 신비하고도 장엄한 산세의 위엄과 기상이 우리 민족정신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군왕검 이후 만주 벌판은 우리 민족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 출처와 기상이 아직도 수많은 전설과 설화를 통해 우리의 민족정신에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발해가 망하면서 만주는 우리와 멀어지게 되었고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이 국방의 제일선이 되었다. 다시 조선이 건국되고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우리의 생활 영역을 넓혔지만 만주까지 우리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하지는 못했다. 17세기 초 이곳에 살고 있던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백두산을 둘러싸고 두 나라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 대립의 결과로 1712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모호했던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 동남쪽 4km 지점에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라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고 이후 1962년 북한과 중국이 협상(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하여 천지를 중심으로 백두산 지역의 국경선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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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은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다.그리고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길고 긴 역사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였다. <br>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라 일컫고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상징되어 왔다. 이는 백두산의 신비하고도 장엄한 산세의 위엄과 기상이 우리 민족정신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군왕검 이후 만주 벌판은 우리 민족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 출처와 기상이 아직도 수많은 전설과 설화를 통해 우리의 민족정신에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발해가 망하면서 만주는 우리와 멀어지게 되었고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이 국방의 제일선이 되었다. 다시 조선이 건국되고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우리의 생활 영역을 넓혔지만 만주까지 우리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하지는 못했다. 17세기 초 이곳에 살고 있던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백두산을 둘러싸고 두 나라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 대립의 결과로 1712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모호했던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 동남쪽 4km 지점에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라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고 이후 1962년 북한과 중국이 협상(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하여 천지를 중심으로 백두산 지역의 국경선을 정했다.

2018년 9월 23일 (일) 19:09 판

만주 벌판과 한반도를 품고 있는 백두산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은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다.그리고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길고 긴 역사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라 일컫고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상징되어 왔다. 이는 백두산의 신비하고도 장엄한 산세의 위엄과 기상이 우리 민족정신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군왕검 이후 만주 벌판은 우리 민족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 출처와 기상이 아직도 수많은 전설과 설화를 통해 우리의 민족정신에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발해가 망하면서 만주는 우리와 멀어지게 되었고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이 국방의 제일선이 되었다. 다시 조선이 건국되고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우리의 생활 영역을 넓혔지만 만주까지 우리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하지는 못했다. 17세기 초 이곳에 살고 있던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백두산을 둘러싸고 두 나라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 대립의 결과로 1712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모호했던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 동남쪽 4km 지점에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라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고 이후 1962년 북한과 중국이 협상(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하여 천지를 중심으로 백두산 지역의 국경선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