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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江蘇) 패현(沛縣) 사람으로 한(漢)의 개국공신이다. 대장군(大將軍), 좌승상(左丞相)을 지냈다. 여후(呂後)의 매부(妹夫)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여후의 신임을 얻었다. 뒤에 유방을 따라 노관(盧綰), 진희(陳豨), 한신(韓信) 등을 평정했다. 한고조 [[유방]]의 심복 같은 맹장(猛將)이다. 무양후(舞陽侯)로 봉해졌고, 시호는 무후(武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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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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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번쾌(樊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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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번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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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기원전 2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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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일  = 기원전 1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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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패현(沛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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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江蘇) 패현(沛縣) 사람으로 [[]](漢)의 개국공신이다. 대장군(大將軍), 좌승상(左丞相)을 지냈다. [[여후]](呂後)의 매부(妹夫)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여후]]의 신임을 얻었다. 뒤에 유방을 따라 노관(盧綰), 진희(陳豨), [[한신]](韓信) 등을 평정했다. 한고조 [[유방]]의 심복 같은 맹장(猛將)이다. 무양후(舞陽侯)로 봉해졌고, 시호는 무후(武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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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쾌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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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와의 만남과 진나라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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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沛)출신의 번쾌는 본래 개를 잡아 고기를 파는 것이 업이었으나 뒤에 고조가 죄를 짓고 피해 다닐때 함께했다. 그후 고조가 풍(豊)에서 기병하자 종군하여 패를 함락시켰다. 고조와 함께하며 진(秦)을 공격했다. 진나라의 승상 [[이사]]의 아들 이유(李由)의 군대를 격파하고 성무, 장사, 환원, 양성, 무관 등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쳐 고조와 [[항우]]의 군대 중 고조의 군대가 먼저 함양을 격파하고 아방궁에 들어설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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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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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가 먼저 함양에 도착하여 진 황제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고 관중지역을 점령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한 [[항우]]는 함곡관을 돌파하고 홍문에 진을 친다. 이에 고조는 [[항백]](項伯)의 주선으로 항우를 면담하여 함곡관의 관문을 닫은 일에 대해 사과한다. [[항우]]가 군사들을 위해 연회를 열고 [[범증]](范曾)의 계획에 따라 [[항장]]이 검무를 추다가 고조를 살해하고자 한다. 이에 [[항백]]이 고조를 엄호한다. 이때 번쾌는 연회가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쇠방패를 들고 들어간다. 이에 항우가 번쾌에게 술동이와 고기를 주자, 번쾌는 술을 한번에 다 마시고 고기를 칼로 썰어 쇠방패를 접시삼아 먹는다. 그 후 번쾌가 "신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한 동이의 술인들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 더욱이 패공께서 먼저 함양에 진입하여 평정한 후에 군사들을 패상에 로숙시키며 대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도하신 대왕께서는 소인들의 참언을 믿으시고 패공을 적대하고 계시니 천하가 흩어지고 대왕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그 때를 틈타 번쾌는 고조와 함께 패상의 군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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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 격파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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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이 한왕(漢王)이 된 이후에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초패왕 [[항우]]와의 싸움을 시작할 때 번쾌는 종군하여 노, 하구, 설 등의 성을 공략한다. 그러나 [[항우]]가 팽성(彭城)에서 한왕을 패퇴시키고 곧 다시 번쾌가 공략한 땅을 수복한다. 한왕의 명에 따라 광무(廣武)를 지키던 번쾌는 한왕이 팽성으로 퇴각하는 [[항우]]의 뒤를 쫓을 때 양하(陽夏)를 함락 하고, 초나라의 장수 주장군(周將軍)과 그 군사 4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진(陳)에서 [[항우]]를 포위하고 크게 무찌른다. [[항우]]가 죽고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 번쾌는 연왕(燕王) 장도(臧荼), 초왕 [[한신]](韓信)의 난을 진압하고 무양현(舞陽縣)을 봉읍으로 받고 무양후(舞陽侯)라는 봉호를 얻는다. 한왕 신(信)의 난을 평정한 번쾌는 좌승상(左丞相)의 자리에 오른다. 번쾌는 [[여후]]의 동생 여수(呂嬃)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여후]]와의 사이가 다른 장수들에 비해 친밀했다. 고조 말기, 번쾌가 모함을 받고 분노한 고조가 [[진평]]에게 번쾌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하나, [[여후]]의 보복을 두려워한 [[진평]]은 번쾌를 압송한다. 그러나 장안에 도착했을 때 이미 고조는 죽은 뒤였고 번쾌는 [[여후]]에 의해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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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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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 사기 中 고조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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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 사기열전 中 번역등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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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2017년 6월 20일 (화) 18:32 기준 최신판

번쾌(樊噲)

출생 기원전 242년
패현(沛縣)
사망 기원전 189년

강소(江蘇) 패현(沛縣) 사람으로 (漢)의 개국공신이다. 대장군(大將軍), 좌승상(左丞相)을 지냈다. 여후(呂後)의 매부(妹夫)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여후의 신임을 얻었다. 뒤에 유방을 따라 노관(盧綰), 진희(陳豨), 한신(韓信) 등을 평정했다. 한고조 유방의 심복 같은 맹장(猛將)이다. 무양후(舞陽侯)로 봉해졌고, 시호는 무후(武侯)이다.

번쾌의 생애

고조와의 만남과 진나라 격파

패(沛)출신의 번쾌는 본래 개를 잡아 고기를 파는 것이 업이었으나 뒤에 고조가 죄를 짓고 피해 다닐때 함께했다. 그후 고조가 풍(豊)에서 기병하자 종군하여 패를 함락시켰다. 고조와 함께하며 진(秦)을 공격했다. 진나라의 승상 이사의 아들 이유(李由)의 군대를 격파하고 성무, 장사, 환원, 양성, 무관 등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쳐 고조와 항우의 군대 중 고조의 군대가 먼저 함양을 격파하고 아방궁에 들어설 수 있게 한다.

홍문연

고조가 먼저 함양에 도착하여 진 황제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고 관중지역을 점령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한 항우는 함곡관을 돌파하고 홍문에 진을 친다. 이에 고조는 항백(項伯)의 주선으로 항우를 면담하여 함곡관의 관문을 닫은 일에 대해 사과한다. 항우가 군사들을 위해 연회를 열고 범증(范曾)의 계획에 따라 항장이 검무를 추다가 고조를 살해하고자 한다. 이에 항백이 고조를 엄호한다. 이때 번쾌는 연회가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쇠방패를 들고 들어간다. 이에 항우가 번쾌에게 술동이와 고기를 주자, 번쾌는 술을 한번에 다 마시고 고기를 칼로 썰어 쇠방패를 접시삼아 먹는다. 그 후 번쾌가 "신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한 동이의 술인들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 더욱이 패공께서 먼저 함양에 진입하여 평정한 후에 군사들을 패상에 로숙시키며 대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도하신 대왕께서는 소인들의 참언을 믿으시고 패공을 적대하고 계시니 천하가 흩어지고 대왕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그 때를 틈타 번쾌는 고조와 함께 패상의 군영으로 돌아간다.

항우 격파와 그 이후

유방이 한왕(漢王)이 된 이후에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초패왕 항우와의 싸움을 시작할 때 번쾌는 종군하여 노, 하구, 설 등의 성을 공략한다. 그러나 항우가 팽성(彭城)에서 한왕을 패퇴시키고 곧 다시 번쾌가 공략한 땅을 수복한다. 한왕의 명에 따라 광무(廣武)를 지키던 번쾌는 한왕이 팽성으로 퇴각하는 항우의 뒤를 쫓을 때 양하(陽夏)를 함락 하고, 초나라의 장수 주장군(周將軍)과 그 군사 4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진(陳)에서 항우를 포위하고 크게 무찌른다. 항우가 죽고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 번쾌는 연왕(燕王) 장도(臧荼), 초왕 한신(韓信)의 난을 진압하고 무양현(舞陽縣)을 봉읍으로 받고 무양후(舞陽侯)라는 봉호를 얻는다. 한왕 신(信)의 난을 평정한 번쾌는 좌승상(左丞相)의 자리에 오른다. 번쾌는 여후의 동생 여수(呂嬃)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여후와의 사이가 다른 장수들에 비해 친밀했다. 고조 말기, 번쾌가 모함을 받고 분노한 고조가 진평에게 번쾌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하나, 여후의 보복을 두려워한 진평은 번쾌를 압송한다. 그러나 장안에 도착했을 때 이미 고조는 죽은 뒤였고 번쾌는 여후에 의해 석방된다.

참고자료

사마천 - 사기 中 고조본기 사마천 - 사기열전 中 번역등관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