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비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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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정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27일 (목) 12: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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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비는 제사

작품 정보

「복을 비는 제사」는 루쉰이 1924년 2월 7일부터 3월 25일까지 상해의 「동방잡지」에 발표한 루쉰의 두 번째 소설집 「방황」의 첫 번째 작품이다. 루쉰은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쓴 11편의 소설을 「방황」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1926년 8월 북경의 北新書局(북신서국)에서 출판하였다. 「복을 비는 제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것을 이끌 지식인의 상실이 담긴 절망적인 상황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

하단의 내용은 특정 작품의 줄거리, 결말 또는 중점요소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문단을 건너 뛰어주시기 바랍니다.

소설 속 화자 ‘나’의 넷째 숙부댁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샹린댁은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죽고 시부모와 함께 살며 지내게 된다. 그 뒤 도망쳐 나와 ‘나’의 넷째 숙부댁에서 제사 준비를 돕는데, 힘과 일솜씨가 좋아 웬만한 남자보다 일을 잘한다며 인정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시어머니는 아들이 장가 가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샹린댁을 허씨 마을에 팔아버린다. 샹린댁은 이에 저항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낳고 지내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새 남편이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어린 아들도 이리에 물려가 죽는다. 그렇게 또 다시 과부가 된 샹린댁은 다시 ‘나’의 넷째 숙부댁이 있는 마을로 돌아온다. 하지만 샹린댁은 두 번이나 과부가 됐다는 이유로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샹린댁은 제사 준비에서 제외됐으며, 그녀의 고달픈 인생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도 이야기가 몇차례 반복되자 흥미를 잃고 샹린댁을 무시한다. 류씨 어멈은 그런 샹린댁에게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샹린댁의 영혼을 찢어 두명의 전남편에게 나누어 줄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샹린댁은 이에 토지묘에 가서 문지방을 시주하고 온다. 그렇게 평안을 찾는가 했던 샹린댁은 동지 제사 때 준비를 도우려는 자신을 막는 사람들을 보고 낙담한다. ‘나’가 루전으로 돌아왔을 땐 샹린댁은 거지 꼴이 다 되어있었다. 샹린댁은 ‘나’에게 영혼과 지옥의 존재하느냐고 물었고, 잠깐 고민하던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한다. 다음 날 샹린댁은 자살한다.


작품 동기

루쉰이 쓴 동기

루쉰은 책의 동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그때 문학혁명에 대하여, 기실 어떤 열정도 없었으나 신해혁명과 원세개가 스스로 황제로 칭하는 것을 보고, 회의가 일어나고 실망하여 의기소침해졌다. 문화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열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펜을 들게 된 것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동감 때문이었다.” 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란 신청년을 발간하던 진독수 같은 친구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신청년 단체가 해산되자, 그는 “작가라는 하나의 직함이 내게 떨어져서, 나는 여전히 사막 한가운데서 왔다 갔다 하였다. 전투의 의지는 적지 않게 사그러들었다. 새로운 전우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표현하면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전우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그는 문화혁명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동감 때문에 펜을 들었다. 이러한 열정은 중국 인민을 계몽하고, 더 나은 중국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지식인들의 운동을 뜻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그 목표를 완수하지 못하고 신청년 단체도 뿔뿔이 흩어지면서, 그는 회의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작가라는 하나의 직함’이 루쉰에게 떨어졌기에,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막 한가운데서 왔다 갔다’ 하였다. 그의 마지막 말에서 이번 작품의 핵심을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전우는 어디에 있는가?” 루쉰은 새 전우, 즉 중국 인민을 이끄는 새로운 지식인을 찾고 있었다. 또한, 지식인들에게 중국 인민을 이끄는 일에 동참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화운동

신문화운동은 국민의 계몽을 목표로 구식 사고 방식을 버리고 민주주의와 과학을 받아들이기, 백화문 운동 등을 수행했던 운동이다. 이는 신해혁명 이후 이데올로기의 공백이 생겼고, 해결되지 못한 혼란과 함께 보수파들이 황제체제의 부활 등을 주장하면서 촉발되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진독수는 1916년 「청년」 제1권 제5호에 신문화운동의 주요 주장을 담은 글을 싣는다. 다수의 국민들이 유가의 삼각학설과 같은 전통관념과 결별하고, 서구의 자유, 평등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후스, 루쉰, 리다자오, 췐쉬안퉁, 류푸, 저우쭤런 등이 동참한다. 신문화운동의 핵심적 내용은 크게 ‘백화문 운동(과거의 정신을 담은 고어를 바꾸고, 읽고 쓰기 쉬운 구어체를 쓰자고 주장한 운동)’과 ‘민주주의 및 과학적 사고 주장’ ‘고대사, 민간 신화, 전설 등에 대한 고찰(공격)’으로 꼽아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의 봉건적 잔재를 제거하고, 국민의 계몽을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중국을 부흥시키자는 내용의 운동이었다. 위와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문화운동을 단순한 문화운동으로 평할 수 없다. 이는 중국을 부흥시키겠다는 구망적 성격이 들어갔던 운동이었다. 신문화운동은 대중의 운동이 아닌 소수의 지식인 운동으로 그쳤다는 점, 개인의 권리, 평등에 대한 집중 보다는 중국의 부흥이라는 구망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5.4운동

5.4운동은 1919년 5.4일 베르사유 평화회담 참가국들이 과거 산동에서 독일이 보유하던 조차지를 일본에 넘겨주기로 한자, 이에 반발하는 3000명의 북경대학생 시위를 기점으로 시작된 반제·반봉건적 운동이다. 처음에는 친일파의 집을 태우고 주일공사를 구타하는 등의 시위가 펼쳐졌지만, 이는 점점 동맹 휴학과 애국단체 조직으로 확장된다. 상인들과 노동조합이 참여하면서 민족주의 감정은 점점 고조됐다. 5.4운동은 신문화운동 때의 주장(계몽, 과학적 사고, 개인주의, 백화문 등등)을 확장하고 이에 애국주의 반제의식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작품 주제

「복을 비는 제사」는 ‘지식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루쉰이 쓴 동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신문화운동과 5.4운동 당시 지식인이 민중을 일깨우고, 민중이 스스로의 생활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곧 지식인 존재의 이유이고, 지식인의 가치였다. 만약 이러한 역할을 해내지 않으면, 지식인의 존재 가치는 없는 것이었다. 작품의 ‘나’같은 지식인은 그와 같은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스스로의 영혼을 편안히 놓을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루쉰은 신문화운동과 5.4운동 이후로도 바뀌지 않는 인민의 삶과 무책임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면서 좌절한다. 그는 ‘나’와 같은 무책임한 지식인을 소설에 등장시키면서 대중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식인이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또한, 무책임한 지식인과 함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봉건의 잔재들 – 유교적 관습, 가부장적 전통, 미신 등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샹린댁’과 같은 순수한 민중의 피해로 돌아간다. 루쉰이 앞서 찾았던 ‘새로운 전우’처럼 그는 민중을 일깨우고, 민중의 삶을 바꿔줄 지식인들을 찾았던 것이다.


작품해석

  • 영혼의 유무에 대한 샹린댁의 질문과 ‘나’의 답변
 나는 갑자기 겁이 나서 방금 했던 말을 뒤집어엎고 싶었다. “그건…..사실 말이지 난 잘 모르겠어요 …..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정확히 몰라요.” (중간생략) 만약 다른 뜻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의 대답은 정말로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닌가….. (중간생략) 하물며 “잘 모른다”고 분명하게 말해 내 대답을 부정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잘 모른다”는 한마디는 아주 유용한 말이다. 세상 경험이 적은 용감한 청년은 종종 사람들에게 과감히 의문을 해결해 주려고도 하고 아픈 사람에게 의사를 청해 주기도 하지만 만일 결과가 좋지 않으면 도리어 원망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지만 잘 모른다는 한마디로 결론을 지으면 만사가 무탈하다. 나는 이때 이 말의 필요성을 느꼈다.

영혼의 유무는 샹린댁에게 아주 큰 의미였다. 그것은 죽음 후에도 지옥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삶 전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나’가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녀의 속사정이나 질문의 의도를 캐내려고 하지 않고 그저 “아마도 있을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지식인으로서 인민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샹린댁의 고민을 외면하고 그저 ‘잘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루쉰이 생각하던 지식인의 책무 – 인민을 계몽하고, 이끄는 것과는 정 반대의 태도였다. 이에 샹린댁은 절망하고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샹린댁이 죽고 나자 ‘나’는 혼란스러워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통해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

 영혼의 유무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그러나 현세에서 살아 봤자 별수 없는 자가 죽는다는 것은 보기 싫던 자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남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모두 좋은 일이다. 나는 창밖에 사락사락 소리를 내면서 내리는 누에 귀를 기울이며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중간생략) 이 번잡한 소리에 안긴 나는 나른하고 또 편안해진다. 오직 천지간의 신들이 바친 제물과 술과 향불 연기에 거나하게 취해 하늘을 비틀비틀 거닐면서 루전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행복을 약속해 주는 것만 같았다.

이렇듯 ‘나’는 끝까지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고, 도리어 ‘편안해진다’고까지 느끼고 있다.
루쉰이 이 작품에서 가장 말하고자 했던 부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바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루쉰이 생각했던 지식인은 인민을 이끌고, 인민을 일깨우고,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루쉰이 보기에 위 운동들은 성공하지 않았으며 지식인들은 책임을 회피하는데만 급급했다. 마치 샹린댁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는 ‘나’처럼 말이다. ‘나’는 그 당시 지식인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성의한 지식인의 태도는 곧 인민의 절망, 피해로 이어진다. 루쉰은 이 같은 무책임한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지식인들이 인민을 이끌고 인민을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더 나아가서, 지식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루쉰은 지식인이란 민중의 생활을 개선해야 하며, 이것이 곧 지식인 존재의 이유라고 말한다.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의 목표처럼, 지식인이 민중을 일깨우고,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쉰은 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자조하듯이 그리며 소설을 마무리 짓고 있다.

  • 봉건적 잔재

「복을 비는 제사」에는 여러가지 봉건적 잔재가 등장한다. 우선 처음 샹린댁이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구습, 그녀가 식모살이를 할 때 재가를 이유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유교적 도덕, 그런 샹린댁을 보며 손가락질하는 대중들, 류씨 어멈이 말한 영혼이 두개로 찢어진다는 미신 등등이다. 이러한 봉건적 잔재들로 인해 샹린댁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대중들은 처음에는 샹린댁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만, 후에는 ‘싫증 난 장난감’같이 취급하며 샹린댁의 아픔을 무시한다. 리하이옌은 이에 부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친족 시스템이 샹린댁의 상황을 차단하는 장벽처럼 기능한다고 했다.[1] 즉, 두 번이나 과부가 된 샹린댁은 가부장제의 상상적 순수성을 더럽히는 여성이고, 그런 그녀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샹린댁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그 뒤로 삶의 의욕을 잃고 급속도로 무너지게 된다.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은 위와 같은 봉건적 잔재를 제거하려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운동 후에도 위 잔재들은 남아있었고, 루쉰은 샹린댁의 인생을 보여줌으로써,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참고 문헌

존 K. 페어뱅크, 김형종 역, 『신중국사』, 까치(까치글방), 2005

金明姬, 魯迅의 「복을 비는 제사(祝福)」에 나타난 靈魂의 문제, 중국현대문학 제24호, 2003.3

  1. 김선영, 루쉰(魯迅)식 새로운 허구적 글쓰기의 시작 : 『고사신편(故事新編)』의 『보천(補天)』 창작배경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논총 39(2), 20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