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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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진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12월 10일 (일) 13: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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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의 의의

분서갱유는 다른말로 진화라고도 불린다. 이는 진시황이 사상통제의 일환으로 농서를 제외한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때 불태운 서적들은 현대와 다르게 대부분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시기에 기록 수단이었던 죽간이었다. 이는 언론이나 문화에 대한 탄압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분서(焚書, BC 213년)

의의

진나라는 군현제도를 채용했으나 유학자 가운데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찬양하고 황제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는데, 황제는 이설을 탄압하기 위하여 기원전 213년 박사관 소장의 서적과 의 · 약 · 복서· 농업 서적 이외의 민간 소장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다.

배경 : 주청신(周靑臣) VS 순우월(淳于越)

분서는 시황제가 함양궁에서 베푼 연회에서 주청신과 순우월의 갈등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사마천의 「사기 – 진시황본기」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청신의 시황제 찬양

시황제가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푸니 박사 70여명이 나와 축수(祝壽)를 올렸다. 복야(僕射) 주청신이 나아가 찬양하기를, “이전에는 진(秦) 땅은 사방 천리에 불과했으나, 폐하의 신명(神明)에 의지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만이(蠻夷)를 몰아내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후국을 군현으로 삼으시니, 사람마다 안락함을 누리고 전쟁의 근심이 사라져, 그 공적을 만세에까지 전하게 되었습니다. 상고(上古) 이래의 군주들도 폐하의 위엄과 덕망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시황제가 기뻐하였다.

순우월의 비판

이에 제(齊)나라 사람인 박사 순우월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은(殷), 주(周)의 왕조가 천여 년 간 지속되면서 자제와 공신들을 봉하여 왕실을 보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소유하셨지만 자제분들께서는 오히려 평민으로 계시는데, 만약 전상(田常)이나 진(晉)의 육경(六卿)같은 신하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황제를 보필할 자가 없으니 어떻게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인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일은 이제껏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 주청신이 면전에서 아부하여 폐하의 과실을 가중시키려고 하니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시황제는 대신들에게 이 의견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비록 그의 의견이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진나라의 신제도인 군현제를 비판하는 순우월의 발언에는 봉건제도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함께 유가사상이 담겨있었다. 이는 진나라의 통치 이념인 법가사상과 충돌되는 것이었다.

내용 : 이사(李斯)의 진언

이에 진의 승상 이사(李斯)는 순우월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오제(五帝)의 다스림이 서로 중복되지 않았고,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가 서로 이어받지 않고 각자의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린 것은 서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여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대업을 창시하여 만세의 공덕을 세웠으니, 진실로 어리석은 유생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순우월이 말한 것은 삼대(三代)의 일이니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전에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으므로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으로 유사(遊士)들은 초치하였습니다. 이제 천하가 안정되어 법령이 통일되었고, 백성들은 집안에서 농공(農工)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력과 형법을 학습하고 있거늘, 지금 모든 유생들은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것만을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며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승상인 신 이사가 황공하게도 아뢰옵니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서로 군사를 일으키고, 하는 말마다 모두 옛것을 말하며 지금을 비난하고, 허망한 마을 늘어놓아 실질적인 것을 어지럽게 하고, 사람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배운 것을 찬양하여 조정에서 건립한 제도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 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이 지존(至尊) 한분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하셨거늘, 개인적으로 학습하여 함께 조정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 법령을 들으면 각자 자기의 학문으로써 그 법령을 의론하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조정을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의논하며,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여 명예를 구하고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서 자신을 높이려고 하며, 백성들을 거느리어 위에서는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朋黨)이 형성될 것이오니, 그것을 금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아래와 같이 <분서(焚書)>를 진언했다.

“신이 청하옵건대 사관에서 명하여 진(秦)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버리고, 박사관(博士官)에서 주관하는 서적을 제외하고서 천하에 감히 수장되어 있는 『시(詩)』, 『서(書)』 및 제자백가의 저작들을 지방관에게 보내어 모두 태우게 하며, 감히 두 사람이 『시(詩)』, 『서(書)』를 이야기하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사형시켜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며,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는 모두 멸족시키고, 이 같은 자들을 보고서도 검거하지 않는 관리는 같은 죄로 다스리소서. 명명이 내려진 지 30일이 되어도 서적을 태우지 않는 자는 경형(黥刑)을 내리어 성단형(城旦刑)에 처하십시오. 다만 불태워 제거하지 않을 서적은 의약, 점복, 종수(種樹)에 관계된 서적뿐이며,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옵소서.”

이에 진시황이 영을 내려서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때 실제로 소각된 서적 대부분은 6국의 역사서들이었으며, 제자백가 서적은 그 다음이었고, 유가 경전을 살아남아 박사부의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학자들의 분로를 샀고, 최악의 <문화 참사>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었다.


갱유(坑儒, BC 212년)

진시황은 서적을 모두 태운 뒤에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 460여 명을 구덩이에 생매장했다. 그러나 이 갱유에 대해선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으로 추측하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