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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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실크로드 전민수 천호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 대한 고정관념

실크로드는 흔히 ‘동서양의 교류, 만남의 무역로’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실크로드를 배경으로 한 컨텐츠물을 살펴보면, 동양과 서양, 당 제국과 유럽의 이분법적 구도에 입각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으며 마치 이 두 세력이 주요 역할을 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과연 이런 양상을 ‘사실’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실크로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무역로는 기원전 1~2세기 한나라 때 한 무제, 장건에 의해 서역과 접촉 할 수 있는 길이 개척되었고, 6~7세기가 되어 당나라 때에 본격적으로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흔히 알고 있는 실크로드의 모습이 당 제국과 유럽을 잇는 길이라면 13세기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왔다 간 경험인 <동방견문록>은 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 또, 지리적으로 유럽과 중국 사이에 넓은 영역의 사막과 고산이 펼쳐져 있었고, 그 지역은 유목생활을 하는 이민족들을 비롯해, 이슬람교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이런 여건을 뚫고 교류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러한 부분들만 살펴보더라도, 우리가 지금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무역로가 개척되고 나서 몇 세기가 지날 때 까지만 해도, 직접적 교류를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일 임을 알 수 있고, 동서양의 연결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이 왜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말로 표현이 되었고, 누가 이 역할을 수행하였는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 일대의 세력과 중국 서북쪽의 유목세력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중국의 크기는 청나라 때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며, 원나라 때를 제외하고는 중국은 대부분 중원에 집중된 국가였다. 그리고 이 중원의 주위, 즉 중국의 북쪽과 서쪽에는 돌궐, 토번, 위구르 등 여러 이민족이 존재했으며, 이들의 존재는 중원 국가의 확장에 종종 걸림돌이 되었다.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원국가는 이들에게 명분상으로는 조공을 받고 주종관계를 맺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런 이민족들에게 매해마다 막대한 양의 물질적 원조를 해주어야만 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오랜 유목생활로 기마생활과 전투에 능한 유목계 이민족들이 버티고 있는 서북쪽 지역을 뚫고 지나가는 일이란 대단히 어려웠으며, 타림분지, 타클라마칸 사막, 곤륜산맥 등 통과하기 어려운 지형적인 원인도 중원국가의 서쪽으로의 진출에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6~7세기경 마호메트의 영향으로 이슬람제국이 세워지고 교리 전파를 목적으로 정복활동에 나서면서 유럽 국가들 역시 이슬람 세력들의 영향을 받았다. 옴미아드 왕조가 에스파냐까지 정복하기도 했을 정도로 이들의 영향력 역시 대단했다. 중국과 서양은 접촉이 거의 없어 서로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을 뿐더러, 이러한 외부세력의 존재 또한 이들의 교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럽과 중국 사이의 이 세력들은 그저 방해꾼에 불과한 존재였을까?

소그드인

이들 세력은 크게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에 분포한 이슬람 세력과 타림분지,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돌궐, 위구르, 토번과 같은 이민족들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중 당나라 때에 들어 교역에 활발해졌을 당시 교역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소그드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주로 오아시스 주변에 정주하는 집단이었고, 견고한 국가기반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각각의 독립도시를 형성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흡사 유목민족과도 비슷한 모습을 띠기도 했다.

소그드인의 상업과 언어적 능력

“이들은 모두 장사를 잘하며, 남자는 다섯 살이 되면 글을 배우고 조금 알게 되면 각지에 보내 장사를 배우게 한다. 이익을 많이 얻을수록 좋다고 한다.”
“소그드인은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꿀을 먹이고 손에 아교를 쥐어 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입으로는 항상 꿀처럼 감언을 말하고, 손에 돈이 들어오면 아교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그드문자를 배우며 장사에 능하고 지극히 적은 이익도 다툰다. 남자가 스무 살이 되면 장사를 위해 가까운 이웃 나라로 여행을 보내는데, 중국에도 찾아온다. 이익만 있으면 그들이 가지 않은 곳은 없다.”

 
— 구당서(舊唐書) 中

위 문장과 같이 소그드인들은 어렸을 적부터 경제활동과 처세를 중요시 했다. 여기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소그드인들의 생업구조가 다양하지 않았다. 원래 이들은 주로 오아시스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오아시스 관개 농업에 종사했으나, 오아시스의 수량이 한정되어 있고, 생산량 또한 크게 많지 않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는 수공업 정도가 전부였다. 이로 인해 이들은 도시 안에서 생계를 도모하기 보다는, 외부로 나가서 직접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또한, 이들은 지리적으로 별다른 방해물 없이 여러 국가, 문화권과 접해있었다. 서쪽으로는 이슬람 제국, 북쪽으로는 유목민족,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토번과 당 제국 등 각기 다른 세력들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것은 장점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여러 문화권과 인접해있어 여러 문물을 접할 수는 있었으나, 지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침략대상이 되기 쉬웠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상업과 상업을 보조할 언어적 능력을 익히는데에 주력했으며, 유리한 지리적 잇점을 통해 주로 교역활동에 집중했다.

소그드인들의 인정받은 상업적, 언어적 능력

이렇게 여러 제국들과 맞닿아 있으나 방어해줄 만한 지형적 특징이 없다 보니 침략을 받기 쉬운 구조에 놓여있었고, 이들은 저항보다는 공생에 길을 택해 유목민들과 협력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길을 택했다.
벽화 등의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소그드 사회에서의 정치, 군사 방면의 권력은 투르크인(돌궐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그드인들이 숫자가 많지 않고 전투력이 뛰어나지 않은 반면, 지리적 여건상 침략 받기 쉽기 때문에 투르크 국가에서 토둔이라는 총독급 직책을 가진 관리가 와서 소그드 국가를 감찰, 보호하고 공납을 일종의 보호비 명목으로 징수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 여겨 볼 점은 소그드인들이 속국으로 투르크인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독립국가의 상태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투르크 국가의 군주인 카간들이 이들의 상업적 능력을 인정해, 자신들에게는 없는 이들의 상업적 능력을 이용해 물질적으로 이익을 남기기 위함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들의 상업적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6세기 서돌궐이 소그디아나 지역을 차지하고도 서돌궐이 공식적인 외교용어로 소그드어를 채택했다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 하는 동시에, 이들의 언어가 비교적 합리적인 언어였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소그드어는 고대 아랍문자를 변형시켜 생겨난 문자인데, 서돌궐 카간이 공식 외교용어로 채택해 실질적인 실크로드상의 공용어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7~8세기경 생겨난 위구르 문자 역시 소그드어를 차용한 점, 징키스칸 대에 이르러 많은 영토를 정복한 몽고족 역시 소그드어와 그것을 차용한 위구르문자를 보고 창안하여 문자를 만들었고, 만주족 까지 이 영향을 받았다는 데에서, 소그드인의 언어적 분야에서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생활속의 물건들

이 소그드인들을 비롯해 위구르 상인 등 여러 교역상인들이 교역한 품목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여러 작물들을 비롯해, 공예품, 금속 등 다양한 품목이 있는데, 그 중 우리에게 친숙하나 어디에서 왔는지 잘 몰랐던 품목들이 몇 가지 있다.
수박 –수박이 중국어로 ‘西瓜(서과)’라고 불리는 이유는 서역으로부터 온 ‘외’종류의 작물 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 일대가 원산지이나 이후 유럽과 서역 등지로 전파되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중국에까지 전파되면서 서과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들어오게 되었다.
후추 – 후추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시 중국이 서쪽의 페르시아를 비롯한 여러 오랑캐들을 호(胡)라는 이름으로 불러, 호풍, 호악과 같은 말들도 그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서역으로부터 들여오는 향신료의 일종을 호조(胡椒)라고 불렀고, 이것이 후추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하나의 설은 한 무제 때 장건이 호(胡)나라에 가서 들여온 향신료이기 때문에 후추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호떡 – 중앙아시아와 인도 일대에서 ‘난’이라는 빵과 비슷한 먹을거리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도 전파되면서 ‘떡’이라는 우리말과 결합되어 호떡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역상인들은 가벼우면서도 장기보존이 가능한 식품을 휴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므로 호떡과 비슷한 음식을 갖고 다녔고, 이것이 우리나라까지 전파되게 되었다.
이것들 외에도 포도, 오이, 석류, 호두, 연화, 유리, 카페트 등 여러가지 상품이 서역상인들을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고, 우리나라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한 때 중국의 유행을 주도한 호풍(胡風)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위치했던 세력들은 동서양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화권을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은 미술로 드러나게 되었다. 여러 종류의 그림과 건축양식 뿐만 아니라, 옛날의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표현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작물 역시도 무늬를 표현하는 예술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석류의 단면이나 연화의 모양 같은 경우 좋은 무늬를 제공하는 자원이 되었고, 포도 같은 경우 색깔을 내는 염료로써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들의 미술은 곧 의복이나 카펫과 같은 직물에 표현되었고, 중국에서는 이것을 호풍이라고 불렀다. 또한, 당시 당나라는 비교적 풍족한 시절로, 뱃살을 드러내고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흉이 아니라 복으로 표현되기도 했으며,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작물, 음식, 문화를 접하면서 그들의 의복과 스타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서역의 독특한 스타일은 당나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 내부에서는 이들의 의복이나 머리스타일을 따라하는 유행이 생기기도 했으며, 당시 류트 하프와 같은 악기를 가지고 서역에서 소그드인, 페르시아인들이 장안으로 들어와 춤, 음악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이것이 궁중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은 안록산의 난 이후 이들이 당나라에서 축출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통해 이들의 문화가 당나라의 한 유행의 흐름을 주도하기도 했다는 부분을 알 수 있다.



제지술의 전파

종이의 기원

종이는 넓은 의미로는 서사재료를 통틀어서 말하는 것으로 서양의 점토판, 파피루스, 피혁지, 동양의 귀갑수골, 목간, 죽간, 채후지 등 서사재료 전반이 다 포함된다. 좁은 의미의 종이는 식물성 셀룰로오스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현재의 종이 채후지를 말한다. 실크로드의 서쪽 끝인 로마는 이집트에서 온 파피루스를 쓰다가 내구력이 강하고 잉크의 흡수력 또한 더 빠르고 파피루스 보다 자유로이 접을 수 있는 양피지를 사용하였다. 파피루스는 로마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지만, 양피지는 13~14세기 중국의 제지술이 전해질 때까지 유럽의 주 서사재료로 쓰였다.
중국에서는 갑골문자로 시작해서 청동기, 죽간, 목간, 백서 등으로 서사재료가 변천했다. 그러다가 부피가 크고 무거울 뿐만 아니라 많은 글자를 쓰지 못하는 죽간, 목간과 값이 비싼 백서 등 이러한 문제점을 가진 서사재료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서사재료가 채후지이다. 채후지는 후한의 채륜이 105년에 발명한 것으로 흔한 식물성 섬유인 셀룰로오스를 주원료로 하는 종이이다. 제지술에 대한 채륜의 획기적인 기여는 서사재료로서의 종이가 문명발달을 크게 촉진하도록 도와주었다.

제지술 전파의 시작, 탈라스 전투

제지술의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유럽전파의 중요한 계기는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석국, 이슬람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이다. 고선지는 누구이며 탈라스 전투는 어떤 전투인가?

서역 정벌 고선지 장군

현종은 당과 아랍 국가들의 연결하는 교통로인 파미르고원을 차지한 토번을 정벌하기 위해 고선지를 파견 보냈다. 고선지는 행영절도사로 되어 토번과의 연운보 전투 승리를 이끌고 소발률국 정복하였다. 파미르 고원의 점령의 의미는 서역제국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고 그들을 당에 복종시켰다. 또한 당시 서역은 당과 토번, 대식의 각축장이었는데 정복 이후 서방세계를 공격하지 않고서도 토번과 대식을 제압하고 서역의 최강자로 부상했다.
고선지는 고구려의 후손으로 고구려유민 고사계의 아들이다. 아버지 고사계가 당나라에 잡혀와서 당시 고구려인들의 강제집단 포로거주지였던 영주 부근에서 고구려여인과 결혼해고 고선지를 낳았을 거라는 추정이다. 비록 출생지는 당나라지만 부모가 모두 고구려인이라는 점에서 역사가들이 고선지를 고구려인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고선지가 아버지 고사계로부터 받았던 교육은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등이었다. 당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락한 이민족에게 허락된 유일한 신분상승의 길은 군인으로 등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이주하여 20대에 유격 장군으로 승진, 그 후 서역 정벌을 통해 안서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가 고선지가 장군으로서 최고의 기량을 갖추었던 사실을 평가 받은 시점이다. 그 이유는 당에서 도호를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에게 임명하였던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선지가 안서절도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당에서 고구려출신으로 최고관직에 올랐던 것이나 다름없다.

아랍 세력의 등장

안서절도사로 임명된 후, 석국이 조공 의무를 다하지 않자 안서절도사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석국 정벌을 당에 요청하였고 이 과정에서 석국왕과 왕비, 왕자, 공주 모두 포로로 잡아 당으로 압송했다. 당시 아랍은 마호메트의 이슬람교 창시로 아랍세계의 통일을 이루었고 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서역으로 세력을 넓혀 스페인까지 함락시켰다. 이런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간 다툼에서 결정적인 전세의 역전을 불러온 계기는 등자(말에 병사의 다리를 고정시키는 장치)의 전래이다. 등자의 전파로 서양 기사들도 말을 타고 활, 창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이슬람 세력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이후 등장한 압바스 왕조는 동진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서역은 이제 당-대식 간의 대결이 되었다.

탈라스 전투

포로로 잡혔던 석국의 왕자는 다행히도 망쳐 대식에 도움을 요청한다. 동진 정책을 취하고 있던 대식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한 석국왕의 죽음과 당군의 무분별한 약탈로 인한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 전투의 승기를 크게 이끌었다. 서아시아 연합 군대와의 전투를 심각하게 받아드린 당은 번, 한 무리를 동원하여 7만의 군사를 이끌고 갔다. 두 부대는 탈라스에서 5일간 전투를 했는데 당군에서 돌궐의 한 부족이었던 케르룩의 반란으로 고선지의 원정군은 군사 5만이 죽고 2만이 포로가 될 정도로 완패하였다.

제지술의 전파와 의의

당의 군 모집은 전형적인 부병제로 농사를 짓다, 금속기술자로 지내다, 제지기술자로 일하다 당군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에 고선지 연합군의 포로 중에 몇몇의 제지기술자가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수원이 풍족하고 수리관개가 발달하여 자연조건으로 보아 종이 원료를 재배할 수 있는 최적지였기 때문에 이곳에 진출한 아랍인들은 당의 제지기술자들의 지도와 전수를 받아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나오는 종이를 당시 '사마르칸트지'라고 불렀다. 제지술은 이곳으로부터 점차 이슬람제국 각지에 전파됨으로써 사마르칸트는 이슬람제국의 제지업 시초 지역이 되었다. 그 후 압바스 왕국의 수도인 바그다드, 전 왕국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를 거쳐 13세기부터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결국, 프랑스와 영국까지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대략 1300년경이다. 제지술전파는 종이의 대량생산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지식이 대중적으로 보급되어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다.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벗어나 문예부흥기로 접어든 르네상스가 바로 1300년대 후반이라고 세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의 패배는 이슬람과 서양의 학문이 부흥되고 오늘날의 종이문명이 있게 한 문명사의 대전환이었다. 세계문명사를 뒤흔든 종이 전파의 시작이 바로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였고 종이 전파의 시작지 역할을 한 곳이 사마르칸트이다.


안녹산의 일대기

안녹산의 유전자

안녹산은 이란계에 속하는 소그드인 아버지와 투르크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이다. 소그드인은 여러 차례 주변 민족의 지배를 받고 또 패권 쟁탈전에 휘말려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강인한 잡초와도 같은 생활력과 지리적 이점을 적극 살려 동서양의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사마르칸트는 소그드인의 중심지인데 그 곳은 실크로드를 비롯한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일찍부터 교역이 성행하였고 때문에 소그드인은 선천적으로 상업적 재능이 뛰어났고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였다.
안녹산의 전기에는 모두 '강 누구가 돌궐의 무녀인 아사덕 씨족의 딸과 결혼하여 안녹산을 낳았다'고 적혀있다. 아버지가 강씨인데 안녹산은 왜 안씨인가? 소그드인은 중국에서도 각각 출신 국가의 국왕의 성에 따라 중국식으로 성을 지었다. 강(康)은 사마르칸트 지역을 뜻하고 안(安)은 부하라 지역을 뜻한다. 안녹산은 어릴 때 친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돌궐에서 살았는데, 어머니는 뒤에 의부인 안연언과 생활하였다. 때문에 안녹산은 성은 안씨이지만 강씨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사마르칸트의 기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녹산 당으로 망명하다

안녹산의 의부 집안이 숙청위기에 휘말려 국경을 넘어 당으로 망명했다. 낯선 땅에서 무자본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주변 민족의 사정이 밝은 안녹산은 당시 자본이 필요없는 호시아랑(互市牙朗)[1]으로 활동하였다. 호시아랑은 외국 상인과 당 상인과의 중개를 업으로 하는 역할이다. 안녹산이 당의 수비군이 된 시기를 알려 주는 사료는 없지만 유주절도사 장수규의 만남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당시 장수규는 황제의 신망이 두터워 위세 등등하였기 때문에 안녹산은 그의 신임을 얻으면 자신의 위신 역시 높이 올라갈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장수규는 안녹산을 재치 있고 지리에 밝으며 어학에 능한 데다 또 매우 용감하여 오랑캐를 상대로 한 전투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거둬 들이고 자신의 부관으로 승진시켰다. 결국 안녹산은 추하고 괴이한 용모를 갖고 있었지만 넘치는 재치와 언변으로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비상하였다.
안녹산은 거란 토벌전에서 그 전까지 전승으로 이겨 적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다가 한 번 대패를 하여 그의 신변에 큰 일이 생겼다. 본래는 안녹산의 경솔한 행동으로 군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기 때문에 군율에 의해 사형에 처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거란 토벌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지리에 능하고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용맹하고 지략에 뛰어난 그를 한 번의 실패로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 때 현종은 군율에 따라 죽이지 못하면 군율을 가볍게 여기는 군사가 등장하고 사기도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과 대립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안녹산의 관직을 박탈하는 수준으로 처벌을 하였다. 현종은 안녹산이 다시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기 원했고, 또 냉혹하게 처단할 경우 그것이 민족 차별로 보여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안녹산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현종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출세를 위해 처세의 모든 기술을 다 구사한 안녹산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그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그는 종종 영주에 온 황제의 칙사에게 극진한 향응을 제공하고, 돌아갈 때는 막대한 선물을 주었다. 안녹산은 정계의 부패와 관료제의 약점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 후에 영주도독으로 발탁되었고 탄탄한 승진 고속도로를 타게 되었다.
5개월 뒤 초대 평로 절도사로 임명되는데 이를 당시 역사적 사실과 연관시켜 보면 당시 변방에 많은 전투로 병력이 부족했다. 이민족들이 한족보다 더 용맹하고 날렵했기 때문에 국경 병사로 그들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점점 이민족들의 병사가 늘자 그들의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부족장을 장군으로 발탁하였다. 또한 조정에 있는 이임보는 자신의 재상 자리를 위협받지 않고 안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는 현종을 꾀어 한족이 더 이상 절도사 자리를 통해 입궁하지 못하도록 이민족을 절도사에 앉혀놓는 걸 추진했다. 이에 이민족 출신인 안녹산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안녹산과 양귀비의 만남

현종이 안녹산을 위해 성대한 축하연을 여는데 이때 현종은 안녹산과 양씨 일족에게 의형제를 맺도록 하였고, 안녹산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안녹산은 양귀비의 양자가 되었다. 여기서 안녹산은 재치를 발휘하는데 현종과 양귀비 앞으로 나아가 양귀비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현종이 의아하자, “우리네 잡호는 어머니가 먼저이고 아버지는 그 다음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이 일로 안녹산은 양씨 일족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었다. 또한 현종의 신망을 더욱 두텁게 하여 지위가 올라 평로절도사 뿐만이 아니라 범양 하동 절도사까지 임명되었다. 군사력은 약 57만 명으로 당 전체의 3 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임보는 재상자리를 통해 막대한 권력을 누렸는데 그는 안녹산을 후원해주는 든든한 관료였다. 양국충은 양귀비의 후광을 받아 출세를 하였지만 그의 재무 관리 능력은 당대 일인자로 손 꼽혔다. 양국충은 현종의 신임을 얻어 더욱 출세를 하였고 이임보 자리까지 위협했다. 양국충의 권세가 이임보보다 앞서게 되었을 때 이임보 일파를 실각시켰고 결국 그는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재상 자리가 비게 되자 안녹산 역시 그 자리를 탐했지만 양국충의 계략으로 얻지 못했다. 안녹산과 양국충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후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다.


반란의 준비

양국충은 안녹산의 힘이 커지자 안녹산을 몰락시키기 위해 그를 도발하였다. 안녹산 저택을 포위하여 그 일당을 붙잡아 고문한 다음 모두 목 졸라 죽이고 또 안녹산의 오른팔이었던 길온을 좌천시키는 등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안녹산은 전쟁이 터지면 민족 사이에 대립 감정이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인 장군을 모두 번장으로 바꾸고 장병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은혜를 베풀어 환심을 사고 반란 준비를 하였다.

안녹산의 난

안녹산이 거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당 조정까지 들려왔지만, 양국충은 대당 제국이라는 허울에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안녹산이 곧 잡혀 올 거라는 호언장담을 하였다. 문인들 역시 적과 아군의 병력을 단순하게 비교하고 또 본거지를 벗어나 싸우는 안녹산군이 불리할 것이라고 안일한 추측을 했다. 하지만 급하게 모이고, 평소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에 눈이 먼 당 병사들은 안녹산의 기개로 똘똘 뭉친 병사들을 대적하기에는 어림 없었다. 순식간에 낙양은 함락이 되고 안녹산은 황제가 되어 국호를 연(燕), 연호를 성무(聖武)로 하고 대연성무황제라 칭했다. 그 뒤 안녹산군은 수도 장안을 방어하는 최후의 거점이었던 동관을 차지함으로써 장안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당 황족은 촉으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안녹산군은 손쉽게 장안을 점령하였다.
안녹산은 원래 거구의 체형으로 움직이는데 불편했고 또 낙양으로 입성할 무렵부터 눈병을 앓아 갑자기 시력이 나빠지고 악성 종기까지 생겨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피로때문에 시중드는 자가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매질하고 심할 때는 죽이기 까지 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그 중 중서시랑으로 모든 정무를 관리하는 엄장은 안녹산의 둘째아들 안경서와 환관 이저아를 꾀어 안녹산을 암살하였다. 안녹산은 제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생애를 마감하였다.

안녹산 평가

안녹산은 황량한 대자연 속에서 나면서부터 용감한 전사로 키워지는 유목 사회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동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처참하고 슬픈 체험을 했으며, 당의 수비군이 되어 유목 민족과 사투를 벌이며 살았다. 또한 보통 수단으로는 통하지 않는 상인을 상대로 하는 아랑을 직업을 삼으면서 영악해진다. 그는 본인의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투쟁으로 생각하여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고 자신의 능력으로 이겨내려고 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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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현, 「고선지의 탈레스전투」

  1. 아랑은 여러가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빼어난 외국어 실력은 아랑 생활을 하는 동안 습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일찍부터 동북 지방에 터전을 잡고 주변 민족의 사정에 밝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