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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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iyuan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5월 7일 (토) 20:03 판 (역사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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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사상

사기의 가치와 영향

문학적 가치

기전체의 시작

이전의 역사편찬은 모두 편년체로 기술되었다. 편년체는 역사기록을 연,월,일 시간 순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역사기록이 분산되지 않고 편찬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 같이 역사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힘들다. 그 당시에는 정부의 기록이 바로 역사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편년체로 쓰여졌던 것이다. 이때, 사마천이 기전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사기>>를 쓰게 되는데 이것은 역사서의 혁명이었다.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이루어져있다. 본기本紀는 삼황오제부터 한무제까지 황제나 천하의 권력을 가졌던 인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엮어 총 12편으로 구성되어있다. 표表는 황제시대부터 한무제까지 족보의 형식으로 인물을 서술하였고, 연대에 따라 사건을 기입하여 본기에 나오는 제왕과 제후의 흥망을 총 10편에 담아 기록하고 있다. 10편 중 1편은 하,상,주 삼대와 오제의 제왕들의 세계世系를 다룬 세표世表이고, 1편은 진한 교체기를 월별로 기록한 월표月表이며, 나머지 8편은 모두 연표年表이다. 서書는 정책과 제도, 문물 등 각 2편씩 짝을 이뤄 총 8편으로 기록되어있다. 후에 서는 지志로 바뀌지만 제도사의 성격은 그대로 유지된다. 세가世家는 편년체와 기전체가 병용되는데 제후, 공신 등 한 시대를 이끌어 나갔던 막중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을 총 30편에 담아내고 있다. 그 중 춘추전국시대가 18편이고, 대가 12편이다. 세가는 후에 기전체의 구성에서 제외된다. 열전列傳은 <<사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으로 사마천의 역사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다. 영웅, 정치가, 학자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까지 모든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을 모아 총 70편에 기록하고 있다. 기전체는 단순한 연대순의 역사서가 아닌 각 시대의 주요한 인물과 제도, 문물, 경제, 다양한 현상 등을 모두 아울러 서술하여 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한 인물을 보고자 했을 때, 그 인물과 관련된 인물과 그 당시의 상황이 유기적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사마천이 기전체라는 것을 세상에 내보인 후 기전체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기전체는 정사正史서술의 기본체재로 자리잡게 된다.

호견법의 첫 등장

<<사기>>는 단순히 인물을 기록만한 것이 아니다. 그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듯 포만감있게 형상을 묘사하였다. 세목의 묘사를 통하여 주제도 드러내고 그 인물을 완벽하게 재현해내었다. 사기 속 인물이 이렇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생동감 있게 표현된 것은 바로 ‘호견법’ 때문이다. 호견이란 한 인물과 한 사건을 여러 편에 분산시켜서 엇갈리게 표현하는 것이다. 본전에서는 빠져 있으나 다른 전에서 다룸으로서 서로 보충되면서 본연의 인물이 더욱 빛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마천은 유일하게 나라(秦)의 이야기를 <진본기>와 <진시황본기> 두 번이나 적었는데 진시황이 서거하고 호해가 즉위하여 제후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조고가 황제를 죽이고 자영을 세웠지만 한 달여 만에 제후가 그를 죽이고 진나라를 멸망시킨 일은 <진본기>에는 개괄하여 생략하고, <진시황본기>에 자세히 서술하였다. 이런 식으로 상세함과 간략함이 서로 절묘하게 엇섞어 표현하였다. 보통 본전에는 그 인물을 긍정적으로 서술하였고, 나머지 관련 인물을 서술하는 편에서는 그 사람의 상이한 부분 등을 분산시켰다. 전국시대 명재상으로 뽑히는 상앙에 대해서는 <상군열전>에서는 칭송하는 내용을 적었고, 본전의 찬에서는 각박한 사람이라며 폄하하였다. 이것은 모순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호문으로 서로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호견법은 교묘한 편집과 귀납을 통해 인물의 형상이 본전과 기타전 모두에서 서로 보완이 되게 한다. 호견법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 즉, 사기 전체를 읽지 않는다면 그 인물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제시한 호견법. 호견법이 등장한 이후 모든 책은 호견법을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호견법은 중국 역사서의 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마천의 언어예술

사마천은 바로 사학의 대가이자 문학계의 거장이었다. 인물 표현에 있어 생생하고 풍부한 언어 구사력뿐만 아니라 서술 사이에 사마천 자신의 의견을 치밀하게 끼워 넣거나, 속담을 적절히 인용하였다. 문장을 이루는 언어가 적절하고 정확하여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다. 사기에서 서술 언어의 두드러진 특징은 정련됨과 생동감, 정확함, 풍부함인데, 전쟁 장면의 묘사에서는 정련된 언어가 아주 잘 드러나있다. 인물의 성격 및 특징을 서술할 때는 선명한 언어로 서술하여 인물의 형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다. <<사기>>에서는 특히 경전, 가요와 속담 등을 인용한 부분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작품의 문채를 증가시키고 표현력을 더욱더 높이었다. 사마천이 모은 자료는 오랜 세월 동안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것들을 모두 쉽게 이해되도록 직접 번역하여 운용하였다. ,, 시대의 역사적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고대문서인<<상서>>는 그 당시의 문자체로 쓰여있지만 사기에는 비교적 이해 가능한 문자로 해설 및 번역이 되어있다. 사마천은 적절한 편집과 번역을 통하여 문장과 인용문을 하나의 어우러진 문체로 융합하여 사기를 위대한 고적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역사,문화적 가치

중화민족문화를 펼쳐내다

<<사기>>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학의 범주를 뛰어넘는 중화민족문화의 백과전서라고 할 수 있다. <<사기>>는 상고 시대로부터 <<사기>> 이전 단계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사관문화 정신을 수용하였다. <<사기>>는 기존의 사관문화 전통을 결산하면서 단순한 중복이나 모방이 아닌 당대의 현실적 요구에 근거해서 사관문화 전통을 취사선택하였다. 민족문화의 발생기는 상고 삼대이고, 민족문화의 창조기는 전국시대이며, 전국후기부터 진한 교체기까지는 과거의 문화성과를 취사선택하여 정형화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과거 몇 천년의 사관문화에 대한 종합을 시도하였고, 이로써 기존 문화학술에 대한 체계적이고 대대적인 정합을 이루어냈다. 민족문화의 정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기>>는 중화민족문화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역사에 공백을 메우다

진시황은 분서갱유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법가와 농가 외이 책은 불태워졌고 유학자들은 생매장 되었다. 고대사 최대의 사상 탄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기>>가 쓰인 덕분에 유실되고 소실되었던 수많은 기록과 사상에 대한 실마리가 보존되었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연결고리를 찾아준 것이 바로 <<사기>>인 것이다.

사기가 끼친 영향

문학의 발전

<<사기>>가 후세의 문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는 특히 소설과 산문 방면에서 잘 드러난다. 사마천은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전형적인 인물’을 발견한 사람이다. 사기에는 인물의 형상이 빚어지면서 동시에 성격에 대한 표현, 성공적인 세목에 대한 묘사 등에 모두 전형성을 잘 갖추고 있다. 또한 마치 그려낸 듯한 생생한 장면과, 생동감이 넘치는 언어, 인물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수법 등은 그 당시 어느 문학작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이와전과 양창전에서는 발단, 전개, 위기, 결말이 존재하고 주요 인물끼리에 모두 교감이 보이는데 이는 사기의 형가전과 전단열전 등의 인물 형상과 일맥상통한다. 대唐代의 수많은 전기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 후대 소설가의 창작 계발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 한유와 송나라 구양수 등 산문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도 모두 <<사기>>를 기치로 삼은 사람들이다. 서사叙事에 있어 웅건함과 전아함은 <<사기>>를 따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기>>의 문채文彩와 문풍은 중국문학발전사에서 전대를 계승하고 후대를 열어주는 작용을 하였다.

역사학의 발전

사마천은 중국 3000년 역사를 한 편에 집중시켜 역사학의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사마천의 <<사기>>는 <<춘추>>를 계승하여 지은 것이다. 하지만 <<사기>>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그 내용의 광범위성과 복잡성, 조직의 계통성과 완전성은 <<춘추>>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춘추>>는 각국의 역사적 사실을 섭렵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사 중심이다. 청대의 사학가 조익은 “사마천은 본기로 제업을 서술하고 세가로는 제후국을 기술하였다. 10표로 시사를 엮고 8서로 제도를 상세히 밝혔으며 열전으로 인물을 기록하였다. 이 예가 정해진 이후로 역대의 역사를 짓는 사람들은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실로 역사학자의 궁극적인 모범이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사기>>의 식견은 탁월하고 포괄한 것이 넓어서 이후의 2000년 동안 정사의 모범이 되어 이 법도를 준수하게 하였다. 이것을 따라 황제시대에서 시작하여 청말에 이르기까지 중화민족의 전사全史를 이루게 한 것이다.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은 <<사기>>라는 이 휘황찬란을 대작으로써 옛 역사라는 기초 위에 새로운 비약을 가져왔다.

문화의 발전

중국문화를 연구할 때 고사성어만큼 풍부한 소재를 제공해주는 것은 없다. <<사기>>에는 3000년의 시간과 그 시간 속 주인공들이 빚어낸 지혜와 통찰력의 성어, 명언 등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다. 최소 100여 개의 성어가 중국의 문화의 보고를 극도로 풍부하게 하여 중국의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참고자료

김영수, 난세에 답하다-사마천의 인간탐구, 알마, 2008
천퉁성, 사기의 탄생 그 3천년의 역사, 장성철(역), 청계, 2004
양치엔쿤, 사마천과 사기, 장세후(역), 연암서가,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