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흔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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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흔문학

‘상흔문학’은 1978년 8월 상하이 ≪문회보 文匯報≫에 발표된 단편소설 <상흔 傷痕>이 계기가 되어 그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문혁시기 수난과 고초를 당했던 일군의 작가들이 문혁이 종결된 후 다시 문단으로 돌아와 문혁 기간 동안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들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자전적 성격의 소설을 일컫는다. 문학계가 '5.4 신문학'의 전통을 다시 살려내겠다고 분발하는 중에 1977년 11월 호 『인민문학』지에 류신우(劉心武, 1942~)의 문제작인 단편소설 「반주임(班主任)」이 실렸다. 문화대혁명 때 젊은이들이 입은 정신적인 상처가 작품의 주제여서 이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문예게에 큰 자극을 주었다. 류신우는 연이어 같은 성질의 「강의를 끝내지 못한 과목」,「누런 겉옷을 입은 청년」등을 발표하였는데, 1978년에는 루신화의 「상흔」, 머잉펑의 「대나무 잎」등 같은 성격의 작품들이 연이어 나와 '상흔문학'이란 말이 생겨났다. 상흔문학은 출현과 동시에 널리 확산되면서 대단한 열풍을 일으켰고, 곧 ‘반사문학’, ‘개혁문학’으로 빠르게 발전되어 갔다. ‘상흔’, ‘반사’, ‘개혁’이라는 문학조류가 이처럼 빠르게 형성되어 발전해갔다는 점은, ‘반문혁’을 모태로 하는 이들 문학의 내적 에너지가 현실 비판 및 현실 개혁 의지와 맞닿아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문혁을 철저히 부정하고 폭로하며 극복할 것을 주지(主旨)로 하는 이들 문학은, ‘개혁’ 혹은 ‘변화’에 대한 시대적 갈망이 가시화되어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배경

1976년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사인방>이 같은 해 10월에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이 완전히 종결되고 문예계에는 새로운 <백화제방>의 새 봄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 기간에 거세되었던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복권되고, 수많은 문예지들이 복간되었다. 그리고 문혁기간에 해체되었던 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와 중국작가협회 등도 재조직되었다.

건국 이후부터 문예계는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문예 활동을 해왔고, 만약 국가의 문예방침에 어긋날 경우에는 비판과 숙청을 받았다. 실제로 이미 마오쩌둥시대에 많은 작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우파右派로 규정되어 희생됨에 따라 창작활동을 공식적으로 중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문혁을 비판하고 문혁이 남긴 상처를 묘사하는 상흔문학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흔문학의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것이 ‘3중전회’와 ‘제4차문대회’이다. 상흔문학이 권력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첫 번째 계기는 ‘3중전회(1978.12.18-12.22)’이다.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당권을 장악하고 사개현대화四個現代化와 개혁개방정책의 강력한 실천을 발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문예계에도 현대화 실천조항이 만들어졌다. 문예계 현대화 6개항은 ① 쌍백방침雙百方針의 관철, ② 실사구시, ③ 사상해방, ④ 禁區打破(금기 타파), ⑤ 민주정신 발양, ⑥ 극좌노선 시정 등이다. 이 회의로 말미암아 문혁이 끝났지만 양개범시兩個凡是로 인해 위축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의 사상이 해방되었다.


정책적 지원

상흔문학 작품이 한두 편으로 끝나지 않고 신시기초기에 많은 수의 작품이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정책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정권의 후원을 얻어 발전하게 된 주요 경로는 상흔문학이 당 기관지를 비롯한 많은 대형 문학 간행물에 발표되는 것과 전국 우수 중․단편소설 상을 받는 제도이다. 신시기에 이르러 많은 대형 문학 간행물이 복간되거나 창간되었다. 문혁기간 중에 입은 피해를 고발하고 현대화 정책에 호응하는 상흔문학작품들은 당의 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와 중국 작가 협회 기관인 문연文聯의 간행물인 《문예보》(1978년 5월 복간) 그리고 그 외 대형 문학 간행물인《인민문학》(1976년 1월 복간), 《시월》(1978년 8월 창간), 《화성》(1979년 4월 창간), 《당대》(1979년 7월 창간), 《청명》(1979년 7월 창간) 등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당의 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와 그 밖에 전국에서 영향력 있는 대형 문학 간행물에 상흔문학작품이 실렸다는 사실을 통해 정부에서 상흔문학을 적극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78년부터 소설 분야에 상을 수여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상흔문학이《인민문학》과《문예보》에서 주관한 전국 우수 중․단편소설과 茅盾문학상을 휩쓸었다. 중요한 점은 전국 우수 소설 상 선출에 있어 상흔문학작품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설 분야에 이전에 없었던 상을 수여하는 제도를 만들어 공식적으로 상흔문학에 상을 수여한다는 것은 그 문학이 가지고 있는 주제와 내용을 인정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대표적 작품

1979년 이후로는 문혁 때 '상흔'을 입은 대상이 젊은이들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운동이 남긴 온 사회 여러 면에 걸쳐 남긴 '상흔'의 추구로 발전하였다. 루 지줸의 「잘못 편집된 얘기」, 츤꿔카이의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꾸화의 「푸른 등나무로 덮힌 나무 집」, 루엔조우의 「천운산전기」, 루야오의 「인생」, 숭푸의 「진흙 속의 해골」등 여러 가지가 쏟아져 나왔다. 1980년을 전후하여 왕멍이 「포례」, 「나바」, 장셴이 「기억」, 가오샤오셩이 「리슌이 크게 집을 짓다」, 「츤환셩이 도시로 나오다」, 장셴량이 「형노인과 개의 애기」, 「영과 육」등의 소설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었다.


평가

1970년대 말, 傷痕文學의 성행은 문학이론비평계 내에서 ‘상흔문학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은 상흔문학의 정당성에 대한 정치적 측면의 찬반 입장이 반영된 신시기의 첫 번째 문학 논쟁이었다. 당시 중국 문예계 내에서 문학을 평가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여전히 정치적인 측면에 편향되어 있었다. 이는 건국 이후 정치와 문예가 이상적으로 일체화를 이루는지를 검열하는 문예계의 내부적인 통제가 고착화되면서 신시기까지 이어진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상흔문학을 비판하는 글들이 잇따라 발표되자, 많은 비평가들이 상흔문학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제4차문대회’가 열릴 때까지 논쟁이 계속 진행되는 중에도, 중국 작가 협회 기관인 문연文聯의 간행물《문예보》의 지지에 힘입어 상흔문학작품들은 꾸준히 발표되었다. 1979년 10월에 열린 ‘제4차문대회’에서 과거 1942년부터 지속되어 왔던 “문예는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문예방향을 “문예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한다.”로 당의 문예정책을 수정하여 신시기문예의 방향을 확립하였다. 또한 1980년 1월 23일부터 2월 13일까지 열린‘극본창작좌담회’에서 당은 문예계에 대해 다시 한번 사상해방과 창작의 자유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상흔문학논쟁에서 문제시되었던 ‘문예와 정치의 관계’는 일단락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81년에 상흔문학작가 백화白樺가〈고연苦戀〉으로 인해 비판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고, 1983년에 ‘정신오염 철저 제거운동’이 전개되면서, 문예계의 창작의 자유는 다시 억압되었다. 이로 인해 문예계는 상흔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