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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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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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당나라
별칭 자는 홍도(洪度)
직업 기녀이자 시인
주요 작품 송우인(送友人), 주인우후완죽(酬人雨后玩竹) 등

개요

당나라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자는 홍도(洪度)이고, 이름은 설도(薛濤)이다. 약 768에 출생해 832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6세에 기적에 들어갔으며, 위고와 원진과 교제했으나 결혼하지는 않았다. 후대 사람들에게 어현기, 이야, 이채춘과 더불어 당대 사대 여류시인이라고 불렸으며, 탁문군, 화예부인, 황아와 더불어 촉중4대재녀라고 불렸다.

생애

유년기

대부분의 고전 여성 문인들과 같이 설도의 생몰 연도와 출신가문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약 768년에 태어났다고 추정할 뿐이다. 설도는 당대 수도인 장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관리였고, 설도는 아버지를 따라 장안에서 촉의 성도로 가게 된다. 설도는 어렸을때 부터 영리하고 음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10살때 그녀의 아버지와 다음과 같은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오동나무를 보며

뜨락의 섬돌 한그루 묵은 오동은 자라난 줄기 구름에 닿을 듯 하네(庭除一古桐,耸干入云中)

라고 시운을 떼자

枝迎南北鸟,叶送往来风 가지는 남북의 새들을 맞이하고 잎사귀는 오가는 바람을 보내내요(枝迎南北鸟,叶送往来风)

라고 이어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곧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설도는 악적에 이름을 올려 기녀가 된다. 아름답고 시적 재능이 뛰어났던 설도는 곧 기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며 당시의 유명한 시인들인 원진, 왕건, 백거이, 두목 등과 시를 나누며 교분을 나눈다.

여교서

785년, 중서령 위고는 검남서천의 절도사였다. 그는 한 연회에서 설도를 보게 되고 설도에게 시를 한 수 지어 올리라고 명한다. 그러자 설도가 즉석에서 시를 한수 짓는 데, 그것이 바로 왈무산묘(谒巫山庙)이다. 시를 본 위고는 어린 여자에게서 나온 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며 극찬을 한다. 설도의 명성을 더 널리 퍼져만 갔고 그녀는 위고의 사람이 되었다.

위고는 절도사로서 지내면서 설도와 많은 접촉을 하였고, 설도에게 문서 작업을 넘겨주곤 하였다. 설도는 그 일을 쉽고 뛰어나게 해냈다. 위고는 이를 보고 인재를 썩힌다고 생각해서 조정에 보고를 올려 그녀를 '교서랑'에 올릴것을 주청했다. 교서랑은 주로 책의 글자를 교정하여 바로잡는 일을 하였는데 비록 9품 관직에 불과했으나 관직의 문턱은 높았다. 오로지 진사 출신의 인재만 가능했고 대시인 백거이, 왕창령, 이상은 두목등이 관직으로 관료로서 첫걸음을 내딛었던 만큼 상징성이 큰 관직이었다. 하물며 여성이 이 관직에 오른 전례가 없었다. 비록 현실적인 이유들로 설도는 교서랑의 직책을 받지 못했으나 이 논란은 설도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 일로 설도가 너무 유명해지자 사천의 관원들이 위고를 만나기 위해서 설도에게 뇌물을 주는 일이 잦아졌다. 비록 설도는 뇌물을 받기는 하였으나 모두 위에다 받쳤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자주 반복되고 커지자 이는 위고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 위고는 곧 설도를 송주로 귀양보낸다. 설도는 귀양길에 자신의 심정을 시로서 표현해 위고에게 바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별시 10수(十离诗)이다. 시를 받아든 위고는 설도를 용서하고 설도는 성도로 돌아온다. 곧 설도는 악적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서 자유의 몸이 된 후에 완화계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불과 20살 이었다.

원진

그리고 설도의 생애에 있어서 깊은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는데 그가 바로 원진이다. 809년 3월, 시인이었던 원진은 감찰어사로서 지방으로 순시를 나가게 된다. 전부터 설도의 명성을 들어왔던 원진은 촉을 지나면서 설도를 보러가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설도는 신분과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원진을 열렬하게 사랑했다. 두 사람은 100여편에 달할 정도로 많은 연애시를 주고 받았다. 아마 이 시기가 설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 였을 것이다. 하지만 7월, 원진은 낙양으로 떠나게 되고 둘은 헤어진다.

황혼기

설도는 기녀였고 원진보다 나이가 11살 많았다. 이러한 장벽으로 인해 원진과 헤어지게 된 설도는 완화계에서 회색 장포를 입고 조용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벽계방으로 이주하여 음시루를 짓고 스스로를 여도사라 칭하며 마지막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832년에 눈을 감는다. 사후 2년이 흐른뒤 재상을 역임했던 단문창이 손수 '사천여교서설도홍도지묘'라는 묘비명을 새긴다. 설도는 생전 500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는 단 90여 수만 남아 있다.

참조문헌

2009, 안이루,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에버리치홀딩스, p182-197

2009, 안정주, <당대 여류시인 연구>, 동국대 석사 논문

중국 바이두 백과